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업이든 아니든, 그로 인해 돈을 벌든 아니든 '그래. 나는 여행가야! 난 여행에 가장 많은 시간과 돈을 쓰는 사람이야'라고.
역병이 창궐과 재창궐을 반복하여 여행 못 간지 2년. 지금의 나는 정체성이 없어진, 뭣도 아닌 사람이 되었다.
정리하면 집을 사랑하는 한량 쯤 되겠다.
한량답게 가장 좋아하는 시간을 꼽으라면 TV를 침대 방향으로 돌려(90도 돌아가는 벽걸이 TV를 소유한 자) 침대에 기대어 손가락으로 리모컨만 움직이면서 예능 프로를 보거나 옆 테이블에 커피를 올려두고 책을 읽는 순간이다. 주말에 그런 시간을 보낼 때면 조그맣게 '와, 행복해'라고 중얼거리기도 했다.(크게 말하면 이 소박한 행복마저 빼앗길 것 같은 불안한 심리를 가진 자의 행동)
여느 때와 같이 나무늘보처럼 늘어져 TV를 보고 있는데 TV 밑에 나란히 쌓여있는 책 목록에 눈길이 갔다. (읽고 있는 책을 두는 지정석이다.)
웃겼다. 저 3권의 책도 나라는 사람의 정체성을 드러낼 수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서.
TV 밑에 책 지정석. 벌거벗은 세계사를 보고 있던 중이었나 봅니다.
1. 삼나무관-도서관 대여
작년 연말에 올해 소박한 계획들을 나열하며 크리스티 추리소설을 읽겠다고 다짐했었고 지키고 있다. 지키고는 있는데 7월이 다 갔는데 4권 읽었다. 전집 다 읽으려면 전 생애에 걸쳐 읽어야 할 것 같다.
어릴 때부터 추리소설을 좋아했는데 초등학교 때 다니던 피아노 학원 책장에 추리소설이 한가득 있었다. 피아노보다 책을 더 열심히 읽었다. 재미있으면 새 책보다는 읽었던 책을 읽고 또 읽었다. 어린 나이에도 짜임새 있는 구성과 전개에 자주 감탄을 했던 것 같다.
어떻게 이런 이야기를 만들 수 있는지 신기해하며 범인을 추리하는 과정을 즐겼다. 내가 찍은 범인과 마지막 진범이 달라야 재밌고 신난다. 전집을 다 읽지 못하고 중간에 포기했던 건 작가의 범인을 깔아놓는 복선을 읽었기 때문이었다. 과학적 추론과 논리적 근거 없이, '아.. 이 작가는 범인을 초반 스토리에 이렇게 배치하는구나'를 알아버려서 흥미를 잃었었다. 그때는 예민한 10대였고 지금은 그런 촉이 없다.(잠시 슬퍼한다.) 다시 읽으며 감명받고 감동받고 이런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천재성을 샘내는 과정을 새롭게 즐기려 한다.
글공부하던 시절에는 선생님께서 독서 노트를 꼭 만들라고 하셔서 스토리가 있는 책을 읽고 난 뒤에등장인물/줄거리/감상으로 요약하여 정리를 하곤 했는데 어느 순간 당연히(?) 안 하게 되었다. 올해부터 절치부심하고 독서노트와 감명 깊었던 책 구절을 메모하는 습관을 다시 만들어 나가고 있었는데... 랜섬웨어 공격으로 파일이 파괴되었다. 괜찮다.... 많은 양은 아니었다... 30페이지 정도 됐던 거 같은데... 괜찮다... 진짜다... 다 괜찮다...
2. 그림으로 나를 위로하는 밤-내 돈 내산
브런치 북 8회 대상작. 유랑선생 작가님의 책이다. '와아~! 내 글도 열심히 읽어주시는 작가님의 책이 나왔다니!' 감개무량했다. 이미 브런치에서 읽고, 공감을 하고, 댓글까지 열심히 달았던 글인데도 다시 봐도 위로가 된다. 구구절절 울림 있는 이야기와 따뜻한 문체가 나를 다독여준다. 방구석 1열 미술관 관람을 할 수 있는 명화들 소개는 덤 치고는 과분한 선물이다.
아끼는 책을 읽을 때의 버릇은 읽으면서 얼마가 남았는지를 자꾸 확인하는 것이다. 남아있는 장수가 야금야금 줄어들 때 안타깝고 속상하다. 1/3 정도 남았는데 다 읽은 후에는 위로가 필요한 주변 사람에게 전달해줄 계획이다.
자기 학대와 자기 비하에 시달려 늘 구원받고 싶었던 나는 이런 위로의 책들을 숱하게 읽었다. 읽을 때뿐이고 다시 제자리로 돌아와 나를 괴롭힐지언정 이 역시 반복하다 보면 나를 조금은 더 아낄 수 있지 않을까 싶었다. 바뀐 게 별로 없지 않나 싶어도 요즘은 돌아서서 나를 자책하고 원망하더라도 앞에서 싫은 소리도 내뱉고 쌈질(?)도 잘하는 걸 보면 발전(??) 한 거 같긴 하다.
3. 뇌 과학자는 영화에서 인간을 본다-도서관 대여
약간 즉흥적으로 빌린 책이다. 보고 싶었던 책들이 죄다 대출 중이라 음... 그렇다면? 하고 집어 들었다. 알쓸신잡에 나왔던 뇌과학자 정재승 박사의 책인데 평소에 심리학이나 뇌과학에 대한 관심이 많고 정재승 박사가 방송에서 하는 말들이 너무 흥미롭고 영화에 대한 조예도 깊어 보여서 그의 책을 한번 읽어야지 생각은 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기회(?)가 왔길래 그의 저서들 중 가장 제목이 끌리는 책을 선택했다. 여러 영화를 예시로 제시하며 그 속에 나타나는 인간의 행동에 대한 분석과 과학적으로 가능한 일인지에 대해 쉽게 설명한다.
'내가 왜 이러는 걸까?' '나는 왜 이런 생각을 하는 걸까?'에 대한 물음에 오랫동안 시달렸다. 그럴만한 충분한 이유가 있다는 확신이 필요했고 내가 이상하거나 잘못한 게 아니라는 증거를 찾고 싶었다. 가지 못한 길(심리학)에 대한 미련도 한몫해서 관련 서적들을 읽으며 아쉬움을 달랬다.
타고난 예민함+눈치에 이런 책을 통해 얻은 어설픈 지식까지 더해져서인지 사람에 대한 판단이 비교적 빠르고 정확하다는 점은 장점으로 꼽을만하나 단점 또한 동일하다.
"혹시 무당이세요?"
처음 보는 남자들에게서 심심찮게 들어본 말이다. 안 좋아하더라. 슬금슬금 피하는 것 같기도 하고. 적당히 모르는 척했어야 하는데 나는 그거 내가 좋아하는 남자한테만 할 줄 안다. 그래서 인기가 없는 것 같다. 슬프지만 이번 생은 틀렸다.
호불호가 강하고 호 보다는 불호의 종류와 개수가 훨씬 많은 까탈스러운 나로서는 좋아하는 몇 가지만 반복 추구하게 된다.
지식층이 얇고 식견이 좁은 것이 콤플렉스 이면서도 독서의 취향 역시 원하는 장르만, 좋아하는 작가의 책만 계속 파게 된다. 몇 번이고 다양한 장르, 새로운 작가의 글을 보려고 노력했으나 결국 별다른 감흥을 못 느끼고 원점으로 돌아오고 말았다. 애쓰다 나가떨어지는 경험을 몇 번 하고 나니 그렇다면 나의 취향도 정체성도 존중해줄 필요가 있지 않나 생각을 해본다.(변명의 달인)
좋아하는 책의 취향이 확고하다는 것도, 그런 책을 즐겨보는 것도 나의 정체성이다. 인정하고 무리하지 않는 선에서 열 번에 한 번 정도만 가벼운 마음으로 다른 책도 곁눈질해보기로 마음을 바꿔 먹는다. 그래도 안 되면 어쩔 수 없고 뭐. 뭐라도 읽는 게 어디야.
지인의 서점 방문에 동행했는데 책을 사준 다기에 희망 리스트에 있는 책 중에 한 권을 골라 선물 받았다. 집에 돌아와서 책을 보니 또 웃긴다. 그 많은 리스트 중에서도 나는 또 가장 나 같은 책을 또 골라잡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