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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캡틴서 꽃형님 Oct 04. 2019

왜? 나는 의류학과를 선택했을까?

by 꽃형님

중학교 가정 시간 손바느질 주름 스커트 과제 하나 제대로 해내지 못해 엄마 찬스로 겨우 제출했던 기억. 생일 선물로 야심차게 기획했던 뜨개 목도리는 반복 작업의 지겨움을 견디지 못하고 손수건만큼 뜨다 때려치웠던 기억 또 하나. 옷감과 실과 바늘과 친하지 않았던 스스로를 잘 몰랐기에 객관화하지 못했고, 수능 성적에 끼워 맞춘 선택지 중에서, 그저 미술을 좋아하고 곧잘 하니까 디자인 관련 일을 하면 될 것 같아서, 혹은 패션이 쿨해보여서, 인생의 큰 결정을 그렇게 시원하게 뚝딱 내렸더랬다.





모든 의류학 전공자가

디자이너가 되는 것은 아니다.

모든 의류학 전공자가

여성복에서 일할 수는 없다. 제발!!


의류학과 입학 후, 신입생 오리엔테이션. 짤막한 자기소개 시간에서 나를 포함한 70여 명의 여대생들은 하나같이 패션 디자이너를 꿈꿨고, 특히나 모두들 여성복 디자이너가 되고 싶어 했다. 어쩜 그랬는지.


본격적인 전공 공부가 시작되었던 2학년 1학기 의복구성 I 시간, 종이 패턴에 도무지 매력을 느낄 수가 없었다. 여름 방학, 늦게라도 꼭 제출은 하겠다며 패턴 과제와 씨름을 했고, 제때 집에도 못 가고 꾸역꾸역 겨우겨우 마무리를 했었다.


2학기 의복구성 II 시간에는 그나마 주어진 주제 안에서 약간의 창작을 할 수 있는 자유가 주어졌다. 가정용 재봉틀 바늘을 몇 번이나 부러뜨려가며 야심 차게 만들어간 청바지는 시접 위를 한 번 더 눌러 박은 디자인으로 혹평을 들었다. 내 딴엔 스티치가 도드라진 것이 예뻐서 의도한 것이었는데... 기말 과제로는, 당시 유행했던 토끼털로 따스한 조끼를 만들고 팔 움직임이 편하도록 니트 소매를 만들어 붙였는데, 도무지 황당 요상한 작품이란 지적과 함께 형편없는 점수를 받았다. 바디 위에 천을 늘어뜨려 패턴을 잡아가는 입체재단은 평면 재단과 달리 흥미로왔으나, 실크핀으로 온죙일 주름잡아 만드는 천편일률적인 시상식 드레스 과제는 고리타분하기 그지없었다.


몇 년 후, 뉴욕에서 디젤과 트루 릴리전 청바지의 스티치를 보고 내가 지적을 받아야 했던 한국 교육의 한계점에 대해 생각해봤다. 입체재단부터 배운다는 해외 의복구성 교육에 대해서도 익히 들었다. 그건 그거고, 결국 스무 살의 나는 기발한 아이디어는 넘쳤으나 의상 제작의 기본기를 공들여 쌓을 애정, 정성, 집요함, 노력이 없었던 거다. 그뿐이다. 인생에서 무엇인가 이루기 위해서 얼만큼 많은 피, 땀, 눈물이 필요한지 모르는 철부지였다.


"에잇! 안 맞아! 세상 재미없어!!"

"이렇게 힘들여 옷을 만들어 입을 바에, 다른 일로 돈을 벌고 옷을 사 입는 게 백번 천번 낫겠어."


의복에 대해 집요하게 고민하고, 정성 들여 디자인을 창조하고, 고생해서 상품화하는 많은 디자이너들과 머천다이저들에게는 참 죄송한 말이지만, 당시 스물한 살의 나는 이런 생각을 했었었다. 다행히!! 의류학과에서는 옷만 만드는 것은 아니었다. 동양과 서양의 복식사도 연구하고, 연구실에서 소재 스와치를 알콜 램프로 태워가며 실험도 하고, 미니 배틀을 사용해서 직조와 위빙 실습도 하고, 염색을 해서 스카프도 만들고, 연필, 색연필, 마카를 들고 다니며 일러스트도 그리고, 컴퓨터 디자인(CAD)도 사용하고, 그리고 마케팅도 배웠다. 와아!!!


졸업 후, 절반 정도의 인원이 전공을 살려 취직했다. 그중 다시 절반이 여성복, 남성복, 아동복, 가죽, 니트 등 다양한 카테고리에서 디자이너로 취직했고, 나머지는 MD, MR, VMD, PR, 세일즈 등 마켓 쪽에서 일을 얻거나, 자영업을 시작하거나, 대학원에 진학했다. 그럼, 절반 이상의 동기들은 어디로 갔을까. 전과를 하거나, 편입을 하거나, 자퇴를 하거나, 패션이 아닌 곳에서 자신만의 일을 시작해 사회 경력을 쌓아나갔다. 그래도 충분히 괜찮다!! 


그럼에도 의류 전공자라면, 여성복을 바라보라. (본인의 성별과 동일한 카테고리를 애정하는 것은 당연하다). 그러나 여성복만 바라보지는 말자. 디자이너를 꿈꿔라. 그러나 디자이너만 꿈꾸지는 말자. 인생의 다양한 기회와 경험에 마음을 활짝 열어두자...




우리는

의류학 전공을 선택한 당신에게

어떤 성공도 보장할 수 없으니 지금이라도

몇 번이고 다시 생각하라.


2003년, 뉴욕 FIT와 Parsons에서 합격 통지를 받았다. (뉴욕 생활에 대한 이야기는 이후에 자세히 소개할 예정이다). 외국 생활을 시작한 지 갓 6개월, 아무개도 아니었던 이방인으로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성실하게 적극적으로 어디든 무엇이든 참여하는 것이었다. 해서, FIT 입학 설명서 초대장을 보고 찾아갔더니 이게 웬일. 동양인 어른(?)은 나뿐이고, 대부분이 졸업을 앞두고 있던 고등학생들과 이들의 부모님들이 강당에 한 가득이었다... 하하.


짧게 인사를 건넨 어드미션 담당자는 매우 진지한 얼굴로...


"오늘 집에 돌아가서, 패션 전공에 대한 자신의 선택 또는 자녀의 선택에 대하여 몇 번이고 다시 생각하세요. 패션 업계에서 일하는 것은 여러분이 예상하는 것과 많이 아주 많이 다를 것입니다. 패션쇼처럼 화려하고 멋진 장면은 순간에 불과하고, 99%의 어렵고 복잡하고 지루한 업무들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패션을 공부한다고 누구나 칼 라거펠트, 도나 카란과 같은 세계적인 디자이너가 될 수 없어요. 여러분의 성공에 1년이 소요될지, 10년이 소요될지, 혹은 평생 이루지 못할지, 보장할 수 없습니다. 그러니, 다시 생각하세요."


와우... 학교 측이 이런 메시지를 마구 투척하는 상황이, 여기 학생들에겐 익숙했었을지 알 수는 없으나, 적어도 나는 적잖이 문화 충격을 받았다. 아무도 이런 얘기를 대놓고 한 적이 없잖아?! 한국에서 대학을 졸업 후, 패션 MD로 사회생활의 맛을 아주 조금 본 뒤였고, 미국이라고 딱히 다를 바 없을 (예상되는) 패션계의 실상, 현실을 직시할 수 있게 도와주는 입학 설명회는 좀 난감했다. 기본적인 언어조차 버벅거리는 젊은 아시아 여자 이방인 사람으로서... 이 곳 미국에서 일하는 것은 머나먼 우주의 목표처럼 느껴졌다.


설명회의 끝무렵이 되어서야, 담당자는 학교 소개를 짤막하게 추가했다.


"우리 학교는 여러분을 전문가로 인정해 줄 어떠한 자격증도 제공하고 있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 학교는 여러분이 패션계에서 일하기 위해 필수적으로 갖추어야 할 능력을 키우기 위한 세분화된 강의 커리큘럼과 실무 경력의 강사진과 패션회사 인턴쉽 프로그램을 제공하고 있습니다. 물론, 이를 활용해 성장하는 것은 여러분의 몫입니다."



훗. 그래서? 겁먹고 쫄았는가? 딱히.. 매우 선명한 그 날, 그 장소의 기억에도 불구하고, 이 날의 감정이 이후의 삶을 지배하지는 못했다. 이후 나의 직업 여정은 즐겁고 두근거리고 화려하고 다사다난했다. 다양하게 배우고 성장할 일 투성이었고, 그때그때의 작은 성취를 얻으며 단단해졌다. 반면, 경제적으로 언제나 쪼들렸기에 스스로를 사회적으로 어중간한 위치에 머무르게 했고, 불안정을 극복하고자 끊임없이 배우고 도전하고 노력해야 했다. 그리고 어느 날, 불안정은 인생의 디폴트 상태라는 결론을 내고서 일상을 즐기게 되었다고나 할까.


돌이켜보건대, 변화 없는 일을 선택했었다면 지루함에 치를 떨다 뛰쳐나왔을 테고, 일찍이 경제적으로 풍족했다면 끝도 없이 게으름을 부렸을게 뻔한 스스로를 이제는 잘 알겠다. 그래. 성격대로, 기질대로, 환경 속에서, 다양한 사람들 속에서, 다사다난한 일상의 사건들을 겪으면서, 여기까지 이르렀던 거다.


패션업계는 매력적이다. 중학교 가정 시간에 주름 스커트를 만드는 일 외에, 너무나 즐겁고 신나고 두근거리는, 짜릿하다 못해 찌릿찌릿하고 멋진 순간들이 꽤 많다. 그러나 결코 쉽지 않은 길이다. 박봉에 놀라고, 업무량에 놀라고, 속도에 놀라고, 야근에 놀라고... 놀랄 일 투성이다. 중요한 것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길을 조금이라도 걸어보고 싶은지 자신을 잘 들여다보는 게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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