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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cherry Mar 07. 2020

'넥스트 인 패션'을 보며 느낀 것들

읽다보면 제대로 스포당할 수 있음을 미리 경고함

나는 리얼리티 프로그램을 좋아한다. 리얼리티 프로그램의 종류는 다양하지만 그중에서 특히 한 분야의 전문가들이 나와 매 회마다 주어진 주제 혹은 미션을 수행하며 경쟁하는 과정을 보는 것을 좋아한다. 항상 누군가는 탈락하고, 누군가는 통과하여 결국 최후의 1인만 남게되는 진행방식이 좀 잔인하다고 느껴질 때도 있고, 내가 지지하던 사람이 탈락될때의 쓴맛도 있지만, 서로 다른 배경을 가진 사람들이 저마다의 스토리와 개성을 결과물에 녹여내는 과정을 보는 것이 정말 흥미롭다. 그리고 그들이 만들어 내는 결과물은 결국 그 ‘스토리’에서 많은 영감을 얻고 있음을 보게 된다.


최근에 흥미롭게 본 프로그램을 하나 소개해 보려고 한다. 2020년 1월에 방영한, 아주 따끈따끈한 컨텐츠다.

각 화마다 정해진 주제에 맞는 의상을 입고 나와 재미있게 진행하는 두 사람의 재치가 돋보인다


패션에 관심이 있지만 재봉틀 한번 만져본 적 없는 나는 이번 기회에 패션에 대한 간단한 지식이라도 쌓아보자 하는 생각에 1화를 시청하게 되었고.. 그렇다. 최종화까지 아주 알차게 정주행 해버리게 만든 무서운 프로그램이다.


그래픽 디자인을 하고 지금 UX디자이너라는 직무에 있지만, 그 분야가 그래픽이든 패션이든 인테리어든간에 '디자이너'라는 직업 자체는 분야에 상관없이 늘 흥미를 가지게 만든다. 오히려 내가 잘 모르는 패션이나 인테리어 쪽 디자이너들은 어떻게 아이디어를 짜고 구현해내는지 궁금하고, 이렇게나마 간접적으로 경험해보는 것을 좋아해서, 때로는 공감하기도, 때로는 미처 생각하지 못한 것에 고개를 끄덕이며 현재 나의 디자인 사고와 방식도 제고하는 기회가 되었다. 처음에 생각했던 것보다 정말 많은 것들을 내게 안겨 준 프로그램이다.


처음엔 18명의 디자이너들이 참가하여 2인 1팀으로 매 화마다 지정된 미션을 수행한다. 최후의 8인이 정해진 뒤로부터는 팀이 아닌 개인 미션으로 변경된다. '레드카펫에 어울릴만한 의상', '수트', '스트리트웨어', '언더웨어' 등등의 각 화의 미션을 수행하며 한 팀씩 탈락된다. 우승자는 여느 서바이벌 프로그램이 그렇든 '오직 한 명'. 


각 화마다 보고 느낀것이 너무나 많아 여기에 일일이 적기는 어렵지만, 그래도 가장 머릿속에 오래 남았던 몇 가지를 정리해봤다.



1. 결국은, '본질'. 클라이언트가 가장 원하는 것이 무엇인가.


매번 탈락자와 우승자를 가려내는 기준으로 심사위원들이 논의했던 요소는 크게 3가지로 정리해볼 수 있었다. 

Perfection(완성도)

Originality(디자이너의 개성 혹은 독창성)

그리고 이 쇼의 제목인 Next in Fashion에 가장 부합하는지


정확히는 기억이 나지 않지만 처음 몇 화 까지는 워낙 많은 수의 참가자들이 있었기 때문에 매번 위의 기준을 깐깐하게 대지 않아도 누군가를 탈락시키는 것이 수월했을 것이다. 하지만 점점 인원이 줄어들수록, 심사위원들 또한 탈락자를 정하는 것에 고심을 하는 것을 느꼈고, 처음보다 좀더 까다롭게 위 기준을 적용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처음 두가지를 둘다 충족한, 실력적으로는 아무리 봐도 나무랄 데 없어 보이는 두 디자이너를 탈락과 통과로 나누는 마지막 기준은 바로 세 번째 기준이었다. 


(여기서부터 스포입니다)


남성복 전문가인 대니얼은 항상 그만의 색깔이 있었다. 모던한 영국 신사 스타일이라고 할까. 수트에 자신감이 넘쳤고 그와 같은 차분하고 클래식한 느낌을 현대적이면서 세련되게 구현하는 것이 그의 주 무기라고 할까. 하지만 회를 거듭하며 그의 전문 분야가 아니던 여성복, 그리고 심지어 액티브웨어에서도 그의 색깔을 새롭게 담아내어 심사위원들을 놀라게 하는 멋진 디자이너였다. 각 미션마다 그는 컨셉의 배경이 될 스토리를 가져와서 이를 분명하게 담아냈다. 매 시즌마다 그가 만들어내는 결과물은 다른 참가자들도 "대니얼이 보인다"라고 할 정도로 그는 자신을 담아낼 줄 아는 디자이너였다. 


'수트' 미션 때 다른 팀들이 뭐 하나라도 더하며 화려한 수트를 선보일 때 대니얼 팀은  "Less is more"의 힘을 증명했다.


결승에서 그의 콜렉션은 충분히 멋지고 빛났다. 하지만 그가 결국 우승을 거머쥐지 못한 마지막 요인은 바로 세 번째 기준이었음을 분명히 알게 된 지점이 있었다. 심사위원들이 그의 작품에서는 주로 "완성도가 매우 높다", "대니얼의 스타일과 개성이 멋지게 드러난다" 등의 평가를 했다. 대니얼의 결과물들은 그의 개성과 창의성을 멋지게 담아냈지만, 아쉽게도 "Next in Fashion"까지는 가지 못했다. 


그러나, 민주의 작품에는 그것에서 한 차원 더 나아간 평가를 내렸다. "그 어디서도 본 적 없는 디자인", "미래의 여성상을 보여준다.", "섹시함이라는 것을 재정의했다" 등의 평가를 내렸다. 대니얼은 '현재'에 머물렀다면, 민주는 그보다 한 걸음 더 나아간 것이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두 참가자가 결승을 펼치다니..한쪽눈을 가리면서 본 마지막화.


즉, 참가자가 만들어낸 결과물이 아무리 마감이 좋고, 디자이너의 스토리를 잘 담아냈고, 개성이 돋보인다고 해도 그것이 과연 정말 차세대 패션을 보여줄 수 있는, '"미래적"인 결과물인가'가 최종 포인트였다. 각 화를 보다보면 다들 이 주제를 모를리가 없음에도 디자인하는 과정에서 어느새 자신에게만 몰두하게 되는 상황에 이른다. 한 발 물러서서 자신의 디자인을 객관적으로 조명하기는 정말 쉽지 않다. 다른것이 아무리 뛰어나도 결국에는 "Next in Fashion"인가를 마지막 기준으로 탈락할 디자이너가 결정된다. 결승전에 오른 두 디자이너를 가르는 마지막 평가에서 이것을 분명히 느낄 수 있었다.


나도 주어진 일을 하다보면 이것의 본래 목적, 큰 그림을 잊고 디테일에만 집중하고 있는 나를 발견할 때가 많았다. 그리고 나에게 이 부분은 단순히 '일'만이 아니라 오늘 하루, 나의 삶에서도 내가 하는 것들이 나의 신념에 부합하는가를 계속 점검하며 나아가야겠다는 생각을 할 수 있었다.




2. 감성은 중요하다. 때로는 다른 요소와 비교할 수 없이 압도적이다.


에인절이 강렬한 컬러감으로 몰아붙이는 느낌이라면, 민주는 그것을 잘 녹여낼 전반적인 밑그림을 멋지게 그려주는 느낌이랄까?


에인절과 민주는 환상적인 팀이었다. 팀 미션에서 두번이나 우승을 하고 최종 4인까지 올라왔다. 이들 뿐만 아니라 호흡이 척척 맞는 팀은 몇 있었다. 하지만 이들 둘은 각각이 가진 출중한 역량, 그리고 함께 했을때 그것을 융합하여 내는 시너지 그 이상의 무언가를 가지고 있었다. 내가 봤을 때 이 둘은 다른 디자이너들과 비교했을 때도 확연히 돋보이는 어떠한 감성, 스타일을 가지고 있었다. 놀랍게도 그런 둘이 한 팀을 이뤘을 때 각각이 너무 튀어 불협화음을 이루는 것이 아닌 하나로 녹아져서 그 감성을 폭발적으로 표현해낸 것이다. 그들이 디자인한 프린트, 판초 스타일의 오버사이즈 옷들은 스토리가 흥미롭거나 마감이 훌륭한 것도 있겠지만, 런웨이에 딱 등장한 순간 먼저 사람들을 놀라게 하는 힘이 있었다. 뭔가 특정 단어나 말로 설명이 잘 안되는 '어떤 느낌'을 분명히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매우 압도적이어서 평가자들이 이들의 매력에 빠져나오기 어렵게 만드는 힘이 있었다. 그것이 바로  이 디자이너들이 전달하는 '감성'이라고 느꼈다. 


액티브웨어 미션에서도 한 심사위원이 "이 작품은 보는 것이 행복하다"는 한 마디로 그 대결의 승자는 결정되었다. 누군가에게 행복감을 선사한 작품은, 이미 반 이상은 해냈다고 할 정도로 강력했다. 이후 개인 미션이 시작될때도 이전보다 퀄리티가 전혀 떨어지지 않고 다시 각자의 스타일을 살려내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특히 가장 인상적이었던 미션 중 하나였던 밀리터리룩에서 두 사람이 각각 만들어낸 결과물은 '멋짐'을 넘어서 온 몸에 전율을 느꼈다.




3. 위(1번에서 언급한)의 3가지 평가기준이 분명 전부는 아니었다. 위 3가지만큼이나 중요한 기준, 바로 '성장'을 언급해보고 싶다.


최후의 8인 전까지 계속 2인 1팀이 되어 팀워크로 진행했을 때, 정말 다양한 형태의 팀들이 있었다. 한 명이 다른 한명의 의견을 거의 묵살하듯 밀고나가는 팀, 한 명이 본인의 전문분야가 아니라고 해서 다른 한명을 거의 우상시하는 팀, 한 명은 기술적으로 탄탄하고 한 명은 아이디어가 기발하여 적절한 조화를 이루는 팀, 처음부터 의견이 척척 맞아 처음부터 끝까지 완벽한 조화를 이루는 팀 등. 심사위원들은 혼자 하는 디자인이 아닌, 파트너와 얼마나 잘 협력을 이루는지, 상대방을 완전히 누르는 것이 아니라 나의 색깔도 살리면서 서로가 어떻게 잘 조화를 이루는가를 분명히 평가했다. 그 부분에 있어 부족함을 보였던 팀들은 아무리 개인의 역량이 뛰어나더라도 오래가지 못했다. 


팀워크 면에서의 성장도 있지만, 심사위원들의 조언 혹은 타인의 피드백에 대한 반응도 참가자 별로 확연한 차이가 있었다. 대부분은 그 조언들을 잘 수용하고, 만약 정말 의도한 것이라면 왜 이렇게 디자인했는지를 논리적으로 설명하는 케이스도 있었다. 하지만 어떤 참가자들의 경우에는 그런 조언 자체를 본인의 디자인을 무시한다는 듯한 태도로 받아들이는 모습도 있었다. 초반에는 그런 모습을 보이다가 조금씩 수용하면서 성장하는 참가자도 있었다. 각 화의 탈락자들은 거의 모두가 눈은 울고 있었지만 입가에 미소를 띠며 "이 과정에서 나는 -를 배웠다.", "한층 더 성장했다"는 피드백을 남기며 떠나가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시즌1 우승자, 자랑스러운 한국인 김민주 디자이너 역시 이 과정 속에서 정말 많이 성장한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사업부분을 맡은 언니와 함께 일하며 본인이 표현하고자 하는 것을 완벽히 표현하는데 늘 한계를 겪어와서 그런지 처음에는 본인의 디자인에 자신이 없어 보이는 모습을 많이 보였다. 결승에서도 여성화가 프리다칼로의 내면성과 작품에서 영감을 얻어 섬세하면서도 강렬한 미래적인 여성상이라는 너무나 멋진 컨셉을 잡았음에도 초반에 어딘가 불안해하고 자신없어하는 그녀의 모습을 심사위원들도 많이 안타까워하는 것이 보였다. 하지만 정작 그녀와 한 팀이었던 에인절의 그동안의 인터뷰만 보아도, 민주를 큰언니처럼 의지하며 오히려 그녀가 없으면 여기까지 올 수 없었을거라고 늘 그녀를 의지했다. 그리고 에인절과 분리되어 개인 경쟁이 시작되면서도 민주는 뒤쳐지거나 약점을 보이기는 커녕 자신의 개성을 마음껏 뿜어내며 심사위원들을 매번 놀라게 했다. 내가 보기에도, 정말 매번 어디에서도 볼 수 없을 것 같은 ‘Next in Fashion’을 가장 잘 구현하는 디자이너였다.


본인이 충분히 잘한다는 것을 몰랐던 것은 본인뿐이었다. 그런 그녀가, 마지막 결승선에서 자신을 응원하는 가족을 통해 더욱 힘을 얻고, 조금씩 스스로에게 확신을 가지며 자유롭게 자신을 표현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그녀의 최종 작품은 정말.. 런웨이를 눈앞에서 봤다면 정말 눈물이 났을 정도로 아름다웠다. 


그녀의 마지막 작품. 정말 이 프로그램의 주제에 걸맞는 컨셉을 너무 멋지게 구현해냈다고 생각한다.




4. 내가 만족 못하면, 남들도 만족하기 어렵다.


자신의 디자인에 대한 확신이 없고, 긍정적이지 않으면 그것이 그 디자인에서도 느껴진다. 많이 공감하고, 또 나를 돌아보게 한 부분 중 하나다. 최근에 내가 딱 겪었던 상황이라 더 와닿았다. 현재 회사에서 진행하는 프로젝트에서도 내가 처음에 만족한 시안과 그다지 호감이 없었던 두번째 시안을 함께 제시했을 때, 후자가 더 좋다는 누군가의 피드백 하나에 흔들려 전자를 너무 쉽게 포기하는 나, 그리고 그것에 대한 미련이 계속 있었지만 억지로 후자를 밀고 나가보았지만 결국에는 전자가 더 낫다는 피드백을 더 많이 받았다. 정신이 들었다. 정말 극단적인 상황이 아니라면, 우선은 내가 만족하지 못하면 남들도 만족시킬 수 없다는 것을.


애초에 주제 자체도 마음에 들지 않고, 자신이 정한 컨셉에 대해 계속 확신을 가지지 못했던 칼리, 결국 그것이 그녀의 마지막 미션이 되었다.




5. 진부한 단어이지만 그 내용은 절대 진부하지 않은 것, '꿈'.


1화부터 마지막 화까지, 이 프로그램에서는 단순히 처절한 경쟁의 순간만을 담지 않고 각각의 참가자의 성장 배경, 그리고 이들이 가진 꿈을 꽤 많이 다루었다. 상금 25만 달러를 거머쥐게 된다면 너는 무엇을 하고 싶은가? 에 대한 인터뷰를 보며 참가자 저마다 가진 이야기, 화려한 무대 뒤에서 쉴새없이 일하며, 가족을 뒷바라지 하며, 또는 자신이 디자인했지만 십 년이 넘게 이름 한번 알리지 못하고 명품 브랜드의 그늘에 가려진 채 달려온 모습들을 가감없이 보여주었다. 누군가는 "저것도 쇼의 일정"이라고 볼 지 모르겠지만 나에겐 진정성 있게 느껴졌다. 중요한 것은 이들이 그 상태에서도 좌절하지 않고 여기에 나와 새로운 꿈을 꾸고 있다는 것이다.


애쉬튼은 돈이 없어 마음껏 옷을 만들어보지 못하는 차세대 디자이너들을 위해, 에인절은 중국의 디자이너들의 성장을 위해, 대니얼은 패션을 통해 사회에 긍정적 메시지를 전하기 위해, 그리고 민주는 아직 한국에서 많이 알려지지 못한 자신의 브랜드를 더욱 확고히 다지고자 하는 목표가 있었다. 


사실 가끔씩 진행자들이 우승자 발표 후 그 회 탈락자를 발표하기 전 "여기서 누군가는 꿈을 이루고, 누군가는 집으로 돌아갑니다" 등의 멘트를 할 때가 있었는데 썩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리고 그 멘트와 달리, 이긴 사람만이 그 꿈을 꿀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우승자는 한 명 뿐이었지만, 매 회 탈락자들은 이 프로그램을 통해 그 꿈을 향해 달려갈 힘, 원동력을 얻었다고 자랑스럽게 이야기하며, 집에 돌아가는 발걸음과 함께 그 꿈을 향해 달려나갈 준비를 하고 있었다. 즉, 우승을 했던 하지 않았던, 모든 참가자들은 이 경쟁 속에서 자신감을 얻고 새로운 항해를 시작한다.


Sustainability에 관심이 많은 나로서는 특히 대니얼이 패션을 대하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그는 평소에 패션을 통해 단순히 자신의 옷을 알리는 것만이 아니라 사회를 변화시키고, 사람들에게 행동을 촉구하고자 하는 목적이 있었다. 실제로 패션이 기후변화에 많은 영향을 주고 있다는 것을 인정하고 이를 메시지로 표현하기 위해 '데님' 미션에서 다른 참가자들이 쓰고 남은 자투리 천을 활용해 그것을 나타낸 그는 패션의 전설 타미힐피거로부터 극찬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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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디자이너(아마?)가 공감하지 않을까 하는, 타미힐피거가 결승에 오른 민주와 대니얼에게 던진 조언 한마디로 글을 마무리 짓겠다.


“여러분의 첫 번째 아이디어가 최고의 아이디어입니다. 뒤 돌아보지 마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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