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폰 대신 종이를 들어
층간소음.
현대인은 이웃집에 누가 사는지 잘 모른다고 한다. 몇 년씩이나 오래 거주 중이더라도. 지금 우리 아파트도 그렇다. 우리 말고도 세대가 3세대나 되는데 단 하나도 모른다. 굳이 알아야 하나 싶고. 가끔 알고 싶다는 생각을 가지게 되는 경우는 ‘층간소음’이다.
도대체 누가 살길래 이렇게 쿵쾅거리는지 인상을 찌푸리며 위를 보게 되는 것이다. 시끄러운 주민을 홧김에 칼로 찔러 죽인 사례가 뉴스에 나는 시대. 무섭지만 우리는 이 무서움이 낯설지 않아졌단 사실에 대해 더 무서움을 느껴야 한다.
중학교 국어시간, 층간소음을 다룬 단편소설이 기억난다. 매일 위층에서 나는 긁는 소리에 ‘교양을 챙긴 후려치기’를 하려다, 된통 후려치임 당한. 주인공은 그 댁이 시끄러우니 조용히 좀 해달라는 메시지로 ‘실내용 슬리퍼’를 선물로 챙겨 올라간다. 하지만 열린 문 앞의 위층 주인은 서있지 않았다. 소음의 원인에 앉아있었다. 휠체어. 당황한 주인공을 끝으로 글이 끝난다.
내신 점수를 잘 받으려 기를 쓰고 분석한 작품보다 국어 선생님이 “이건 가볍게 읽고 넘어가자~” 하고 교실 안 누군가에게 읽으라고 시키는 글이 예전부터 더 좋았다. 시험에는 분명 나오지 않거나 보너스 문제로 나올 것임을 알아챘어도 나는 그 글을 두어 번 더 읽었다.
나에게도 기억에 남는 이웃이 있다. 그로부터 3-4년이 지난 해에 알게 되었다. 그래서 참 다행이었다. 나 또한 무식하게 아동용 실내 슬리퍼를 고를 뻔했으니. 그 친구는 주말마다 피아노와 플루트 연주를 병행했다. ‘혹시 예중을 준비하나?’ 할 정도로 끊임없는 연습을 했다. 때때로 엘리베이터를 같이 타서 생긴 모습과 내가 나온 초등학교를 다닌다는 것 외엔 아는 게 없었다. 아무튼 클래식 악보로 가득 찬 집이겠거니, 했다.
그 주말은 유난히 연주가 컸다. 하필 내가 고3이었고 시험기간인 어느 날. 우리 집은 내 내신 시험기간이 되면 소리 없이 살았다. 거실 TV 소리가 <조용히> 모드가 되는가 하면, 동생은 발소리 때문에 엄마에게 주의를 들었다. 시험 준비하는 나 못지않게 식구들이 함께 고생했다. 뭐, 그때는 “도현이 너는 점수에 목숨이 왔다 갔다 하는 애 같아.” 소리를 들었으니. 상위권을 이루는 한 명으로서 이 정도 무음 모드는 당연하게 살았다. 그래서인지 위층의 플루트 소리는 당연할 수 없었다.
“이 놈의 플루트 소리.”
잠깐 나와 밥을 먹는데 엄마가 한숨을 쉬었다. 그 짜증은 평일이 아닌 주말이어서 더욱 날카로웠다. 미술학원에서 밤늦게 돌아와 자기 전까지 겨우 몇 시간 하는 공부에 비하면 주말은 황금 같은 시간이었다. 하루 종일 책상 앞에 앉아있을 수 있기에. 사실 '황금 같은 시간’도 엄마의 언어에서 비롯되었다. '너는 이 황금 같은 시간에 잠이 오니?’ 주말 공부시간 졸기라도 하면 듣는 소리였다.
다시 책상 의자에 앉았다. 기출문제를 푸는데 연주는 끝날 줄을 몰랐다. 요즘이 되어서야 주목받는 백색소음으로 합리화하기엔 그 친구의 실력은 좀 부족했다. 악보 중간중간마다 일명 ‘삑사리’, <바람 새는 소리 기호> 라도 있던 것일까. 한 때 앙상블 단원으로 활동하던 나는 노력의 과정에서 생기는 소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리고 그것이 연주자 본인은 절대 내기 싫은 소리라는 것도. 그래서 엄마 눈치를 보게 되는 것 이외엔 밉지 않게 들렸다.
야속한 세상. 그런데 시험은 일주일 앞으로 다가왔다. 그걸 아는지 연주는 더욱 크고 오래 지속되었다. 드디어 ‘아랫집에 고3이 산다.’를 알려야겠단 생각을 했다. ‘인터폰 해, 인터폰!’ 마치 재미난 구경이라도 난 듯 동생은 공부방으로 들어왔고 나는 됐어, 했다. 문제집을 한쪽으로 치우고 A4용지를 꺼냈다. 그리고 한참 후 뭔가 한 장에 가득 쓴 나를 보고 엄마는 놀랐다. 내가 욕이라도 채운 줄 알고. 테이프를 들고 위층으로 갔다. 철문에 붙이고 다시 앉아 공부했다. 그 날 이후로 연주 소리가 잘 나지 않았다.
무사히 시험이 끝나고 보상심리를 마음껏 풀던 일주일도 지났다. 나에게 위층 클래식 인재는 잊힌 지 오래였다. 다시 찾아온 여느 평일. 그저 시간에 쫓겨하지 않아도 되는 공부에 감사하고 있었다. 그런데 찾아올 손님이 없는 우리 집에 누군가 찾아왔다. 퇴근하고 막 집에 들어선 아빠의 모습과 닮아있는 분이었다. 허름한 티셔츠 차림으로 문제를 풀던 나는 황급히 공부방 문을 닫았다. 그분은 내 기억상 몇 분 거실에 앉아 우리 부모님과 이야기를 나누다 가셨다.
잠금장치 징글이 울리자 슬며시 문을 열고 ‘누구야?’했다. 바로 위층 아저씨라고 했다. 순간 심장이 덜컥하며 내가 쓴 편지가 기분 나쁘셨나, 걱정했다. 문제집 모퉁이를 초조함에 구기고 있는데 엄마가 롤케이크를 잘라다 주었다.
“위층 아저씨가 사 오신 거야. 네가 쓴 편지가 고마웠대.”
가물가물 하다. 뭐라고 썼지 떠올리면 딱히 별게 없었던 것 같다. 한 가지만 빼고. 아랫집 예민한 고3 언니가 아니라, 그 또래 때 똑같이 클래식을 했던 사람으로서 썼다. 초등학생 눈엔 고3이 꼰대라면 꼰대일 텐데 괜한 오지랖을 부린 게 아닌가 싶었지만. 힘 빠지는 바람소리를 거듭 내면서도 몇 번이고 연주를 이어가는 아이를 당황시키고 싶지 않았다. 경험이 이래서 중요하다고 말한다. 자칫 공감을 못해 “야 조용히 좀 해!” 실수를 저지를게 뻔했으니. 초등학생 오케스트라였지만 그래도 나름 큰 무대에 서기 위해 손에 굳은살이 박혀야 했다. 정말 안 어울린다고들 하는데, 내가 미술 다음으로 인생에서 열심히였던 부문은 음악이다.
어린아이 손에 들린 플루트는 무겁다. 그걸 들고 종일 주말에 불었을 것 아닌가. '너의 무거운 노력을 이해해. 쉼 없이 연습하더라. 나도 그런 적이 있어. 마침 내가 시험을 앞두었으니 이 참에 조금만 쉬어보는 게 어떠니. 딱 며칠이면 되는데 정말로 미안해.' 대충 이런 이야기가 종이 한 장에 담겼고 위층 대문에 붙었다.
양 쪽이 기분 좋은 건의와 대답. 신경이 가장 뾰족할 시기에 겪었다. 위층 아저씨는 항의를 건의로 편지를 통해 전해주어서 고맙다고 했다. 인터폰 대신 종이를 든 결과이기도 하다. 지금은 다른 아파트로 이사왔지만 여전히 ‘층간소음’ 하면 나는 플루트 소리가 들린다. 완벽하고 굵직한 연주 말고 중간에 바람소리가 잦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