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찰시리즈 04.
사람들은 스토리를 좋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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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현재 퍼포먼스 콘텐츠 제작 pd로 일하고 있다.
퍼포먼스 콘텐츠는 뉴미디어의 산물로, 말 그대로 아이돌 등 KPOP 아티스트들의 댄스나 노래를 담는 콘텐츠다. 일전에도 존재했던 콘텐츠지만 코로나 시국 당시 아이돌들이 설 무대가 사라지고 팬들과의 접점이 끊어져갈 때 퍼포먼스 콘텐츠 시장은 크게 성장했다. Mnet M2의 '스튜디오춤', '퍼포37', 1theK의 '원더킬포', '수트댄스' 등. 큰 음악콘텐츠기업들은 컴백하는 아이돌들을 홍보하고자 하는 기획사로부터 유가정책을 통해 퍼포먼스와 몇 편의 예능을 포함한 콘텐츠 제작 패키지를 팔아치우며 자신들의 몫을 챙겼다. 기획사는 아예 프로모션 비용에 이 몇 억씩 드는 패키지 비용을 포함시켜 예산을 짰다. 대형 기획사는 수많은 네임드 콘텐츠에 자신들의 아티를 출연시키곤 했지만 중소형 작은 기획사는 한 편이라도 나갈 수 있다면 다행이었다. 로케도 대부분 호리존이며, 특별한 연출도 존재하지 않는 '가성비' 퍼포먼스 콘텐츠는 KPOP 콘텐츠 시장의 새로운 수익 모델을 만들어냈다.
어찌됐든 이러한 퍼포먼스 콘텐츠의 오도시, 즉 '핵심'은 무엇이냐. 바로 '간지'이다.
멋지고 예쁘면 그만인 콘텐츠인 것이다.
뮤직비디오도 아니고 쇼케이스 무대도 아니고 애매한 '무언가'인 이 콘텐츠는 심미성과 같은 시각적 직관이 전부인 것이다.
위에 열거한 스춤, 퍼포37, 원더킬포 등 대부분의 퍼포먼스 콘텐츠는 호리존에서 조명만 배리에이션할 뿐이다. 로케이션 질감이나 무대 셋업이랄 것이 없다. '수트댄스'처럼 의상에 약간의 트윅을 준 콘텐츠도 있긴 하지만 그뿐이다. 대부분 의상은 기획사가 콘셉트를 가져온다. 나와서 춤만 추면 되기에 구성이랄 것도 없다. '원더킬포'는 말 그대로 킬포인트가 되는 부분에 의상이 바뀌는 연출적 포인트가 있긴 하지만... 글쎄. 촬영 연출도 대부분 음방에서 본 듯한 느낌이다. 지미집, 퀵줌 등. DI도 대부분 아이돌에 최적화된 천편일률적인 색보정 뿐이다.
쓰고 나니 비판만 가득한 기분이지만, 내가 말하고자 하는 바는 어찌됐든간에 이 공정 자체가 모두 '간지'라는 1차원적이고 단순한 목표를 위한 것이라는 점이다. 연출적 포인트나 구성이 없으면 어떠한가? 팬들은 자신들이 좋아하는 아티스트로부터 기대하는 일정 수준의 형태가 있다. 아티스트는 음악을 할 때 가장 멋있고, 그 형태를 극단적으로 단순화시켜 직관을 통해 주입하여 욕구를 채우는, 말 그대로 '음악 포르노' 인 것이다. 포르노가 서사의 흐름이나 구성이 중요할까? 대단한 연출을 하면 사람들이 더욱 많이 볼까? 미미한 차이일 뿐이다. 결국 포르노는 출연자들이 얼마나 이쁘고 멋있는지, 얼마나 관능적 요소를 자극할 수 있는지가 그 콘텐츠의 수준을 좌우한다. 그 목표에 의해 모든 문법이 점철된다. 나아가 한 번 봤던 포르노는 다시 찾지 않게 되는 것처럼, 퍼포먼스 콘텐츠도 대부분 컴백시기에 바짝 소비되고 이후로는 씹던 껌처럼 단물이 금방 빠져버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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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콘텐츠를 사랑하는 사람이다.
작게는 오늘 하루의 기분과 감성, 크게는 인생의 방향성과 목표의식까지도 지배될 정도이다.
그리고 내가 무척이나 사랑하는 작품들, 내 인생에 있어서 빼놓고 얘기할 수 없는 작품들은 훌륭한 스토리를 가진 작품들이다.
<존 말코비치 되기>, <빅쇼트>, <브레이킹배드>, 타란티노의 영화들, 스콜세지의 영화들......
이런 작품들에 영향을 받아 나는 영상업에 뛰어들었고, 돌고 돌아 퍼포먼스 콘텐츠를 제작하는 피디로 일하고 있다. 음악 포르노를 기획하고 편집하느라 주 8일을 매일 새벽까지 일을 한다.
스토리도 없고 감동도 없는 오직 자극만을 위한 '영혼 없는 콘텐츠'를 제작한다.
물론 상업 방송 콘텐츠를 만드는 한낱 피디에게 작품에서 오는 진한 감동과 여운은 사치일 뿐이겠지만.
나는 스토리를 좋아한다. 누구나 스토리를 좋아한다.
전 연인이 그리운 이유는 그 사람이 그리운 것이 아니라 오롯이 둘만이 가졌던 에피소드가 그리운 것이다.
내면에 있는 복잡한 감성들의 집합체인 인간은 서사에 반응하고 움직인다.
대통령도 그런 스토리를 가진 후보가 당선될 가능성이 더욱 높지 않은가?
물론 내 직업에 환멸을 갖는다거나 하는 것은 아니다.
포르노 없는 세상에서 살 수는 없다.
시장의 니즈가 존재한다면 누군가는 만들어내야 할 일이니까.
하지만 가끔은 그런 생각이 든다.
모든 힘을 짜내서 만들어낸 내 자식과도 같은 작업물들이 훗날까지도 회자되는, 깊은 여운과 감동을 지닌 사골같은 작품이 되는 그런 날이 올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