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편이 하던 사업을 정리했다.
자기 이름을 걸고 대표님 소리를 들으며 세웠던 회사가
5년 만에 막을 내렸다.
이렇게 희미하게 끝이 날 줄은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다.
그간 외벌이로 감당해오던 살림살이는 이제 내가 생활전선에 뛰어 들어야 겨우 유지 가능한 상황이 되었다.
아이의 보육 역시 남편과 내가 번갈아 가며 해야 했다.
아이 등하원이나 끼니 챙기는 것 등등이 그랬다.
나는 아이가 집에 없는 그 사이 시간에 가능한 일을 찾아야 했다.
오랜만에 알바몬, 알바천국을 뒤져보며 업무 가능한 시간대를 우선적으로 살폈다. 그러다 딱 맞는 자리를 발견했다.
I성향인 내가 극도로 싫어하는 아웃바인드 텔레마케팅이 그것이었다. 이것만은 하기 싫다..고 여겼는데 이것 말고는 선택지가 없어 보였다.
여러가지 상황에도 불구하고 지금의 회사를 선택하게 된 이유들이 있다.
첫째로 공휴일은 회사 역시 쉰다. 공휴일엔 아이의 어린이집이 운영하지 않는다.
둘째로 개인 사정이 생기면 조퇴가 가능했다. 아이가 갑자기 아프면 내가 아이를 돌봐야 한다.
셋째로 업무 난이도에 비해 시급이 좋았다. 남편 역시 배달 아르바이트를 낮밤 가릴 것 없이 하고 있어서 시급은 내게 중요한 사항이었다.
넷째로 사람을 직접 대면해서 상대하는 것이 아니었다. 사람을 면대면으로 마주하며 업무를 해야 했다면 내 성격상 아마 더 힘들었을 것이다.
다섯째로 회사 규모가 컸고 실내 환경이 좋은 편이었다. 급여 외에도 인센티브라던지 소소한 회사내 이벤트들을 많이 열어주는 대표 덕에 회사 복지가 좋다는 생각이 더러 들었다. 거기에 더울 때 더운 곳에서, 추울 때 추운 곳에서 일하지 않는다는 것은 작은 감사거리가 되었다.
결론적으로 나는 10월 말부터 지금의 회사를 다니게 됐다.
하지만 모든 일들이 내 맘처럼 결을 같이 할 수는 없는 법이기에 내가 버는 시급 안에는 여러 장애 요소들이 있었다.
첫째로 내가 하는 일 자체가 거절당하는 것에 무력감을 느끼지 않아야 버틸 수 있는 일이었다.
모두들 살기 퍽퍽한 시대에 누가 광고 전화를 환영하겠나? 나부터도 광고 전화는 일절 받지 않는데.. 하루에 4시간씩 평균 150여통을 전화 하는데 그 중에 100통은 날서 있는 반응이다. 대답 없이 뚝 끊어버리거나 대놓고 광고에요? 묻고는 필요없다며 짜증 내는 사람들이 많다.
둘째로 세상에는 정말 다양하고 이상한 사람들이 많이 있구나하는 걸 새삼 느끼게 된다.
내가 하는 일은 홍보 관련한 정보를 알려주고 관심이 있다면 상담 일정을 잡는 일이다. 방문해서 계약까지 끌어내는 인력이 따로 있어서 나 아닌 그 사람이 물리적으로 이동해서 사람을 직접 상대한다.
물론 상담까지 받고도 썩 끌리지 않아서 계약하지 않는 사람들도 많다. 내가 잡은 상담의 반은 거의 그렇다. 그런데 상담을 받겠다고 말해놓고 당일날 잠수를 타버린다던지 상담시간에 전화 해보면 자다가 이제 일어났다고 말한다던지 하는 사람들도 있다.
또는 나를 화풀이 대상으로 이용하는 사람도 있다. 내가 업무하는 시간은 11시부터 3시까지이다. 지금 업무하는 곳에서의 타겟은 주로 학원, 헬스장이나 필라테스, 네일샵이나 뷰티샵, 요양원이나 노인복지시설 정도이다. 업장마다 여는 시간이 다 제각각이어서 랜덤으로 전화하곤 한다.
그런데 오늘 전화건 곳에서 불쾌한 경험을 했다. 1시쯤 전화를 걸었는데 꽤 시끄러웠다. 전화한 목적을 10초쯤 설명했을까.. 그쪽에서 "저기요 아가씨"라고 한다. "지금 몇시에요?"라고 묻기에 처음엔 알아듣지 못하고 순수하게 "한시입니다"라고 대답했다. 재차 "몇시냐구요" 라고 말하기에 똑같이 대답했더니 "지금 점심시간이잖아요. 이 시간에 전화거는게 말이 되요?"라고 말하는 상대방. 순간 머리에 열이 훅 올랐지만 "바쁘시면 나중에 전화드릴까요?" 했더니 "됐으니까 전화걸지 말고 앞으로도 필요없으니까 다신 전화하지 마세요"라고 말하며 뚝 끊어버린다.
통화를 끝내고 나서 5분동안은 숨만 골랐다. 후우후우.. 실내인데도 입김이 뜨겁게 나오는 것 같았다. 말처럼 밥을 먹고 있었다면 전화를 받지 말던지 필요없으면 중간에라도 끊어버리던지 하지 왜 이런 짜증을 내게 푸는걸까 싶었다.
세상에 일하며 아쉬운 소리 한번이라도 안 해본 사람이 있을까? 자기 업장 유지하며 손님에게, 자기 건물에서 업체를 연게 아니라면 건물주에게.. 누구에게든 사람은 일하면서 아쉬운 소릴 해가며 살아가지 않을까?
내가 하는 일이 어디서든 환영받는 일은 아니라는 걸 머리로는 알면서도 이런 사람과 전화기 너머로 연결될때면 인류애를 상실한다.
셋째로 열등감에 절여져 있는 무능한 상사의 면박을 견뎌내는 것에서 오는 현타가 있다.
앞서 말했듯 지금의 회사는 인센티브 제도가 있다. 상담에서 계약까지 건수를 많이 잡으면 급여 외에 추가로 돈을 더 준다.
그런데 그 인센티브라는 게 따내기가 쉽지만은 않다. 결국 상담 스케쥴을 잡아도 영업하는 사람이 잘 해야 계약까지 끌어내는 것이고 계약을 하더라도 얼마 안가 계약취소를 말하는 사람도 더러 있기 때문에 입사 이래로 나는 받은 적이 없다.
현재의 회사는 TM(텔레마케팅)을 하는 사람 2~3명과 영업하는 사람 한명을 한 팀으로 묶어 업무를 본다.
지금의 팀에 소속되기 전에 있었던 자리에서는 선임이 둘 있었는데 둘다 본인의 위치에서 각자의 일을 잘 해냈다. 그에 반해 나는 이렇다할 성과를 내지 못하고 있어서 비록 아르바이트지만 시간을 의미없이 축내는 것 같아 눈치가 보였다.
그러던 중 원래 팀원이었던 또 다른 사람이 다시 회사로 돌아오게 되면서 나는 팀원이 부족한 다른 팀으로 일종의 좌천을 겪게 되는데 그것이 현재의 팀이다.
그리고 지금 팀에서는 무슨 일에서인지는 알 수 없으나 팀원이 대리급인 상사 한명 뿐이었고 나보다 더 늦게 들어온 한 명의 아르바이트생이 있었으나 며칠 뒤 나가고 말았다. 그러고도 한 명이 또 들어왔다가 역시 알 수 없는 이유로 곧 그만 두었다.
상사는 처음엔 내게 잘 해주었다. 그러다 언젠가부터 내게 뒤틀린 태도를 보였다. 가령 눈 앞에서 인사를 해도 받아주지 않는다거나 규정대로 내가 잡은 예약에 이해못할 트집을 잡는다거나 하는 것이 그것이었다. 그러다 최근에야 그 이유를 짐작하게 되었다. 바로 내가 그 상사보다 실적을 더 잘 냈던 것이다.
업무가 끝나면 단톡방에 하루 업무를 기록해서 팀에서 가장 윗 상사가 업무보고를 하는데 그 내용은 단톡방에 있는 사람이라면 모두 다 볼 수 있다.
내게 잘 해줄때는 내가 상사보다 실적을 내지 못할 때이고 왠지 모르게 날 서 있을 때의 업무보고를 보면 여지없이 상사보다 내가 더 실적을 냈을 때라는 것을 추측해서 알아냈다.
인센티브라고 해봐야 사실 큰 돈도 못 된다. 더구나 내가 그 사람의 돈을 빼앗아 가는 것도 아닌데 내게 왜 이렇게 할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안팎으로 나는, 전화기 너머의 사람들 처럼 퍽퍽한 4시간을 업무하며 보낸다.
참.. 남의 돈 벌기 정말 쉽지 않다.
그리고 사람들과 부대낄 수록 인류애는 점점 더 상실해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