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캡틴서 꽃형님 Oct 18. 2019

쳇! 피팅이 되어야 취직이 된다니...

by 꽃형님

4학년 졸업 패션쇼, 동기 1명과 함께 (둘이서) 졸업 패션쇼 기획을 맡아 봉사하게 되었다. 오래된 기억이라 희미해졌으나 몇몇 동기들의 추천을 받았던 것 같고, 자리 욕심도 꽤 있었던 터라 딱히 거절하지 않았다. 쇼 전체 기획이라니... 크!! 





쉽지 않겠지만 학교 공부 외에 재미있는 경험과 의미 있는 성장이 될 거란 생각도 했다. 내가 봄부터 여름 방학이 끝날때까지 70여 명의 졸업생들을 위한 패션쇼를 준비하는데 온통 정신이 팔려 있던 동안, 동기들은 졸업 작품을 만들면서 동시에 토익 점수도 만들고 있었다. 화창한 가을 하늘 아래 패션쇼는 잘 끝났지만, 이후 취업 준비에 뛰어들고자 하니 내밀 수 있는 증명서는 딸랑 성적표와 졸업예정 증명서 밖에 없었다. 띠로리~


토익 점수가 없으니 서류조차 넣을 수 없는 곳이 너무 많았다. 이름이 꽤나 알려진 내셔널 브랜드 중 단 한 곳도 지원할 수 없었다. 서류를 넣지 못하니, 포폴이나 면접이 가능할 리 없었다. 이제라도 속성으로 영어 학원을 다녀서 토익 점수를 만들어야 하나 고민도 있었으나, 이듬해 여름 온 가족이 아버지 직장 배치를 따라 해외에서 함께 1년을 지낼 계획이 잡혀있던 터였다. (해외 살이라니. 평생 처음이었고 다시 올까 말까 한 그런 기회였다.) 하... 토익 보고, 지원하고, 면접보고, 교육받고, (졸업하고), 업무 배치받고, 수습 종료까지 최소 7개월은 소요될텐데, 출국까지 내가 가진 시간은 10개월 정도... 이건 뭐 입사하고서 바로 사직서를 써야 할 모양새였다.


토익 성적 하나 없이..
아주 그냥 막,

초스피드 취직준비

머천다이저 시켜주세요!


'그래!! 영어는 너무 싫지만, 해외에서 생활할 수 있는 이런 말도 안 되게 좋은 기회를 놓칠 순 없으니까. 졸업 전에 작은 회사라도 무조건 빨리 취직해서 사회의 쓴 맛을 바짝 보는 걸로...'


결정을 내리니 속도가 붙었다. 토익 점수를 요구하지 않으면서 머천다이저를 뽑는 회사들을 미친 듯이 찾기 시작했다. 듣도 보도 못한 브랜드 이름, 10명 미만 직원의 작은 회사들은 참-정말-수없이 많았다. 패션업계는 원래 그런 곳이었다. 영세한 수많은 업체들이 감성적이고 변덕스러운 상품을 가지고 피 튀기며 경쟁하는 살벌함이 있으며, 동시에 개개인이 적은 자본을 가지고도 비교적 쉽게 창업을 할 수 있는 기회가 존재하는 나름 낭만적인 곳이었다.  


대부분의 구직 공고에서 제시한 월급은 100만 원이 채 되지 않았다. 3개월 수습 기간 후에 인상되고 조정될거란 아주 짧고 간단한 메모가 있었을 뿐. 어쩌면 <88만 원 세대>는 20대를 꽤 오래도록 대표했던 단어였었고, 단지 2007년 우석훈·박권일의 저서를 통해 사회적으로 제대로 규정될 수 있었던 것은 아닐까. 월급이 좀 맘에 든다 치면, 죄다 경력자 모집이었다. 아니. 4년간의 대학생활이 이렇게나 푸대접받을 비루한 경험이었던가? 이 세상 젊은이들이 뭘 그리 잘못했길래 사회에 진입하는 것 자체가 이렇게나 어려운 것인가? 매일 구인 공고를 볼수록 악만 받쳤다. 당황스러웠다. 어디든 들어가면, 이를 악물고 버티고 살아남아서 무조건 경력자가 되어야겠구나 생각했다.  


TV와 잡지로 보았던 화려한 패션쇼의 디자이너들을 위해 일을 해볼까 싶다가도... 무급 혹은 교통비만 지급하는 정도의 보상으로 차마 나를 내어줄 수가 없었다. 애초에 디자이너가 되겠단 생각이 없었기에, 특정 디자이너 가까이에서 특별한 무언가를 배우고 싶은 애정, 열정, 절심함이 없었던 것이다. (아이러니하게도 뉴욕에서 더욱더 약자로 스스로를 인식한 나는 너무나 '어떤' 일이 하고 싶어 '열정 페이라도 괜찮으니 제발 일하게 해 주세요!!'라는 마음으로 어렵게 얻은 무급 인턴 기회를 엄청나게 고마워하게 된다는 사실 ;;; )



MD 지원 이력서 보고 연락드렸어요.

근데,

피팅 가능할까요?

사이즈는 55 되나요?


무엇보다 당황스러웠던 것은... 이력서를 확인한 후 전화를 해서는 당당하게 사이즈를 물어보는 몇몇 회사들이었다. 아니 내 이력서를 읽어보았담서. 상품 기획자 혹은 영업 뛰는 머천다이저 지원자에게 샘플 피팅을 요구하는 이 순수한 뇌는 무엇. 


딴딴한 뼈와 비장한 어깨, 중학생 때 이미 66 사이즈 인생이 결정된 나 같은 평범한 대한민국 아가씨는 어쩌란겁니꽈?! 당신들의 44나 55의 샘플을 만드는데 내 몸을 동원시킬 생각도 없고, 적합하지도 않다고요. 그런 건 디자인실에서 알아서 하시쥬. 아니 아니, 막내 디자이너도 그렇게는 제발 뽑지 말아요. 피팅 모델 좀 고용해요. 사장님들, 제~~~발 돈 좀 쓰세요. 막내 디자이너를 몸매 보고 뽑았다면 소정의 피팅모델비를 인센으로 추가 지급하란 말이죠!!! 라고 외치기엔... 영세한 수많은 개인 사업자들이 오버랩된다.


20년이 지난 지금 업계의 상황은 좀 달라졌으려나? 글쎄... 1년 전, 영세한 청바지 회사에서 디자이너를 구한다시며 44-55 사이즈 학생을 추천해달라 요청하였고, 때마침 체질적으로 마르고 날씬한 학생이 있어 소개를 해주었다. 취직이 절실한 학생들 앞에서 들어오는 구인 요청 조건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지적할 권한이 내게 있을리가 만무하다. 당시의 나는 학생이었고 구직자였고 따라서 선택과 결정은 나의 몫이었다. 지금의 나는 안내자이자 조언자로 존재하고 있으며, 선택과 결정은 학생들 개개인의 몫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회사가 요구하는대로 무리하게 다이어트를 하는 노력을 하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그렇게 무리하게 날씬한 몸매를 당당하게 요구하는 회사를 선택하지 말라고, 자신을 소중히 하라고 이야기하고 싶다. 









이전 11화 왜? 나는 의류학과를 선택했을까?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