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y 꽃형님
쇼퍼홀릭, 이브생로랑, 셉템버이슈, 마드모아젤C, 노라노, 상의원, 코코샤넬 등 패션/의류 산업의 일면을 구경할 수 있는 다양한 패션 영화가 있지만, 대중들에게 가장 강렬한 인상을 남겼던 건 뭐니 뭐니 해도 2006년에 개봉했던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가 아닐까.
카리스마 넘치는 패션 매거진 편집장 미란다 역할을 맡은 메릴 스트립과 평범한 저널리스트를 꿈꾸는 직원 앤드리아 역할을 맡은 앤 해서웨이의 쫄깃한 케미가 참 좋았었지. 악마? 같은 보스의 행패에 굴하지 않던 여주인공의 패셔너블한 변신이 영화적 판타지를 자극하기도 했고, 보스의 달콤한 제안을 단호하게 뿌리쳤을 때는 묘한 희열도 짜르르...
아. 그래서... 미란다가 프라다를 입는 거야? 아니면, 앤드리아가 입는 거야? 왜 입는 거야? 입었다는 거야? 영화에 그런 내용 없던데... 제목 왜 이래?
패션 매거진 편집장이었던 미란다는 업무상 수많은 디자이너와 하이패션 브랜드의 최신 유행 제품에 해박할 수밖에 없었을 테다. 매일 보고 듣는 것 이상으로, 자신의 사회적 위치를 나타내려는 과시적 소비를 넘어서서, 제품의 차별적 감성을 꼭 몸소 체험해봐야 직성이 풀렸을 거란 의견에 한 표!
스타일리스트가 다양한 패션을 구경하고 입어보아야 스타일링에 도움이 되는 것처럼? 뷰티 에디터가 수많은 화장품들을 테스트해봐야 기사가 디테일하게 잘 빠지는 것처럼?
숨이 턱까지 차오를 만큼 많은 업무량을 지독하게 해내고야 마는 패션 업계의 악마들. 단지 먹고사는 일 이상으로 자신이 몸담고 있는 브랜드를 애정할 수밖에 없지 않은가. (아! 럭셔리 브랜드와 자신을 동일시하는 크나큰 착각에 빠진 자들은 경계하자~) 또는, 치열하게 일하고서, 패션 제품이 아니더라도, 멋진 명품을 나 자신에게 선물하는 것은 얼마나 큰 행복인가. 드라마 '멜로가 체질'에 등장하는 인기 작가 정혜정 씨의 은밀한 가방 수집 취미를 보면서... 과소비를 넘어서서 치열하게 살아온 삶의 궤적일 수도 있지 않은가 반문하고 싶다.
세상 비싼 취미들(오디오 컬렉터, 얼리 어답터, 자동차 애호가 등)을 두고 어째서 프라다 든 악마 여성들에게 그렇게 관심이 많은 건지.
뉴욕에서의 보테가 베네타 인턴 시절, 나의 코리안 아메리칸 보스 Y도 그랬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보테가 베네타의 제품을 애용했고, 화장품부터 핸드폰, 서류까지 뭐든 쓸어 담을 수 있는 대형 사이즈의 위빙 쇼퍼백을 즐겨 사용했다. 하루는 코리아 타운 분식집에서 지인과 식사하는 보스와 우연히 마주쳤는데, 7천 불짜리 브라운/블랙 크로커다일 스킨 가방을 옆자리에 턱 팽개쳐놓고서 떡볶이를 먹고 있는 그녀의 모습이 묘하게 안 어울려서 웃음이 났다. 이듬해 캐롤리나 헤레라로 회사를 옮긴 그녀는 다시 새로운 회사의 제품을 열렬히 애용했다는 거~
FIT에서 만났던 친구 M의 소개로 구찌 그룹의 보테가 베네타 PR 인턴을 시작할 수 있었다. 패션계는 공채로도 채용을 하지만, 소개로 일을 얻는 경우가 많아서 사교적인 관계들이 꽤 중요하다.
뉴욕 맨해튼 5th Avenue로 출근한다는 사실만으로도 완전 두근거렸다. 1층과 2층은 매장, 3층은 쇼룸과 사무실이 위치했고, 4층은 마네킹과 집기 보관용 창고, 지하 1층은 상품들이 적재되어 매장에서 사용하고 있었다. 3층 사무실에는 패션머천다이징, 패션리테일링, 그리고 패션PR&커뮤니케이션 부서의 4명의 매니저가 전부였고 , 7-8명의 인턴들이 주 2-3회 출근하여 업무를 보조하고 있었다.
* 해외 지사는 매출 접점인 매장에 집중하며, 오피스는 고효율을 내는 최소의 인원으로 운영된다.
PR 인턴들에게 주어진 일 중 하나는 쇼룸을 정리 정돈하는 일이었다. 어느 누가 불시에 방문하더라도 최상의 상태를 보여주는 것이 중요했다. 럭셔리는 이미지가 전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모든 옷걸이의 간격은 정확하게 일치하도록, 폴딩 상품은 조금이라도 흐트러지지 않도록, 가방과 클러치는 제 위치에서 각을 잡고 예쁨을 뽐내도록 매일같이 매무새를 만져준다. 특히, 오뜨 꾸뛰르 의류의 정교하고 섬세한 바느질을 직접 만져보고 감탄하였는데, 기계 박음질이 구현하지 못하는 자연스러움과 유연함이 느껴졌다. 이런 게 옷이었던거구나...
쇼룸에는 작은 창고가 있었는데, 잡화류를 주로 보관했다. 핸드백이라면 스터핑을 가득 넣어 형태가 망가지지 않도록 하고, 외부 스크래치로부터 보호할 수 있도록 스웨이드 더스트 백에 넣어 선반에 보관했다. 폴라로이드 카메라로 상품의 사진을 그때그때 찍어 더스트 백에 부착했고, 폴라로이드 사진 아래 공간에 시즌과 품번을 적어 꺼내보지 않더라도 어떤 상품이 보관되고 있는지 한눈에 알 수 있게 관리했다.
쇼룸 관리는 항상 지켜져야 하는 원칙 같은 일이었고, 주요 업무는 보스의 매체 커뮤니케이션 업무를 다방면으로 지원하는 일이었다. 매거진 촬영을 위한 의류와 잡화의 인 앤 아웃과 인보이스 정리가 인턴 업무의 핵심이었다. 상품이 손상되지 않도록 이중 삼중으로 정성스레 포장한 후 협력업체 딜리버리 서비스에 연락한다. 우리나라의 퀵 같은 서비스가 존재하는데, 도보로 또는 지하철(한 달 무한정 사용할 수 있는 메트로카드)로 맨해튼 가까운 거리에서 빠르게 물품을 전달해준다.
1층 매장의 가드가 전화로 딜리버리 가이(주로 아프리칸 아메리칸)의 도착을 알려주면, 로비에 내려가 상품을 전달하고 인보이스를 주고받는다. 매거진 촬영이 끝난 상품 또한 그렇게 돌려받는데, 어느 날엔 5,000불을 호가하는 이브닝드레스에 스테이플을 마구 박아 돌려준 끔찍한 사고가 발생하기도 했다. 손상을 입은 부위를 모조리 촬영해서 기록으로 남기고, 해당 매거진에 컴플레인과 함께 손해보상 청구를 하는 방식으로 해결되었다. 아무리 촬영이 중하더라도 어떻게 실크 드레스에 구멍을 뚫을 생각을 하는지. 참...
이렇게 촬영된 상품들은 짧게는 1-2주, 길게는 2-3달 후 신문과 잡지에 노출된다. 광고 페이지, 협찬이 아니었음에도 해당 상품을 노출시켜준 셀럽 사진, 기획 기사 등을 포함하여 상품이 등장하는 모든 페이지를 스크랩(자르고, 화살표 포스트잇을 붙이고, 컬러 카피를 만들어 보관)하는 것은 추후 PR의 업무 평가와 직결되었다. 덕분에, 뉴욕에서 발행되는 모든 패션 잡지와 신문을 실시간으로 구경할 수 있었던 건 꽤 즐거웠다.
니콜 키드먼의 스타일리스트에게 시상식에 들고 갈 클러치를 협찬한 후 해당 사진이 수많은 매체에 노출되어 우리끼리 자축도 했다. 셀럽 협찬은 길게는 1~2달까지 빌려주어야 하기에 3~7일 안에 돌려받을 수 있는 일반 잡지보다 시간적 손해를 볼 수 있는 점에서 보스의 전략적 판단이 필요했다. 우리 브랜드와 해당 셀럽이 어울리는가? 빌려준다면 어떤 장소에서 스포트라이트를 받을 예정인가? 대여 기간은 언제인가? 등을 상세하게 협의해야 했다.
그 외에도, 시즌이 끝난 홍보용 상품의 샘플세일을 진행했고 (이때 평소에 우리 브랜드에 호의적이었던 에디터를 우선적으로 초대하는 건 당연), 엑셀로 재고를 관리했고, 뉴 시즌 카달로그가 나오자마자 뉴욕의 모든 매체사에 발송하는 등 그때그때 필요한 일들을 했다.
보스는 2살 때 가족과 함께 미국으로 이민 온 코리안 아메리칸 여성이었다. 한국어로 대화가 불가능했고, 한국인이라고 특별히 반가울 공유점이 1도 없었다. 유치원부터 줄곧 맨해튼의 사립학교를 다닌 전형적인 엘리트 뉴요커였고, 말이 어찌나 빠른지 좀처럼 알아들을 수가 없어 바짝 긴장해서 눈치껏 일해야 했다. 타주 시골 출신인 백인 인턴 친구의 느리고 자상한 말투와는 정말인지 차원이 다른 빠름과 냉랭함이 있었다.
하루는 뉴욕 매장에서 광고 촬영 일정이 잡혔고, 나를 붙들고 1분 동안 대여섯 가지 일을 다다다다다 지시했는데 정말 하나를 못 알아들었다는 거. "내가 너한테 뭘 해달라 했는지 다시 나에게 설명해봐" 라며 체크하는 통에 정말 진땀을 다 뺐다.
절반 이상을 못 알아들었고... 다시 설명을 듣긴 했지만... 기분이 그리 좋지는 않았다. 애초에 '당신이 보스이고, 나는 무급 인턴 나부랭이지만, 외국인에게 일을 시키려면 이보다 잘 설명해야 했어'라고 지금까지도 생각하고 있다. 그럼에도 내게 맡겨진 일이니까 최선을 다하고 싶었다.
촌각을 다투는 일이었고, 엘리베이터는 촬영으로 인해 통제되어 계단을 날아 내려갔다. 힐을 벗어 손에 들고, 맨발로 5th Ave. 를 내달렸다. 급한 수선을 맡기고, 모델들이 신을 검정 스타킹을 사고 (한국처럼 편의점이 골목마다 발견될 리가 없다), 여타 심부름을 끝내고, 다시 수선을 찾아 쏜살같이 오피스로 돌아왔다. 아픔이나 부끄러움을 느낄 새도 없었던 하루였다.
하루는 보스가 뉴욕포스트 페이지식스에 상품이 등장했다며 빨리 찾아서 보여달라는 지시가 떨어졌다. 6쪽을 펼쳤으나 패션 상품이라고는 등장하지 않아 적잖이 당황했다. 그 날, 페이지식스는 6쪽이 아닌 뉴욕포스트의 연예섹션을 일컫는 제목이라는 걸 알게 되었다.
죄다 이런 식이었다. 모국이 아닌 나라의 사회 문화적 코드를 알고, 함께 일하며 살아남기 위해서는 매일 몇 곱절의 노력이 필요했다. 나도 나대로 정신없는 시기였지만, 그 작은 오피스에서 모든 커뮤니케이션을 진행하는 단 한 명의 매니저였던 보스 또한 종일 전화와 이메일에 시달리며 눈코 뜰 새 없이 치열하게 일했던 사람이었다.
지독하게 일하는 패션업계의 하드워커들을 세상이 쉬이 악마라고 부르던가 말던가. 그 악마가 프라다를 입든 유니클로를 입던 무슨 상관인가. 우리가 즐겁다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