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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라이테 Aug 24. 2024

늦여름 서정

태풍이 앗아간 것들

여름방학이 끝나가면 매미울음도 끝나간다. 초저녁이면 마당가에 피우던 생쑥 타는 냄새와 툇마루의 나선형 모기향 냄새도 슬그머니 사라진다. 초롱초롱 연분홍 참깨꽃이 지고 난 자리에 여문 참깨가 톡톡 터질 때가 되었다.

 대장간에서 잘 벼린 낫으로 써 억 써 억 참깨대를 베어내어 어긋매껴 세워둔다. 마당에는 세물 고추(빨간 고추를 수확할 때 첫 번째 따낸 고추는 첫물, 세 번째 따낸 고추는 세물)가 두툼한 몸에서 물을 빼내고 버석버석 태양초로 말라간다. 꼿꼿이 위풍당당 키 큰 해바라기도 고개가 땅을 향해 휘어진다. 노란 꽃잎은 마르고 씨앗이 조용히 영글어가는 거다. 아침저녁으로 풀벌레 소리가 새초롬하게 들린다. 발 밑에 밀쳐두었던 까슬한 이불을 새벽이면 끌어당긴다.

이미지 출처 - 네이버 블로그 곰돌이하우스

땡볕에 얼마나 놀았는지 팔뚝에 하얗게 껍질이 일어난다. 발등은 말할 것도 없다. 여름내 끌고 다니던 슬리퍼 모양대로 발등에 그림이 그려있다. 반바지를 벗어도 허벅지에 반바지 라인이 선명하게 구분될 만큼 그을렸다. 그렇게 놀아도 지치지 않았던 여름이 지나간다. 여름이 지나가면서 크고 작은 태풍이 불어오기도 했다.



우리 동네는 제법 규모가 큰 동네였다. 내 동갑내기 여자친구만 8명, 남자 친구들까지 더하면 열댓 명은 된다. 이 중에서 1남 3녀 우리 4남매와 한 명도 빠짐없이 나이가 같은 동갑내기 집이 있었는데 바로 내 친구 미화네 집이다.

우리 오빠랑 미화 언니가, 우리 언니랑 미화 오빠가, 나랑 미화가, 우리 막내랑 미화동생 미선이가 동갑내기다. 미화네는 미선이 밑으로 남동생이 한 명 더 있어 5남매다. 이 댁은 동네 우물가 바로 옆에 있다. 친구들 집 중에서 우리 집과 거리가 가장 가깝다.

이렇게 서로 나이가 같다 보니 엄마들끼리도 친구처럼 "정자야", "명순아"이름을 부르며 친하게 지냈다. 필요한 물건이 있으면 서로 빌려주고 빌어다 쓰고 급전이 필요할 땐 아침 댓바람부터 찾아가도 하나 흉허물이 되지 않는 각별한 사이였다. 미화네 부모님은 얼마나 온순하고 정이 많으신 분인지 동네가 다 인정한 어진 분들이었다.


미화 아빠는 키도 크고 눈이 부리부리 얼굴도 잘생기셨다. 다만 말이 지나치게 느리고 말을 더듬는다. 이런데에는 이유가 있다고 했다. 어디가 아프시다고 그랬다. 그래도 늘 사람 좋게 허허 웃으신다. 미화 엄마는 키가 작고 동글동글 통통하다. 입이 유난히 크고 입술도 두꺼운데 꼭 '달려라 하니'에 나오는 홍두깨 부인 고은애 같다. 그 큰 입으로 깔깔깔깔 웃으시면 그 소리가 우물가까지 들린다.

성격 좋은 두 분을 닮아 미화 동기간 5남매가 모두 그렇게 착할 수가 없다.

당연히 절친은 미화, 동생 절친은 미선이었다.




미화네 일곱 식구가 옹기종기 살기에는 조금 작다 싶은 집에 동네 꾸러기들이 다 모여들었다. 위치가 우물가 옆이기도 했지만 미화 부모님 두 분이 워낙 천성이 순한 분들이라 꾸러기들이 뭘 해도 야단치시는 적이 없었다. 그저 허허 웃으시면 그걸로 끝이다.

우리 집 막내는 아침잠이 없어서 우리 4남매 중에 가장 먼저 일어난다. 눈떠서 오빠 언니들이 다 자고 있으면 내복차림으로 미화네 집에 간다. 다짜고짜 대문 열고 들어가서


 "미선아, 놀자~~   "


그 집 5남매가 자고 있거나 말거나  내 집 안방에 들어가듯 방문을 열고 쓱 들어간다. 자고 있는 식구들 사이에서 미선이를 깨운다. 심심하다고 놀자고. 민폐도 그런 민폐가 없다.

그러다가 미화엄마가 차려준 아침밥을 그 집 식구처럼 함께 먹고 거기서 함께 논다. 늦게 일어난 우리가 동생을 찾아도 없을 땐 그 집에 가보면 틀림없이 거기서 밥을 먹고 있다. 내 집이나 마찬가지로 드나들었다.

등잔불
남포등 - 국립민속박물관

동네가 거의 백열등을 쓸 때까지도 그 집은 등잔불, 남포등을 썼다. 아랫목 쪽 벽 가운데 부분이 사각으로 어른 손바닥만 하게 움푹 들어갔는데 거기가 등잔불 놓는 곳이다.

 등잔불 켜는 게 너무 재미있어 보여서 대낮인데도 컴컴한 그 방 안에서 몇 번이고 성냥을 그어 불을 붙였다 껐다 하며 놀기도 했다.


미화와 터울이 많았던 막내 남동생이 분유를 먹었다. 그러면 몰래 분유통을 열고 크게 한 숟가락 떠서 입에 털어 넣었다. 비밀로 하는 조건으로 내게도 한 숟가락 인심을 썼다. 비밀은 없는 법. 입가에 다 묻혀서 나중에 들통이 났다. 늦게 낳은 막둥이가 허약해서 걱정 끝에 당시 영양제로 인기 있던 원기소사놓으셨다.

아무도 손대지 말고 막둥이만 먹이기로 하셨단다. 그런데 어디 막둥이만 먹었겠나. 막둥이 준다는 핑계로 막둥이 한 알 먹을 때 미화는 3알, 옆에서 구경하는 내 입막음으로 2알. 또 미화만 그랬겠나. 미선이도 그랬고 미화 언니도 그랬다. 그래서 원기소 한 통을 며칠 만에 다 먹어버렸다. 우리 엄마 같으면 불같이 화를 냈을 텐데 미화엄마는 한마디뿐이다.


 "동생 멕이라고 샀더니 큰 것들이 다 먹었네. 막둥이 아프면 늬들이 업어줘야 혀."


원기소


당시에 동네에 흑염소 바람이 일었다. 동네 부녀회장님이 흑염소를 먹고 효험을 봤다고 떠들어댔다.


"정자야, 우리도 흑염소  한 마리 키워 가을걷이 끝나고 약 해 먹어야 쓰겄다."


"그려 그려. 명순아, 이번 장 날에 장에 가볼텨?" 


집집마다 엄마들이 흑염소 욕심을 내었다.  날 학교에 다녀오니 새끼 흑염소 한 마리가 마당가 쇠꼬챙이 줄에 묶여 있었다.  흑염소 담당이 내가 되었다. 신났다.

"토끼랑 염소는 비 맞으면 죽으니까 절대 비 맞히면 안 돼야. "


왜 염소가 비를 맞으면 죽는지 궁금했지만 귀여운 염소를 쓰다듬느라 정신없었다. 염소 자랑을 하려고 미화 집으로 달려가 보았다. 미화 집에 도착하기도 전에 메에~~ 메에~~ 흑염소 울음이 들려왔다. 우리 집이랑 똑같은 새끼 흑염소 한 마리가 풀을 먹고 똥을 뽕뽕 싸고 있었다.

흑염소

다음 날부터 등교 전에 흑염소를 농수로 비탈면에 있는 닥나무에 매어놓았다. 남의 밭이나 논에 들어가서 농작물을 망가뜨리면 안 된다는 당부를 들었다. 먹을만한 풀이 마땅한 곳은 농수로 근처밖에 없었다. 학교가 끝나고 와서는 흑염소를 집으로 다시 데려다 놓았다. 처음에는 흑염소가 신기하고 귀여워서 힘들 줄 몰랐는데 점차 귀찮아졌다. 커갈수록 힘이 세서 내가 끌고 가는 대로 따라오지 않고 제 멋대로 굴었다. 다른 동네 친구집에 놀러 가려해도 염소걱정 때문에 놀지 못하고 와야 했다. 학교에 있는 중에 소나기라도 오는 날에는 안절부절못하고 학교 끝나자마자 먼 하굣길을 뛰어서 염소 데리러 가야 했다. 


"에잇, 이놈의 염소. 너 때메 놀지도 못하잖아." 


한 번씩 염소 등을 닥나무 가지로 때려줬다. 그래도 염소는 내가 가면 얼굴을 내게로 향하고 반갑게 울어댔다.




다니던 국민학교 뒤편에는 커다란 방죽이 있는데 그 방죽 너머 동네에 사는 학생들은 방죽 한가운데로 나 있는 오솔길로 걸어 등하교를 했다. 비가 많이 오면 방죽 가운데로 나 있는 오솔길이 물에 잠길까 봐 수업하다가도 집으로 돌아가라는 교내 방송이 나오기도 했다. 어느 날, 종례시간에 선생님께서 말씀하셨다.


"내일 태풍이 분다고 하니 비가 많이 오면 방죽너머 사는 동련리 세 마을 학생들은 등교를 하지 말아라. 학교에서 이장님 댁으로 연락을 할 거니까 마을 방송 들리면 등교하 않는다."


다음 날 아침에 일어나 하늘을 보니 먹구름 사이로 해가 비칠 듯 말 듯했다. 비는 오지 않았고 바람도 잔잔했다.


"뭐야? 태풍이라더니 비도 안 오고. 귀찮은 염소 또 매어놓아야겠네."


 아침밥을 먹으며 오후에 비가 올 수 있으니 우산을 챙기라고 엄마가 말씀하셨다. 비가 오지 않아서 나는 생각 없이 염소를 농수로 가에 있는 닥나무에 매어놓고 등교했다.  


점심시간이 다가오자 창문이 덜컹덜컹 거센 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조회대 옆 높은기둥에 매달아 놓은 태극기 펄럭이는 소리가 요란하게 들렸다. 하늘을 보니 먹구름이 낮게 드리워져 낮인데도 초저녁처럼 어두웠다. 번개가 번쩍번쩍했다. 아침에 매어놓은 염소 생각이 났다. 교내방송이 들렸다. 태풍이 불어온다고 방죽너머 학생들은 모두 하교하라고 했다. 나도 염소 때문에 가야 한다고 말할 수도 없고 안절부절이었다.


점심도시락을 먹고 나니 급기야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빗줄기는 굵고 바람은 더욱 거세져 운동장에 있는 나무들이 쓰러질 듯했다. 삽시간에 운동장 철봉 쪽 낮은 곳에 물이 고이기 시작했다. 전체 하교하라는 방송이 들렸다.

굵은 빗줄기보다도 바람이 더 무서웠다. 우산을 펼쳐 들었지만 바람 때문에 제대로 쓸 수가 없었다. 온몸이 비에 젖어들고 바람에 눈을 뜰 수 없을 정도였다. 평소보다 두 배 정도 더 많은 시간이 걸려 간신히 도착했다.


가방도 내리지 않고 즉시 염소를 데리러 갔다. 농수로 물이 엄청 불어나 있었다. 그런데 닥나무에 매어놓은 염소가 보이지 않았다. 눈으로 흘러들어오는 빗물을 손등으로 훔쳐가며 찾아봤다. 누군가 집으로 데려갔나 싶어서 집에 왔는데 염소가 없었다. 정신이 번뜩 났다.


'오후에 비 온다고 우산 가져가라 얘길 들었는데... 내가 왜 염소를 매어두어서 이젠 어쩌지?'


울쌍이 된 나를 보고 이번엔 오빠가 함께 닥나무 근처로 가보았다. 아무리 둘러보아도 염소는 보이지 않았다. 자세히 보니 닥나무 가지가 꺾여 있었다. 염소가 비바람 속에서 버둥거리다 닥나무가 꺾인 것인지 바람 때문에 나무가 꺾인 것인지 알 수 없었다. 귀찮다고 염소를 미워하던 게 떠올랐다.


"염소야, 미안해. 어디  거야? 제발 돌아와. 돌아오면 다신 안 때릴게."


끝내 염소를 찾지 못하고 다시 집으로 돌아왔다. 태풍 때문에 염소를 잃었다.




이미지 출처 - 네이버 연합뉴스

염소만이 아니었다. 거센 바람으로 이삭이 팬 논에 벼들이 이삭 무게를 견디지 못하고 이리저리 쓰러졌다. 논에는 물이 차올랐다. 이삭이 팰 때에는 에 물이 고여서는 안 되는데 큰 일이었다. 어른들이 비옷을 입고 삽자루를 쥐고 모두 비바람 속에서 논으로 나가셨다. 에 물꼬를 터서 농수로로 논 물을 콸콸 흘려보냈다. 이삭에 흙탕물 범벅이 되었다.  지푸라기단에서 서너 줄기  지푸라기를 뽑아 쓰러진 벼들을 일으켜 세우고 어긋매껴 묶어 놓았다. 바람이 워낙 세다 보니 어긋매낀 벼들이 또 옆으로 쓰러졌다.

우리 논과 미화네 논은 동네에서 꽤 멀리 떨어져 있었다. 철도 건널목을 지나 들판 건너 시내와 경계를 이루는 탑천 근처에 있었다. 미화 아빠도 논으로 나가셨다.

이미지출처 - 네이버 뉴스

나는 염소를 잃어버린 슬픔에 훌쩍이면서 책가방에서 젖은 책을 꺼냈다. 수건으로 꾹꾹 누르고 한 장씩 펼쳐가며 부채질로 책을 말렸다.

염소 때문에 야단맞을 일을 생각하니 눈앞이 캄캄했다. 미화네 엄마였으면 혼내지 않으시려나? 미화네 집이 부러웠다.


그때,  헐레벌떡 엄마가 흑빛이 된 얼굴로 들어오셨다.


"오메, 어쩐다냐. 향순아버지가 돌아가셨단.

아이고, 우리 정자는 이제 어찌 산다냐."


 향순이는 친구 미화의 언니 이름이다.  아니 이게 무슨 이야. 미화 아빠가 돌아가셨다고? 순간 소름이 쫙 돋았다.


엄마에게 들은 내용은 이랬다. 미화네 아빠는 간질(지금의 뇌전증)을 앓고 계셨다. 그래서 그 후유증으로 말이 늦고 더듬으신다 했다. 그런데 하필 논에서 물꼬를 트다가 발작 증세가 일어났다. 논바닥으로 엎드려 쓰러지셨는데 논에 물이 많이 고여있어서 익사하셨다는 것이다. 모두 허리 숙이고 벼 세워놓느라 쓰러진 분을 빨리 발견하지 못했단다.  


얄궂은 태풍이 염소도 미화 아빠도 데려갔다. 미화네 논도 집도 쑥대밭으로 만들어 놓고 줄행랑치듯 소리 없이 사라졌다.




가장을 잃은 미화네는 어렵게 2년을 그대로 시골에서 살다가 논을 팔아서 시내로 이사 갔다. 중학교에 입학하면서 시내로 이사 간 미화네 집을 몇 번 놀러 다녔다. 미화 어머니께서 온갖 궂은일을 하시면서 생계를 꾸려나가셨다. 그러다 새아빠를 만나고 나이차이가 15년쯤 나는 남동생이 생기면서 나는 더 이상 미화네 집에 놀러 갈 수 없었다.


그때로부터 강산이  번 정도 바뀌었을 때 정자여사와 명순여사가 서로 연락이 되었다. 지금은 두 분이서 가까이 지내신다. 정자여사 새 남편과 사별하고 혼자서 작은 아파트에서 살고 계신다. 단짝 중년미화는 군인 남편을 만나 수원에 살고 있다.


 한 번씩 정자여사명순여사 차로 모셔서 드시고 싶은 음식을 접대해 드리고 있다. 그때 우리 꾸러기들을 너그럽게 봐주신 여사님 그 사랑에 감사하는 마음을 그렇게 밖에는 보답하지 못하고 있다.


정자여사건강하셔서 호탕한 그 웃음이 여전하시다. 늦둥이까지 6남매 효도를 받으시고 마음 편히 살고 계신다.

이제 팔순을 넘긴 정자여사와 명순여사께서 그 시절 이야기 하시면서 다정하게 오래 지내셨으면 하는 바람이다.




덧)

당분간은 연재북-<묵은 책 속에 사는 그녀>와 <아버지의 뜰에 머무는 것들 > 매거진 글만 발행할 예정입니다. 개인 사정이 있습니다.

아울러, 최대한 구독 작가님들 글을 읽고 댓글을 올릴 예정이나 여의치 않을 수 있으니

양해 구합니다.

그렇더라도 라이테의 마음은 작가님을 응원하고 있다는 거 아시죠??

저와 함께해 주셔서 고맙습니다.

사랑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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