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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캡틴서 꽃형님 Feb 01. 2020

뉴욕 생활 6년의 시작

by 꽃형님

휘뚜루마뚜루 취업을 서둘러야 했던 이유는 바로... 가족대이동 to 뉴욕! 한국을 떠날 때는 대략 "가족과 함께 경험삼아 1년 지내다오자" 정도의 마음가짐이었으나, 왠걸?! 가족들이 모두 돌아가고도 혼자 남아 6년 가까이 살다가 귀국하게 되었다는. 국내 생활을 정리하고 해외에 적응하기 위해 (남들도 다 하지만) 나름 고군분투했던 기억들을 번외편으로 풀어보고자 합니다.




New York City


회사에 퇴사를 알리고 나면? 완전 바빠지는 것이 일반적이다. 맡은 업무를 진행하면서 동시에 인수인계까지 해야하기 때문. 마음은 이미 멀리 떠났지만, 퇴사 당일 퇴근 시간까지 해내야할 일이 있는 곳이 회사니까. 나 하나 없어져도 조직은 잘 굴러갈테지만, 그 동안 함께 일했던 동료들에게 짐이 되지 않도록 가능한 정리를 해주는 것이 헤어짐의 예의라 생각했다. 한편, 일하면서 ESL을 직접 컨택할 시간이 도무지 나지 않아 어학연수 중개업체를 찾았다. 외국어에 크게 재능도 흥미도 없었지만, 사설학원은 교육의 퀄리티와 수강료가 천차만별일테니 대학 부설 ESL을 가야겠다 생각했고, 이왕이면 맨하튼에 위치하면서 치안과 교통이 적당히 좋은 곳이라 소소하게라도 주위 구경을 다닐 수 있었으면 했다.


JFK 공항에 도착하자 산이 없어 끝없이 뻗어있는 휑한 지평선이 생경하였다. 사회보장번호도 없고 신용도 없는 외국인이었지만, 미국 사시는 아버지 친구분 도움을 받아 제법 미국식 동네의 주택을 렌트할 수 있었다. 세간살이가 없어 일주일 정도는 거실 바닥에 신문지를 여러 장 깔아놓고 넷이 옹기종기 앉아 식사를 했다. 몇 일 후, 부모님들끼리 시내에 나가셨다가 한국인이 운영하는 매장에서 가구 몇 가지를 비싸게 사오셨다. 갓 미국에 도착한 동포를 도와주기는 커녕, 세상물정 모른다 생각하고 야무지게 폭리를 취한 그들이 참 괘씸했다. 온갖 인종이 섞여 사는 이 곳에서 한국인이든 미국인이든 그 누구든간에 적절히 경계하며 지낼 일이었다.


JFK 뷰


매일같이 아버지는 직장으로, 나와 동생은 각각 ESL 수업을 들으러 외출했다. 외딴 나라에서 갑자기 주부가 된 엄마의 보살핌 덕분에 온 가족이 따스한 밥을 잘 챙겨먹으며 생활할 수 있었다. 도착한 지 얼마되지 않아 9/11이 터졌다. 수업을 마치고 귀가중에 지하철이 갑자기 운행을 멈춰 사람들과 걷고 어찌어찌 버스를 타서 고생스럽게 집에 도착한 후에야 사고 소식을 접했다. 심지어 남동생이 WTC 근처에서 수업을 들어 가족들 모두 크게 걱정했지만, 늦게나마 집으로 귀가했으니 다행이었다. 한동안 지하철과 관공서, 학교 등 모든 공공장소에서는 보안검색이 강화되었고, 애도와 동시에... 이민자에 대한 살벌한 사회 분위기를 체감할 수 있었다. 


프리패스 지하철카드와 함께, 일주일 10달러 정도의 용돈이 주어졌다. 1달러 10개를 접고 접어서 하루 2~3달러씩 매우 작은 동전 지갑에 넣어다녔다. 외출때마다 영화에서나 볼 법한 소매치기나 범죄가 상상되어 긴장되고 무서웠다. 사람 사는 세상이 다 거기서 거기인데, 다민족과 섞여 거리를 걷고 지하철을 타는 것엔 약간의 적응 기간이 필요했다. 학교 벤딩머신에서 50센트 짜리 스낵을 즐기는 수준으로 소소하게 생활했고, 귀가길 재미삼아 달러스토어를 기웃거렸다. 학교에 설명회라도 있으면 꼭 참석해서 영어도 듣고 커피 한 잔과 베이글, 운 좋으면 피자 한 조각까지 얻어먹었다. 


영어 배운답시고

한국 친구와는 어울리지 않고

일본 친구랑만 어울리는

얌생이


ESL 테스트는 겨우 3급이었다. 문법이 부족하지만 말 잘하는 유럽인들과 문법이 뛰어나지만 말 안되는 동양인들이 섞여 수업을 받았다. 한국인이라는 공통점으로 어학연수생들과 대화를 나누긴 했으나, 방과 후 곳곳을 다니며 경험을 쌓는 그들과, 카페테리아에서 엄마의 도시락을 먹고 도서관으로 이동해 토플 공부를 하고 어둡기 전 집에 들어갔던 나는 친해질 수 없었다. 오히려 직장을 다니며 돈을 모아 자비로 어학연수를 온 일본 여학생들과 씀씀이가 비슷했기에 (극도로 절약했기에) 꽤 친해졌다. 느린 엉터리 영어라도 이들과 도시락을 함께 먹으며 매일 대화하다보니 영어가 조금씩 늘었다. 가벼운 주머니 사정으로 어찌 그리 되었을텐데, 영어 배우느라 한국 친구는 안만들고 일본 친구만 많은 얌체가 되어 있었다. 


어느 날엔 뜬금없이 뉴저지 플러싱에 위치한 빵집 고려당(현재, 뚜레주르)에서 캐쉬잡 아르바이트도 구했다. 처음엔 영어를 잘 못해서 홀 정리와 빵 포장 같은 잡다한 일을 도왔는데, 곧잘 영어도 하고 열심히 일했더니 대뜸 캐쉬어를 맡겨주셨다. 외국인들도 많이 방문하던 빵집이었기에, 친절하게 말을 건네고 빠르게 계산을 하고 돈을 주고 받으며 또 영어가 느는 계기가 되었다. 당일 만든 고로케와 팥빵들은 모두 처분했기에, 클로징 후 남은 빵은 직원들이 챙겨갔다. 빵을 싸들고 집에 가면 부모님은 적절하게 소분해서 냉동하고, 아침과 간식으로 챙겨 드셨다. 공부만 하던 딸래미가 빵가게에서 알바하며 매일 밤 빵을 싸가져오는 것이 웃음나고 신기했을지도 모르겠다. 


아기가 걸음마를 배우듯 

매일 조금씩

2천 번 쯤 시도한다면

영어, 누구나 할 수 있어요! (=_=네네..)


하루 하루, 적응은 하고 있었으나... 영어가 쉬이 늘지 않았다. 대학 부설의 장점은 저렴한 학비에도 공인된 실력의 ESL 선생님들을 만날 수 있단거였다. 4급반에서 만난 선생님 제임스는 친절하고 겸손하고 유머러스했다. 언어는 무엇보다 '매일 조금씩 하는 힘'으로 성장하는 것이고, 욕심내지 말고 아기가 걸음마를 배우듯 꾸준히 지속할 것을 강조했다. 펭귄 북스의 로사 파크를 읽으며 인권과 역사 이야기를 했고, 스토리 속에서 단어를 익혔고, 매 챕터마다 에세이를 써서 제출했다. 


하... 그 놈의 에세이...


대학 부설의 단점은 작문을 강조한다는 점이다. 대학 공부를 따라갈 수 있게 만들어야 하니 더더욱. 4급반에서 만난 또 다른 선생님 데비는 단호하고 카리스마가 넘쳤다. 밤 12시가 넘도록 끙끙대며 작문 숙제를 해가면, 노트 매 페이지마다 긴 빨간 줄을 시원하게 좍- 좍- 좍좍좍- 그어 돌려주어 속이 아주 뒤집어졌다. 나와 대부분의 아시아 학생들의 에세이는 too general 하니, 제발 좀 be specific 하게 써보란다. 데비 때문에 악에 받쳐 지내던 어느 날 밤, 영어로 잠꼬대를 줄줄줄 하던 딸을 보고 부모님은 깔깔대고 웃으셨다고... 


머나만 타국에서 새벽까지 영어 작문 과제라니


리스닝과 스피킹이 필요했는데, 에세이 숙제만 산더미같이 내줬다. 어차피 너희는 외국인이고, (바이링궐, 멀티링궐이 아닌 이상) 네이티브만큼의 표현을 할 수 없고, 이후 학교든 직장이든 글을 독해하고 작성하는 것이 주로 요구될텐데, 후자가 가능해야 한단다. 작문을 하려면 문법과 단어를 찾아야하고, 작문이 쉬워진다면 머릿속에 문장을 그리기 쉬우니 스피킹은 저절로 따라온단거. 정말 지겹도록 들었는데, 이후 일상에서 당장 선생님들의 말을 실감할 수 있었다. 단 1장만으로도 단어, 문법, 문체, 취향, 그리고 문제 의식까지 담길 수 있는 것이 글이었다. 그리고... 영어권에 거주하지 않는 지금까지도 내게 가장 요구되는 것은 독해와 함께 이메일 작성, 스크립트 작성, 리서치 페이퍼 작성 이니까... 


생존 영어! 

먹고 살기 위해

낙오되지 않기 위해

외로움을 극복하기 위해


언어가 해외 생활의 가장 큰 벽이 아닐까. 아시안 20대 여성이라는 최약체로서 살아남고자 영어가 필요했다. 공부를 통해서 영어를 배우는 것이 다는 아니었지만, 많은 기본기를 쌓을 수 있었다. 이후, 영화로, 독서로, 음악으로... 친구와 동료와 상사와 일상에서 부딪치는 모든 이방인들과 대화하다 보니... 여러 자극들이 모여져 전체 언어 능력치가 서서히 더디게 상승했던 것 같다. 흥미없고 자신없는 무엇인가를 매일 조금씩 해내서 온전한 내 것으로 만들어 본 경험은 매우 특별하고 소중해서, 나같은 평범한 보통 사람도 조금씩 꾸준히 하면 무엇이든 할 수 있다는 초긍정 마인드를 단단하게 심어주었다.  


놀러 가는 외쿡살러 가는 외쿡은 단언컨대 완전하게 다른 두 나라라고 장담하련다. 비자에 근거하여 제한적으로 움직이는 이방인으로서, 해당 국가에 낸 세금은 한 푼도 없으면서, 언어도 잘 통하지 않는 판에, 먹고 살 방도를 마련한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니까. 새로운 낯선 환경에서 이방인으로 마주하는 일상, 어느 하나 예측대로 되지 않고 예측할 수도 없었던 매일 매순간 속에서, 소름끼치게 감각을 곤두세워 치열하게 배우고 일하고 살아내느라... 아둥바둥했던 이삼십대. 그렇게 체득한 감각들이 켜켜이 쌓여 현재의 나를 구성하게 되었다는 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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