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기가 머물던 방

by 라이테

고향 집은 기차가 지나는 철로 가까이 있다. 나는 태어나면서부터 기차 소리를 듣고 자랐다. 호남지역으로 내려가거나 남도에서 출발해서 서울을 향하는 기차가 다녔다. 세월이 흐르고 전국이 일일생활권 시대를 맞았다. 고속 선로도 개설되면서 수많은 열차를 운행했다. 지금은 동네를 지나는 구간에 안전벽을 설치해서 기찻길도 보이지 않고 기찻길 넘어 끝없이 펼쳐졌던 평야 풍경도 가로막았다.

우리 집과 골목을 사이에 두고 대각선으로 친구 주영이 집이 있었다. 주영이네는 감나무 집이라 불렀다. 주영이 집 뒤꼍에 심은 감나무가 골목길로 넘어왔다. 감꽃이 떨어지는 초여름부터 말랑말랑 연시가 먹음직스러운 가을까지 우리는 이 감나무 밑을 놀이터 삼곤 했다.

주영이 아버지는 어린 우리에게 할아버지처럼 느껴질 만큼 나이가 들어 보였다. 한쪽 다리가 불편해 목발 없이는 걷지 못했고, 늘 어두운 방에 누워 라디오를 들으셨다. 주영이는 멀리 나가 놀기 어려웠다. 아버지의 심부름을 하고, 비 오는 날이면 아픈 다리를 주무르며 집안일을 거들었다.

주영이 집 대문을 들어서면 창고가 부엌 앞 장독대까지 길게 이어져 있었다. 농기구와 땔감이 쌓인 그곳을 지나야 쪽마루에 닿을 수 있었다. 창고 문 위에는 말린 뱀이 걸려 있었는데, 아버지의 아픈 다리 약재로 쓰기 위해 말려둔 것이라 했다. 우리는 그 앞을 지날 때마다 괜히 몸을 움츠리며 뛰어가곤 했다.

주영이 어머니는 생계를 위해 동네 어귀의 나무젓가락 공장에 다니셨다. 퇴근길에는 불량품이나 자투리 나무를 끈으로 묶어 머리에 이고 오셨다. 논이 없는 집이라 땔감은 대부분 그것에 의지했다. 저녁 무렵 아궁이에 불을 지필 때면, 우리는 그 곁에 쪼그리고 앉아 나무젓가락에 불이 붙는 모습을 놀이처럼 바라보았다.

주영이에게는 나이 차이가 큰 언니 둘이 있었다. 두 언니는 집안 형편이 어려워 중학교에 진학하지 못했다. 객지에 나가 돈벌이를 하던 미영 언니가 여름이 끝나갈 무렵 집으로 돌아왔다. 그동안 언니가 무슨 일을 했는지 상세히 알지 못했는데 어느 ‘단지’에 들어가 있었다고 했다. 단지는 장독대의 고추장・된장・ 간장 단지가 전부였던 어수룩한 시골뜨기 시절, ‘언니가 왜 단지 안에 들어가 있었을까? 단지 안에서 어떻게 돈을 벌지? 그렇게 큰 단지가 있나?’

나는 고개를 갸웃했다. 나중에 알고 보니 그 ‘단지’는 경기도 안산의 반월공업단지를 말하는 것이었다. 미영 언니는 공단의 여공으로 일했다.

단지에서 나온 미영 언니는 고추장, 된장, 간장 냄새와는 정반대로 화장품과 향수 냄새가 풀풀 났다. 막 피어나는 감꽃 같았다. 아버지 방과 연결된 주영이 방은 어두운 데다 담배 냄새까지 스며들어 좋지 않은 냄새가 났다. 그런데 언니가 내려온 뒤로 방에 들어가면 향긋한 꽃냄새가 났다. 수납장 위에는 우리가 한 번도 신어보지 못한 반짝이는 구두가 놓여 있었다. 언니가 집에 있는 날에는 친구들을 데려오지 말라고 해서 나는 놀러 갈 수 없었다. 언니가 시내 외출이라도 하게 되면 주영이는 나를 불렀다. 우리는 언니 방에 몰래 들어가 언니 물건들을 구경하거나 구두를 신고 방안을 돌아다니기도 했다. 언니가 빠져나간 이불과 벽에 걸린 옷에서 풍기는 향기는 내 마음을 흔들어 놓았다. 처음에는 그게 화장품 냄새라는 걸 알지 못했다. 언니는 꽤 향이 진하고 독한 화장품을 복숭아처럼 고운 얼굴에 발랐다. 뛰노느라 땀 냄새 절은 체취와는 다른 냄새에 이끌려 일부러 냄새를 맡으러 가기도 했다.

한동안 시내 외출이 잦았던 언니가 어느 날 몸을 가누지 못한 채 택시에 실려 집으로 돌아왔다. 어른들은 그 일의 속사정을 함구했고 우리는 이유를 알지 못한 채 눈치만 살폈다.

곱던 미영 언니가 시름시름 앓기 시작했다. 병원에 다니지도 않고 집에만 누워 있었다. 주영이네 창고문 위에 걸어두었던 마른 뱀이 내려졌다. 이제 안방에는 아버지가, 윗방에는 미영 언니가 눕게 되었다. 나는 향내 나는 방을 더 이상 들어가 볼 수 없었다. 미영 언니 소식을 가끔 물어볼 뿐이었다. 미영 언니 걱정도 걱정이려니와 향내 나는 그 방에 다시 들어가고 싶은 마음에 언니가 빨리 낫기를 기다렸다. 언제 다 나아서 그 방을 비워줄까.

기다리던 어느 날, 미영 언니가 사라졌다. 주영이가 학교 다녀오는 사이 옷과 뾰족구두를 다 갖고 떠났다. 미영 언니가 큰 가방을 끌다시피 하며 철도를 걸어서 기차역 쪽으로 가는 걸 봤다는 얘기가 들렸다. 며칠 후 험상궂게 생긴 청년이 주영이 집으로 찾아왔다. 미영 언니를 찾으며 온갖 행패를 부리다 장독대의 단지를 여러 개 깨부수고 돌아갔다. 언니가 사라진 그 방은 다시 주영이 아버지의 담배 냄새와 요강의 오줌 지린내로 채워졌다.

주영이는 학교 오가는 길을 완행열차가 정착하는 기차역 앞으로 바꿨다. 하굣길에 역사 의자에 앉아 있다가 기차가 도착하면 개찰구로 나오는 사람을 일일이 살폈다. 그러다 실망한 얼굴로 집에 돌아오곤 했다.

추석이 다가왔다. 주영이는 학교에 가지 않는 날에도 기차역으로 나갔다. 완행열차가 동네를 지나는 시간에 철로 앞에서 서성였다. 그러나 보름달이 유난히 컸던 그해 추석, 미영 언니는 애타는 동생 마음을 끝내 몰라주었다.

감잎도 다 떨어진 겨울이 한창일 때 주영이 어머니가 이장님과 함께 경기도 안산으로 향했다. 그리고 마침내 미영 언니를 데리고 돌아왔다. 시름시름 앓던 그때보다 더 건강이 나빠졌다. 주영이 아버지가 누워계시던 아랫목에 이제는 말도 못 하게 된 미영 언니가 눕게 되었다. 미영 언니는 우듬지의 떨어질 듯 위태로운 감 같았다. 언니 친구들은 교복을 입고 고등학교에 다닐 나이였다. 미영 언니를 바라보는 아버지의 한숨이 깊어졌다.

새 학기가 시작되었을 때 주영이의 결석이 이어졌다. 담임선생님은 매일 주영이 집을 찾았다. 아버지를 설득했으나 끝내 주영이는 학교로 돌아오지 않았다. 의무교육 기간을 1년 남기고 학교를 졸업하지 못한 것이다.


햇살이 환하게 비칠수록 감나무 그늘은 더욱 짙어졌다. 미영 언니가 누워 있던 자리에는 손톱만 한 여린 감이 굴러다녔다.

그 무렵 마을은 서서히 비어 갔다. 논과 밭은 그대로였으나 사람들의 발걸음은 점점 뜸해졌다. 젊은이들은 짐을 꾸려 도시로 떠났다. 아직 어른이라 부르기에도 이른 나이에 공장으로, 이름 모를 일터로 흩어졌다. 새벽안개가 채 걷히기도 전에 떠났던 그들의 뒷모습은 가족들의 마음에 오래 남았다.

남겨진 부모들은 말없이 자식의 빈자리를 견뎠다. 어린 우리는 그 사정을 다 알지 못한 채 받아들였다. 아픔은 분명히 있었지만, 아픈 이유조차 뚜렷이 알지 못했기에 오히려 더 아슴아슴하게 마음에 스몄다.


이제 주영이네 집은 팔리고 감나무도 베어졌다. 그 자리에는 조립식 집이 들어섰고, 외지인들이 드나드는 소란스러운 공간이 되었다. 나는 지금도 시골집에 가면 대문 앞에서 잠시 그 풍경을 떠올리다 돌아선다. 달리는 기차 창밖으로 스쳐 지나가면서도 오래 눈에 밟히는 풍경처럼.

달개비꽃




땅콩꽃


가지꽃


풋대추


나팔꽃


애기나팔꽃


덩굴강낭콩


벌써 벼이삭이 누렇게 익어갑니다. 시골 동네 앞 들판입니다. 제가 서 있는 뒤쪽에 농수로가 흐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