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년 전 들었던 글쓰기 수업 과제로 '내면의 성장'이라는 글을 쓴 적이 있다. 거기서 외적인 것(돈, 유흥, 외모 가꾸기, 사랑)에서 글쓰기를 통해 나의 내면을 들여다보는 등 내적인 성장을 이뤘다는 내용이 주였다. 글을 다 쓰고 멤버끼리 피드백을 나누는데 어느 한 분이 "왜 사랑이 외적인 것인가요?"라고 물었고 그때 뒤통수를 한대 얻어맞은 듯했다.
평소 삶의 태도에 있어서 나는 자아실현(=성공) >>>>>> 사랑(=연애)으로 사랑은 삶에 여유 있는 자들의 선택지라고 생각했다. 사랑은 나에게 어느 정도 사치스러운 것으로 여겨졌다. 상대방에게 투자해야 하는 시간과 감정 소비로 인해 위로 아래로 왔다 갔다 하는 나의 하루, 사소한 결정부터 큰 인생의 결정까지 '오로지 나'만을 생각하면 할 수 없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특히 부모님에게 경제적으로 오로지 의지해야 하는 '유학'이라는 특수한 상황에서 더 큰 지출이 생기는 것이 어쩐지 죄스럽게 느껴졌다.
물론 인위적인 만남을 안 했다는 것이지 일상에서 자연스럽게 스며드는 사람들과는 몇 번의 연애도 거쳤다. 물론 그들과 연애에서 힘든 점이 하나도 없었다면 거짓말이지만 굳이 따지자면 행복한 순간이 더 많았다. 잔디 위에 누워서 시답지 않은 대화를 하며 바라보는 파란 하늘, 맥주 한잔 들고 새로운 공원 투어라는 명목으로 몇 시간 동안의 산책에서 거뜬했던 내 다리, 불이 꺼진 밤에도 나를 비춰주는 상대의 반짝이는 눈동자, 가장 가까운 내편 그리고 내 사람이 있다는 것에서 오는 안정감과 위안들이 더없이 컸다. 하지만 이때까지만 하더라도 연애에서 나오는 그 도파민이라는 물질이 삶의 윤활제가 되어줄 뿐이었고 그 이상의 의미는 없었다.
학업이 안정기에 접어들고 솔로 기간이 2년을 넘어가면서 사랑이 하고 싶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사랑을 하던 나의 모습이 참 예뻤는데라는 생각도 들면서 그때를 돌이켜 보니 새로운 사람을 만날 때마다 나도 한 층씩 성장해 있었다. 이기적으로 나만 생각했던 내가 상대를 배려하는 법을 알게 되는 것, 서운한 감정을 가졌을 때 그냥 토라져 있는 것보다는 나의 감정을 솔직히 설명하는 것, 상대의 삶의 방식과 시간을 존중해 주는 것 등 몇십 년간 다른 환경에서 살아온 두 사람이 서로를 끊임없이 배려하고 존중하는 것이었다.
나보다 더 마음이 여유로운 사람을 만나게 되면 그 사람의 삶을 보고 굳이 조급함을 가질 필요가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되기도 하고 허용할 만한 결벽증을 가진 사람을 만나게 된다면 나도 그로 인해 더 꼼꼼하고 청결하게 집을 유지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반대로 상대의 부족한 모습을 보고 저렇게 행동하지는 말아야지 반성하기도 한다. 그렇게 현재 '나의 모습' 삶의 태도를 결정짓는 것들은 만났던 사람들의 모습이 조금씩 묻어있는 결정체라 해도 과언이 아닐 것 같다. 그렇다면 사랑이 더 이상 외적인 것에만 속하고 필수가 아닌 선택 사항인 것일까?
다만 길던 짧던 나와 함께할 상대방을 선택할 때 이 사람의 나의 삶을 파괴할 정도의 성격적인 결함이 있는 사람은 예외일 테다. 그저 삶에 대한 고찰을 한 적이 있는 사람과 상대방을 존중해 주는 사람이라면 충분히 함께 보낼 때 삶이 이전보다 풍요로워지지 않을까.
나는 계속해서 사랑을 하고 싶다. 이 세상 어떤 풍파를 같이 헤쳐나갈 수 있는 의지할 수 있는 나의 님을 만날 때까지. 나의 부족한 점이 조금씩 채워질 때까지. 그래서 오랫동안 그와 나의 삶이 안정되고 평화로워질 수 있도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