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yosepina Feb 16. 2020

따뜻한 사람이라서가 아니라

편하지 못한 사람이라

어제 '그알'은 괜히 봤나 싶었다. 간병살인에 대한 이야기였다.

보고도 믿기지 않는, 듣고도 부정하고 싶은 참담한 사연들이 연이어 소개되었다. 그중 마지막 이야기.

20년째 치매를 앓고 있는 아내를 돌보던 60대 남편은 제주에서 부산으로 돌아오던 여객선에서 아내와 자신의 몸을 묶어 함께 바다로 투신한다. 기초수급자에서 탈락되어 복지센터의 지원이 끊긴 시점에 살던 집에서 나갈 수밖에 없는 상황까지 겹친 것이다. 그들은 돌아올 집이 없었다. 

방송에서는 묻는다. 그들이 배를 탄 것일까, 우리가 그들을 그 배에 태운 것일까? 미래에 그 배에 내가 타지 않는다고 누가 보장할 수 있을까.

'이제 끝났다'라는 절망감에 사로잡혔을 거라는 전문가의 말이 너무 가슴 아팠다. 감히 헤아려 보았다. 갈 곳이 없다. 여기가 막다른 길이다. 힘들게 60년을 넘게 버틴 내 삶의 지금 결과는 고작 이것이구나. 그 마음이 얼마나 처참하고 비참했을까. 닿지 못해도 짐작이 갔다. 

 그러면서 동시에 내가 이 사연을 오래도록 잊지 못할 거라고 생각했다. 예전에 '명의' 프로그램에서 간암 말기 환자가 교통사고로 실려와 사망했을 때의 사건을 내 트라우마처럼 오랫동안 기억했던 것처럼. (수많은 환자의 죽음을 목도했던 이국종 의사도 가장 기억에 남는 환자라고 해서 놀랐던 적이 있다.)  

 내가 특별히 마음이 따뜻한 사람이어서가 아니다. 


 며칠 전, 서류를 내러 다른 사무실로 바쁘게 가던 중 누가 반갑게 말을 걸었다.

 "안녕하세요?"

 "어...? 어? 안녕하세요?" 

인사를 하고 지나치긴 했는데 순간 누군지 떠오르지 않았다. 지나고 3초 뒤쯤 깨달았다. 아.. 과장님이다.

 거의 첫 직장이던 곳에서 오랫동안 센터 소식지 발간을 담당해주셨던 분이다. 항상 친절하고 상냥하신 분이셨다. 신생 연구단에서 일을 시작하며 소식지 발간이 필요하다고 교수가 말했을 때 나는 과장님을 떠올렸다. 오랫동안 학교에서 일을 하셔서 잘 아시니 믿고 맡길 수 있었다. 과장님 업체에도 신생 거래처가 생기는 일이니 좋을 거라고 생각했다. 내 예상은 빗나갔다.

 미팅 자리에서 교수는 평소 내게 하던 꼰대 짓을 가감 없이 발휘(?)했다. 견적서 가격이 비싸다는 것이다.

 

교수 : 이거 이거 이 비용은 다 없애.

과장님 : 저희가 인쇄업체가 아니어서요.. 교수님.. 그건 디자인 비용입니다. 

교수 : 아, 됐고 이 가격은 빼도 될 것 같아.

과장님 : 아.. 교수님.. 저희가 디자인 업체라 그 부분은.. 디자이너들한테 가는 비용이라... 인쇄 비용은 낮춰 보겠는데..

교수 : 그거 뭐 디자인 그냥 하면 되는 거.. 얼마 안 들잖아? 다 부풀려 받는 거잖아?

과장님 : 교수님, 그렇게 말씀하시면..

교수 : 어 그러니까 이거 이거는 다 빼도 될 것 같아. 그렇게 합시다. 


늘 그렇듯 그는 남의 말은 듣지 않았다. 늘 클래식만 듣고 고급 커피만 마시면서 본인이 대단히 교양 있고 지적 인 사람이라 생각하는 듯했지만 무례하기 짝이 없는 인간이었다.

행사에서 식사란 늘 여유 있게 예약을 해두어야 하기에 참석자+알파 100인분 예약을 해두면 100인이 다 오지 않았으니 먹은 만큼 내야 한다고 내게 가서 밥값을 깎으라고 했다.

"원래 다 그렇게 합니다." 다른 교수들이 입을 모아 말해도 듣지 않았다. 결국 나는 내가 세상에서 제일 싫어하는 떼쓰는 진상 손님처럼 호텔 직원에게 허리를 폴더로 접어 여러 번 죄송하다고 말해야만 했다.


 학교 안의 자기 밑의 사람은 인간처럼 생각 안 했고 나에겐 매일 가해지는 폭력이었으니(용케도 7개월을 버텼다.) 그러고마 할 수 있었지만 이번은 경우가 달랐다. 4년이 넘는 시간 동안 늘 밝게 웃는 모습만 보여주었던 과장님의 얼굴이 굳어가는 것을 처음 보았고 나는 차마 고개를 들 수 없었다. 내가 괜히 과장님을 불러 이런 수모를 겪게 만들었구나 싶은 생각에 너무 죄스러웠다.

 "과장님, 죄송해요.. 너무 죄송해요.. 교수님이 원래 좀 이쪽 상황을 잘 모르셔서.."

교수 방에서 나오자마자 나는 몸 둘 바를 몰라 연신 죄송하다고만 말씀드렸다. 과장님은 아무 말씀도 하지 않으셨다. 빈말이라도 괜찮다고 하실 과장님이셨는데 정말 마음을 많이 다치신 듯했고 그나마 워낙 좋으신 분이라 그만큼 참으시는 것 같았다.

 그 후로  브로셔, 클리어 파일 등을 제작할 일이 더 생겼지만 나는 더 이상 과장님을 찾지 못했다. 그분도 맡지 않으실 것 같았다.

 그게 8년 전의 일이다.

 8년 만에 만난 과장님은(지금은 과장님이 아니겠지만) 지나가는 나를 보고 반갑게 알은체를 해주셨다. 

아.. 아직도 학교랑 일을 하시는구나. 나를 기억하고 계시는구나. 잠시 서서 어떻게 지내시냐고 물어볼걸 그랬네.. 다시 뵐 일이 있으려나? 그때 그 일을 기억하실까? 여러 가지 생각이 들었다.

 일을 하다 보면 그보다 더한 일도 많이 겪으셨을게다. 그 일은 이미 오래전에 기억에서 지워졌을지도 모른다. 그런데도 나는 과장님과의 마지막 기억만 붙들고 혼자 마음을 쓰고 있었다. 

 내가 특별히 마음이 따뜻한 사람이어서는 아니다.


"감정이 수반된 기억은 오래갑니다."

오래전 건강 프로그램에서 전문가가 했던 말이다. 그 한마디에 나의 많은 것이 설명되었다. 너는 어떻게 쓸데없는 것 하나까지 다 기억하냐고 신기해하던 지인들의 물음도, 이제 그만 좀 잊어버리라고 안타까움을 담은 비난에도 내가 왜 이럴 수밖에 없는지 답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나에겐 일상의 모든 사건과 사고들이 '그냥' 지나가는 법이 없었다. 모든 일 하나하나에 감정을 담았고 그래서 오래 기억하고 곱씹었고, 그랬기에 남들보다 더 아프고 힘들었다. 

 "그게 왜 힘들다는 거야?"

 "그냥 그런가 보다.. 흘려버려"

모든 일에 감정을 담고 그 경험을 장기기억으로 전환하는데 탁월한 능력(?)을 가진 내게 그 말은 위로가 되지 않는다. 어떻게 하면 '그냥'일어나는 '평범한' 일에 마음을 쓰지 않을 수 있는지는 아무도 알려주지 않았다. 아마 보통은 다들 그냥 그렇게 되니까 방법조차 모르는 거겠지만.

 그래서 최대한 피하고 산다. 보지 않는다. 외면한다. 

 타인의 트라우마가 내 트라우마가 되지 않도록. 거짓말을 진짜처럼 느끼게 하는 드라마의 희로애락이 내 마음에 들어오지 못하도록. 그런데 언제까지 피할 수 있을까. 아직도 아내의 시신은 찾지 못했다는 어제 그알의 부부 사연이 하루 종일 나를 떠나지 않고 있는데. 다른 방법은 없는 걸까. 

  

매거진의 이전글 냉철함 속에서 발견한 온기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