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가의 자격, 사소함으로부터
우리 사회의 존중 의미. 사실 그리 거창한 시작일 것도 없다. 어제 SNS를 들락이다 본 떡볶이 그릇부터 출발해도 괜찮다.
떡볶이와 순대, 둘을 같이 시키면 자연스럽게 떡과 순대가 뒤섞인 한 그릇을 내미는 분식집. 흔하게 본다. 어차피 국물에 묻혀 먹을 건데 괜찮지 뭐, 하는 사람. 나는 그 반대다. 떡을 집다가 순대에 흘러 떨어지는 경우도 있고 일단 '빼앗긴 기분'이 든다. 순대 본연의 맛만 느낄 선택권. 비유가 이래서 그렇지, 나는 순대만 먹었을 때 입안 가득 퍼지는 고소한 짠맛을 무척 좋아한다. 떡볶이 국물의 방해 없이 말이다.
<백종원의 골목식당> 애청자로서 두 번 이상 귀한 발걸음을 사는 맛집을 분석해봤다. 첫째는 맛, 그리고 센스. 후자는 거의 발상에서 나온다. 맛에 더해지는 저 떡볶이집 그릇 같은 존재. 담긴 음식이 풍미의 의무를 다한다면 저 집은 '분식 명가'로 불릴 자격을 갖춘 셈이다. 손님의 선택권을 존중하는 배려. 그릇을 받아 든 그는 분명 미소를 지을 것이다.
참 간단한 원리로 감동 벨을 울리는 건데 이걸 '존중'으로 받아들이기까지 시간이 꽤 걸렸다. 아빠는 굳이 밖에서 김밥을 사 먹지 않는다. 이유는 엄마가 직접 싼 것을 좋아해서. 일반 김밥 속에 추가한 것은 별로 없는데 한번 입에 넣으면 몇 줄은 뚝딱이다. 할머니의 김장김치, 김밥집보다 두어 번 더한 참기름칠, 햄과 맛살은 식구니까 마구.
오늘은 아빠 김밥이 주인공이 아니다. 동생 김밥이지. 엄마는 집에서 김밥을 쌀 때마다 매번 동생 것을 따로 싼다. 두는 것도 따로 둔다. 헷갈리지 않게. 다음 날, 어제 먹은 김밥 생각에 식탁 위 놓인 포일 싼 것을 살피면 엄마는 "그건 혁이 거야." 한다. 이렇게 보면 되게 특별한 김밥 같은데 별 것 없다. 속재료에 채소는 찾아볼 수 없고 오로지 계란, 맛살, 햄으로만 채운 김밥. 이게 바로 '혁이 김밥.'
김밥을 한 입 먹으면 뭉툭한 밥을 가르고 마침내 채소가 씹히며 아삭 소리를 낸다. 목으로 넘기기 전까지 그걸 잘게 부숴서 끝엔 삭삭 소리만 나야 하는데, 그게 김밥인데. 채소 편식을 성인이 되어서도 버릇으로 끌고 와버린 내 동생은 못 먹는다. 아빠와 내가 먹는 김밥을 주면 분명 젓가락으로 야채를 쏙쏙 밀어내는 <한심한 젠가 놀이>를 할게 뻔하다.
걔 김밥은 말캉에서 말캉으로 끝난다. 단무지가 없으니 개운한 맛도 없고 그냥 볶음밥을 김에 싸 먹는 듯한. 씹는 내내 소리가 없다. 밍숭한 계란 맛과 경직된 김밥용 햄만이 혀에 굴러다니다 마는 것이다. 넘기고 나면 꼭 김치를 먹어줘야 느끼하지 않다. 어릴 때부터 엄마가 내가 좋아하는 속재료를 더 채워가며 동생 것을 만드는 게 불만이었다. 그래서 쟁반 위에 재료를 펼치고 엄마가 밥을 푸면 따라붙어 손으로 집어먹기 일쑤였다. 계란과 햄을 내가 한 줄 더 먹으려고. (고집불통 첫째로 보이지만 큰애가 어린 동생에게 느끼는 질투는 어마어마하다.)
'혁이는 그거 못 먹고 너는 그래도 둘 다 잘 먹잖아.'
제 뜻대로 안 해주면 미간이 확 줄어드는 초등학생 박도현을 내려다보며 엄마가 설교 중이다. 말캉to말캉이라고 비난하기 시작한 건 얼마 되지 않았다. 늘 따로 싼 김밥을 못마땅하게 보았으니 '엄마의 아들 존중'을 '엄마는 아들만 존중'으로 알아들을 밖에.
지금 와서 왜 동생 김밥 얘기를 꺼내느냐. 달라진 것은 나고 한결같은 건 엄마이기에 최근 밥상을 보고 새삼 느껴서이다. '변함없는 존중'에 대해.
올해 5월 31일, 우리 집 일요일 밥상이다. 동생이 대학에 들어가면서 주말이어도 네 식구가 한자리 모여 먹는 게 드물다. 잠이 덜 깨도 다 같이 먹기 위해 억지로 앉은 식탁. 가장 먼저 보인 프라이 접시이다. 우린 반숙을, 부모님은 완숙을 좋아하신다. 확연하게 드러나는 두 갈래를 존중한 묵묵한 센스. 바로 우리 엄마의 것이다. 사진으로 찍어두는 나에게 뭘 그렇게 유난이냐며 당연한 듯 식사를 하는 엄마.
그렇게 <화목 맛집> 은 계란 노른자로부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