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효대사 빕스물

있다고 믿지 말고 없다는 것을 잊기

by 듀홈마

몇 주 전, 친정엄마가 쿠폰을 줬다.

엄마는 소위 큰 손으로 오랜 시간 은행과 카드사의 VIP였다.

고객 관리 개념으로 외식상품권을 모바일 쿠폰 형태로 준 모양이었다.

나는 이런 거 쓸 줄 모르니 딸 써라 했고 나는 덥썩 받았다.


나도 남편도 바깥에서 일을 하니 집에 오면 만사 귀찮다.

일 끝마치고 오면 곧 아이 하원시간이라 되는대로 라면이나 먹으면 다행이다.

며칠째 부실한 끼니를 먹다 문득 그 쿠폰 생각이 났다.


어제는 큰맘 먹고 내가 쏜다! 하며 세식구가 빕스로 향했다.

허튼 돈 쓸 생각이 없었으므로 입구에서 쿠폰 사용 가능 여부를 물었다.

안 된다면 바로 나올 요량이었다.

다행히 가능하다는 답변을 얻었고 우리는 신나게 들어갔다.


평일 저녁이라 한산했다.

지점마다 다르겠지만 우리가 간 곳은 맥주랑 와인을 무제한 먹을 수 있었다.

그만큼 기본요금이 비쌌다.

남편과 나 모두 술을 잘 못마셔서 잔은 괜찮다 물렀다.

그러다 온 김에 맛이나 볼까 하고 나만 잔을 달라고 해서 샴페인과 화이트 와인 한 모금씩 마셨다.

달큰하고 맛있었다.

와인과 곁들일 치즈도 다양했고 문어 카르파쵸 같은 생소한 음식도 있었다.


남편은 해산물을 좋아해서 대게 다리만 접시 가득 담아 다섯접시는 먹은 것 같다.

입이 짧고 뱃골이 작은 아이는 먹는둥 마는둥 했지만

이것 저것 새로운 음식이 많으니 평소보다는 꽤나 먹었다.

건물에 주차하면 두시간은 무료주차라고 했다.

우리는 두시간을 꽉꽉 채워 이것 저것 먹으며 긴 식사를 했다.


흐뭇했다.

오랜만에 내 어깨가 으쓱 올라가기도 했다.

배부를때까지 마음껏 먹으라며 짐짓 거만한 말도 했다.

그리곤 이제 계산할 때가 왔다.


쿠폰을 들이미는데 할인을 해준단다.

쿠폰을 써도 할인이 된다니 왠 횡재지?

그럼 만원정도 저 쿠폰에 그대로 남아있겠네.

다음번엔 커피를 사 마실까?

짧은 시간 머릿속에 빠른 계산이 오고 갔다.


드디어 계산할 시간.

뿌듯한 얼굴로 쿠폰을 건냈는데 뭔가 이상하다.

사용금액이 남아있질 않단다.

다시금 내밀었다. 같은 답변이 돌아왔다.

울며 겨자먹기로 돈을 냈다.

게다가 무료 주차시간이 2분 남았다는 말을 들었다.

우리는 허둥지둥 서둘러 주차장으로 내려왔다.


허무했다. 기분이 안 좋았다.

이상하지? 분명 10분 전만해도 나는 지금과는 다른 기분이었는데..


그러면서 내가 기분이 좋은 이유와 그렇지 않은 이유를 생각했다.


내 기분이 좋았던건 우리 세 식구가 흡족한 식사를 했다는 거였다.

평소 못 먹어본 음식들을 먹고 남편도 나도 양껏 식사를 했다.

평일 저녁이라 한적하고 쾌적했고 자리도 편하고 좋았다.

여기 오지 않았으면 먹어볼 일이 없는 음식과 술도 먹었다.


기분이 안 좋아진 건 돈을 냈기 때문이다.

쿠폰이 사용되질 않았고 이렇게 큰 돈을 갑자기 지출할 생각은 없었기 때문이다.


집으로 돌아와서는 괜히 아이에게 틱틱거리기도 했다.

낯선 음식 앞이라 양껏 먹지 않은 아이가 집에 와서 다시 밥과 조기를 구워달라 했다.

나는 그럴 순 없다고 말하며 아까 잘 먹었어야 한다고 뾰루퉁 대답했다.


나의 행과 불행을 판가름하는 것은 무엇인가..?

결국 벌어진 일은 벌어진 거고 거기에 대해선 생각하기 나름 아닌가 싶었다.

엄마가 준 쿠폰이 아니라면 우리는 빕스에 가지 않았을 것이다.

바꿔 얘기하면 쿠폰이 있다는 생각 덕에 우리는 몇년만에 빕스를 간 것이다.

허무함이 밀려올 때쯤 사실 사는 것도 이와 마찬가지 아닐까 생각이 들었다.


이창동 감독 영화 중에 <버닝>이 있다.

그 작품 안에서 여자 주인공인 해미(전종서)가 취미로 마임을 배운다며

남자 주인공인 종수(유아인)에게 없는 귤을 먹는 마임을 보여준다.

그러면서 이렇게 말한다.

마임을 잘 하려면 여기에 귤이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귤이 없다는 것을 잊어야 한다고.

그러다보면 신 맛이 느껴지고 입에 침이 고인다고.


해미가 실재하는 귤을 먹었더라면 마임할 때보다 더 만족감이 컸을까?

귤의 껍질을 깠는데 생각보다 훨씬 더 시큼하고 과육은 질겼다면 어땠을까?

나는 처음부터 값을 생각하고 들어갔다면 덜 불만족스러웠을까?

이 값에 먹을 음식은 아니라고 생각하지는 않았을까?

본전은 뽑아야겠다며 몸에 잘 받지도 않는 와인을 몇잔 더 목구멍으로 부어대지는 않았을까?

배가 부른데도 억지로 음식을 더 먹지는 않았을까?


통장 잔고 일부가 떼어져나간 건 사실이지만 두시간 동안 흡족하게 식사를 한 것도 사실이다.

두 가지 모두가 사실이라면 어떤 게 더 가치 있는 일인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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