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y 꽃형님
"요 아이템이 바로 이달의 MD 추천상품 입니다!!" / "저희 회사가 제안하는 MD구성은 이뤄엏~~~게나 고급지고 다양하답니다~" / "담당MD가 직접 현지 공장을 방문해서 제품 생산 공정 모두 꼼꼼하게 확인하고 왔습니다. 여러분, 부디! 알아주십시오!!"
MD, 이제는 일상적으로 너무나 흔하게 보고 들을 수 있는 용어. 업계 사람이 아니라 할지라도 대충 직업군이거나 상품구성을 뜻하겠거니 어림짐작할 수 있지 않을까. 패션업계에서 대중과 소통하기 위해 거침없이 사용하고 있는 이 단어는 전문적 professional 이거나 전문가 expert 라거나 기획자 planner 혹은 매니저 manager 같은 뜻으로 활용되고 있는 것 같다.
"MD가 뭐의 약자인줄 아니? 머천다이저? 아니야. 뭐든지(M) 다한다(D)의 약자야. 풉~"
술자리 과선배들의 우스갯소리로 이런 직업이 있구나 알게 되었다. 귓동냥으로 들은 얘기들을 종합해보면, 머천다이저라 불리는 직종은 줄여서 MD라고 하고, 트렌드 조사 분석, 상품 기획부터 유통, 마케팅까지 일련의 과정에 모두 개입하여 일을 할 수있는 엄청난 능력자임에 틀림없었다. 뭐든지 다하는 MD라는 직업은 어벤저스에 등장하는 초능력자들만큼 어마무시한 능력을 가진 것처럼, 당시 내게는 너무나도 매력적인 직업으로 느껴졌다. 한 가지를 온전히 제대로 하는 것에도 엄청난 시간과 노력과 인내가 필요하다는 것을 체득하기엔 포부와 열정만 그득했던 젊고 어린 시절이었다.
첫 직장...
다들 첫 직장을 어떻게 회상할까.
나름(!) 평등한 교우 관계가 핵심적인 학교를 떠나, 상하가 명확히 존재하는 성인들의 일터에 들어간다는 것, 이익에 기반한 협업과 견제가 번복을 거듭하고, 동료인듯 적인듯 함께 일을 꽤 잘 해내는 것, 불필요한 것들은 신속정확하게 가지치는 것 ... 신입에겐 이 모든 것이 처음이고 미숙하여 ... 극심한 성장통이 불가피하다는 것, 그래서 첫 직장은... 쩝... #할많하않 이겠다.
나의 첫 직장은 S백화점이 보유한 몇몇 PB 브랜드 중 하나였다. 당시 백화점이라 하면 슈퍼 갑의 위치였고, 자체 기획부터 디자인, 생산, 판매 일체를 힘들게시리 도맡아 진행할 위인은 못되었으며 (유통 채널로서 굳이 그럴 필요도 없었으며), 해외 백화점들처럼 바잉을 진행하지 않았기에 판매 부진으로 인한 재고를 떠안을 필요도 없었다. 수수료를 받다가, 기존 브랜드의 판매가 부진하면, 그 '자리'를 다른 새로운 브랜드로 교체하면 그만이었다. 엄~청 잘나갔다.
백화점 입장에서는... 여기저기 백화점들에 모두 입점되어 있고, 자사 플래그쉽까지 잘 갇춰둔 콧대 높은 브랜드들 외에도, 수익 모델의 다양화 및 고유(단독, 차별) 브랜드의 확보가 중요하다 판단했다. 채널과 플랫폼에 꽤 집중하는 최근 추세와 또다르게, 멋진 유통망을 이미 확보하고 있었기에 상품과 브랜드의 역량에서 얻는 차별화가 중요했다. 프로모션업체들은 기술과 상품력은 있으나 브랜드력이 아주 한참 부족했고, 백화점 PB라는 든든한 지지대에 올라서는 순간, 소비자의 관심과 신뢰를 (그 정도면) 충분히 확보할 수 있었다. 물론, 바이어에게 끊임없는 감시와 통제, 관리의 대상이 될지언정 (노련한 백화점이 어설픈 프로모션 업체와 협력업체 계약을 지속할리가 없다), 충분히 매력적인 거래였다.
그러나, 전공자임에도 유통망의 생태계와 거기에 서식하는 자들이 누구인지, 프로모션 업체가 무엇인지 잘 알지 못했던 나는 과연 매력적인 거래를 하였을까? (애초에 신입은 거래 참여 레벨이 아니었던가 싶기도...)
전국적 물량을 위한 상품 구색을 독자적으로 (모두 자회사 안에서) 진행한다는 것은 어떤 브랜드에게도 쉬운 일이 아니다. 기획도 필요하고, 스팟도 필요하고, 사입도 필요하고, 협력업체도 필요하고, 라이센스도 필요하고 ... 다양한 방법을 사용해보고 최적화를 추구하는 것이 중요하다. 회사 내의 팀웤도 중요하지만, 회사 밖 외부업체들과의 협업 관계 또한 든든한 지원군이 될 수 있다. 그래. 동대문도 매우 필요하고, 프로모션 업체도 필요하고, 우리에게 결코 코오롱, 한섬, 구찌, 프라다 만이 패션 기업은 아니지 않은가.
회사는 2호선 교대역에 위치했다. 당시, 목동 고모님댁에서 사촌 동생과 한 방을 쓰며 지내고 있었는데, 집을 출발해서 영등포구청역에서 2호선을 갈아타고 교대까지 이르는 출근길 자체가 생지옥이었다. 졸리고 피곤한 몸을 지하철에 꾸깃꾸깃 구겨넣고 정처없이 실려가서, 교대역에서 인파에 휩쓸려 몸뚱아리를 토해내고 나면, 아주 너덜너덜한 기분으로 아침 업무를 시작하게 되었다. (출근길은 중요하다... 차라리 더 더 일찍 출근해서 인파를 피했으면 아침의 활기찬 기운을 받진 않았을까 생각도 해본다...) 대학생의 프리한 스케쥴에 적응한 몸이 8-6 직장인의 스케쥴로 바뀌는데는 제법 시간이 걸렸다. 완연히 적응해서 주말에 늦잠도 못자는 직장인들 지못미.
분명히 나는 머천다이저로 취업을 했건만, 디자인실 실장님은 내가 의류학 전공자이기 때문에 디자인실 막내나 다름없다며 30분 일찍 출근해서 컵 설거지와 청소, 사무실 책상 닦기를 온화하게 요청했다. 텅 빈 사무실에 불을 켜고 지우개 가루 가득한 디자인실 책상을 닦다보면, 나는 누군가... 여긴 어딘가... 싶었다. 영업부 주임은, 엑셀도 모르는 신입이 한심하고, 눈치도 좀 없는 것 같아 귀챦긴 해도, 신입이 생겼다는 사실에 싱글벙글했다. 어리숙한 신입을 놀려먹는 재미도 쏠쏠한대다, 꼬봉(?)이 생겼으니 이제껏 귀챦았던 문서 작업들을 잔뜩 내게 맡겨두고 (드라마에서, 서류종이 산더미를 책상위에 털석 올려주는 그 장면이 정확하게 구현되었다), 본인은 본격적으로 현장을 누빌 수 있게 되었다. 내 포지션은 기획MD가 아닌 엄연히 영업MD이며, 영업점 발주, 재고 데이터 관리, 판매율 정리, 베스트 셀러, 워스트 셀러를 파악해야 한다 거듭 가르친다. 뭐. 죄다 맞는 말이다. 영업부 주임한테 훈육(?)을 받는다는게 좀 거시기할 뿐.
월요일 오전에는 무조건 회의가 있다. 사장님, 이사님, 실장님, 팀장님... 헤드들이 모여 진행하는 회의에 새파란 신입인 내가 어색하게 앉아있다. POS 연동이 없던 환경에서 (준비중이었다), 주말 매출 현황을 정리해서 보고하는 것은 나의 중요한 업무중 하나였다. 각 매장의 샵마들이 판매 상품의 바코드 스티커를 붙여 팩스로 보내주면, 깨알같이 작은 글씨의 제품번호를 읽고, 수량을 합하고 가격을 곱하여 판매율을 정리했다. 카리스마 넘치고 멋진 이사님은 너는 디자인팀 소속도 아니고 영업부 소속도 아니고 머천다이저이니, 본인께서 사업적인 결정을 내릴 수 있는 데이터를 만지는데 최선을 다하라 하셨다. 이사님과 일하는 것은 정말 즐거웠으나, 그 방을 나서면 다시 디자인실 막내 비스무리하면서 영업부 주임의 꼬봉으로 눈치를 보아가며 일했다. 높은 분의 신임은 달콤했지만, 내 바로 근처 윗선의 입김이 제일 중요하다는 걸 살벌하게 경험했다.
판매율 정리하다가, 회의 참석했다가, 디자인실 택 달아주다가, 샘플실 뛰어갔다가, 영업부 주임 요청으로 출고하고, 샵마 전화받고, 팩스 보내고, 창고 정리했다가, 퇴근길 매장 들러 업무 처리하고 귀가 ... 와우. 정말 뭐든지 다 시켜서 죽겠다 싶었다. 야근 후, 회사 앞에서 난생 처음 무교동 낙지를 먹었다. 소스라치게 매워서 혀와 입과 얼굴과 온몸이 따끔거리는데, 눈물과 콧물을 한참 쏟고 나면 그 날의 고된 일들이 놀랍게도 리셋되었다.
부족한 능력치를 몸으로 그리고 시간으로 때워서라도 제대로 서있기 위해 아둥바둥했다. 되려, 성장에만 집중한 나머지, 팀워크, 유머, 배려 같은 관계를 통한 문제 해결 스킬은 한참 모자란 시절이었다. 모든 부서에 소속되어 있었으나, 어떤 부서에도 소속되어 있지 않은 것만 같았다. 무능해도 좋으니, 다른 부서의 지시사항에 우산이 되어줄 팀이 있고 직속상사가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싶었다. 작은 프로모션 회사에서 머천다이저를 채용한 것 자체만으로 이사님은 깨어있는 분이셨다고 밖에. 그래도 작은 회사에서 경영진 회의에 꼬박꼬박 참석했기에, 디자인실 업무도 눈치껏 도와야 했기에, 영업부 꼬봉으로 구박받으며 전천후 서포트 했기에, 짧은 시간 토나올만틈 성장하는 시기가 되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