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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라이테 Aug 31. 2024

주남이의 기다림

'단지'가 그 '단지'가 아니었어

고향마을 옆으로는 철도가 있어서 호남지역으로 내려가거나 남도에서 출발해서 서울을 향하는 기차가 많이 다녔다. 지금은 동네를 지나는 구간에 방음벽을 설치해서 기찻길도 보이지 않고 기찻길 너머 끝없이 펼쳐진 평야도 가로막았다. 안전상의 문제이기도 하겠지만 결국 좋은 풍경 하나를 잃게 되었다.

전국이 서울 1일 생활권 시대를 개막하고 개설된 선로로 하루에도 수많은 고속열차가 운행되었다. 서울까지 고속열차로 1시간 남짓이 되니 출퇴근하는 직장인도 생겼다.

달개비꽃

편리함 때문에 잃은 것이 또 있다. 한반도는 산과 구릉이 많아서 하늘과 땅이 맞닿은 지평선을 보기가 어렵다. 국내 최고의 곡창지대이며 한반도 유일의 지평선을 볼 수 있었던 김제평야는 고속철로가 놓이면서 더 이상 온전한 지평선을 이루지 못하게 되었다. 문명의 이기는 우리에게 편리함을 주는 대신 영혼의 풍경을 앗아갔다.

그럼에도 '지평선 축제'는 여전히 유지되고 있다. 축제기간이 아니더라도 경이로운 황금들판을 만날 수 있고 지척에 있는 '오느른 책밭'서점에서 책 고르는 재미도 덤으로 얻을 수 있다. 이 가을에 말이다.



고향집은 기차가 지나는 철로 가까이 있다. 철로에서 세 번째로 가까운 집이다 보니 기차가 지날 때마다 집이 덜컹덜컹 진동이 감지된다. 태어나면서부터 기차소리를 듣고 자라서 시끄러운 줄은 몰랐다.

우리 집과 제법 큰 골목을 사이에 두고 대각선으로 친구집이 있었다. 감나무집. 이 매거진 모든 글에 나오는 감나무는 그 친구네 감나무다.  나무가 크고 오래되어서 열매가 많은 데다 집 뒤꼍에 심은 감나무가 골목길을 향하고 있다. 감나무 그늘이 반갑고 감꽃 떨어지는 초여름부터 말랑말랑 연시가 먹음직스러운 한가을까지 우리는 이 감나무 밑을 놀이터 삼곤 했다. 때로는 친구네 집 뒤꼍으로 가서 감나무에 올라가 감을 대신 따주기도 했었다.

땅콩꽃

이 감나무집 친구 이름은 주남이다. 이름으로만 봐서는 남자 같지만 드라마 '아들과 딸'에 나오는 후남이네(김희애 분) 집처럼 아들을 바라고 지어준 이름이다. 주남이 위로 두 언니가 있었으니 셋째는 아들을 바랐지만 낳아놓으니 딸. 넷째는 기필코 아들이길 바라는 마음으로 셋째 딸에게 주남이라는 이름을 붙여주고 낳은 넷째는 역시 딸 미남. 미남을 끝으로 아들은 끝내 얻을 수 없었다. 이미 어린 우리가 보기에도 주남이 아빠가 할아버지처럼 느껴질 만큼 연세가 있어 보였다.


주남이네는 부모님과 딸 4 자매. 주남이 아버지는 다리 한쪽이 불편하셨다. 목발을 짚지 않으면 이동하시지 못하는 분이셨다. 이동에 제한이 있다 보니 늘 어두컴컴한 방 안에서 라디오를 듣는 것으로 소일을 하셨다. 생계를 위해서 아무 일도 하지 못하셨다. 날이 흐린 날이나 비가 오는 날에는 다리가 저리시는지 주남이 집에 놀러 가면 주남이는 아버지 다리를 주무르느라 놀 수 없다는 대답을 하곤 했다. 그렇다 보니 주남이가 친구들과 어울려 노는 곳은 감나무 그늘이 거의 대부분이고 항상 집에서 아버지 심부름을 해드리고 아픈 다리를 주물러 드리고 집안일을 거들어야 했다.

주남이 집 대문간에 들어서면 헛간(창고)이 길게 부엌 앞 장독대까지 이어져 있었다. 헛간 안에는 밭일에 쓰는 농기구나 아궁이불 재료가 되는 것들이 쌓여 있었다. 여길 지나야 쪽마루가 놓인 토방으로 올라가고 방에 들어갈 수 있다. 그런데 헛간문 위쪽에 말린 뱀을 걸어두어서 거길 지나갈 때마다 쏜살같이 뛰어 지나야 했다.

시골 출신이라도 뱀은 꿈속에서 만나도 무서운데 하필 말린 뱀을 거기에 걸어두어서 섬뜩했다. 아버지 아픈 다리에 약재료로 쓰려고 말려두었다는 얘길 들었다. 장애입은 다리가 고질병처럼 아프셔서 방 밖으로 나오시는 일도 거의 없고 담배연기 자욱한 방 안에서 늘 적적하게 지내셨다.

가지꽃

생계로 주남이 어머니께서 시내 나가는 과수원 쪽 동네 어귀에 있는 나무젓가락 공장에 다니셨다. 퇴근하실 때는 거기서 나오는 불량 나무젓가락이나 자투리 나무들을 끈으로 동여매어 머리에 이고 오셨다. 그것들이 아궁이불의 재료가 되었다. 논농사가 많은 우리 동네의 아궁이불 재료는 대부분 왕겨나 짚단인데 주남이네는 파절 된 나무나 불량 나무젓가락을 썼다. 그게 재미있어 보여서 일부러 저녁밥을 준비해야 하는 시간에 주남이네 집에서 머물며 나무젓가락 아궁이불 지피는 걸 놀이처럼 즐기곤 했었다.


머리에 무거운 것을 이고 다니셔서 그런지 주남이 어머니는 늘 박카스를 드셨다. 박카스를 드시지 않으면 두통 때문에 일을 못하신다고 했다. 툇마루에 박카스가 상비되어 있었는데 무슨 맛인지 궁금했지만 약이라 먹을 수 없었다.  마르고 작은 체구에 홀로 생계를 꾸려야 하는 일이 녹록지 않으셨으니 두통이 있을만했다.


그 댁 형편이 이렇다 보니 온 동네를 누비며 놀았던 나와 달리 주남이는 늘 집 근처를 떠나지 못했다. 언제 아버지가 부르실지 모르니 상시대기 해야 했다. 언니 둘은 주남이와 나이차이가 제법 나서 학교를 다니지 않았던 나이쯤으로 기억된다. 지금 생각해 보면 중학교에 다녀야 언니들이 가정 형편상 진학을 하지 못한 같다. 주남이도 동생 미남이도 나중에 결국 학교를 중도에 그만두었다.

풋대추


일찍이 객지에 나가 밥벌이를 시작한 언니 둘 중 작은 언니가 여름이 끝나갈 무렵 집으로 돌아왔다. 주남이도 그동안 언니가 무슨 일을 했는지 알 지 못했는데 어느 단지에 들어가 있다가 왔다고 했다.

그 당시만 해도 어리숙한 게 '단지'라 하면 장독대에 있는 단지만 알고 있는 시골뜨기였다.

아니, 언니가 돈 벌러 갔는데 왜 단지 안에 들어가 있을까? 단지 안에서 어떻게 돈을 벌지? 정말 신기하네. 언니가 들어갈 만한 그렇게 큰 단지가 있나? 정말 신기하다. 이렇게 생각했었다. 나중에 알고 보니 그 '단지'라는 게 반월공업단지를 얘기하는 것이었다. 주남이네 정미언니는 거기 여공으로 일했었다고 한다.

어린 우리 세계에서 단지는 그저 고추장, 된장, 간장 담아놓는 단지뿐이었다.


단지에서 나온 언니는 고추장, 된장, 간장 냄새와는 정 반대로 화장품 냄새인지 향수 냄새인지 향기가 풀풀 났다. 주남이 아버지께서 쓰시는 방과 연결된 주남이 방은 어두운 데다 아버지의 담배냄새까지 스며들어 좋지 않은 냄새가 났다. 그런데 정미 언니가 내려온 뒤로 방에 들어가면 향긋 향긋 꽃냄새가 났다. 방 안에는 우리가 한 번도 신어보지 못한 굽 높은 구두가 모셔져 있었다. 정미 언니가 집에 있을 때는 시끄럽다고 친구들 데려오지 말라고 하니 갈 수 없었다. 언니가 시내로 외출이라도 하게 되면 그때 방에 들어가 보는 거다. 그러면 언니가 없는데도 이불에서도 벽에 걸린 옷에서도 향내가 풀풀 나서 어린 내 마음을 뒤흔들어 놓았다. 꽃에서나 나는 냄새가 옷에서, 이불에서 나다니. 신세계였다. 몰래 언니 구두를 신고 방안을 돌아다니기도 했다.

그때까지는 그게 화장품냄새라는 걸 알지 못했다. 꽤 향이 진하고 독한 화장품을 이팔청춘 복숭아처럼 고운 언니 얼굴에 발랐던 것이다. 뛰노느라 땀냄새 절은 우리의 체취와는 다른 냄새에 이끌려 일부러 냄새 맡으러 가기도 했다.

나팔꽃

한 동안 시내 외출이 잦았던 언니가 어느 날 온몸이 엉망으로 된 채 집으로 기어들어왔다. 말 그대로 걷지도 못하고 기어들어왔다. 무슨 연유에선지 온몸이 만신창이가 되어 택시에 실려 돌아왔다. 멍이 잔뜩 든 데다 눈이 퉁퉁 붓고 입술도 다 찢어졌다. 어른들은 그 일의 속사정을 함구했고 어린 우리에게까지 전달되지는 않았다. 정미 언니와 나이가 비슷한 우리 윗집 언니가 하는 얘기를 얼핏 들으니 시내에서 나쁜 남자(깡패)에게 걸려서 폭행을 당했다고 했다.

그 곱던 정미 언니가 그때부터 시름시름 앓기 시작했다. 병원을 다니지도 않고 집에만 누워 있었다. 이제 아랫방에는 주남이 아버지가, 윗 방에는 정미 언니가 누워있어 그 향내 나는 방을 들어가 볼 수 없었다. 주남이에게 말로만 언니 소식을 들었다. 어린 나는 정미 언니 걱정도 걱정이려니와 향내 나는 그 방을 또 들어가고 싶은 마음에 빨리 언니가 낫기를 기다렸다.


언제 언니가 다 나아서 그 방을 비워줄까. 기다리던 어느 날, 정미 언니가 말도 없이 사라졌다는 것이다. 옷가지며 뾰족구두며 다 갖고 떠났다고 했다. 주남이가 학교 다녀오니 언니가 가고 없었다고 했다. 이웃 동네 누구 말을 들으니 정미언니가 큰 가방을 끌다시피 하며 철도를 걸어서 역전 쪽으로 가는 걸 봤다는 얘기도 들렸다. 옆 동네에 있는 기차역은 완행열차만 정차하는 작은 역이었다. 추측컨대 정미언니는 아픈 몸으로 다시 '단지'로 들어가기 위해 집을 떠난 것은 아닌가 싶었다. 며칠 후 주남이네 집으로 몸에 문신이 화려한 험상궂은 청년이 찾아왔다. 정미 언니를 찾으며 온갖 행패를 부리다 장독대의 단지를 여러 개 깨부수고 돌아갔단다. 우리가 학교에 있는 동안 일어난 일이었다.

 

애기나팔꽃

 이제 언니가 사라진 그 방에서는 더 이상 향내가 나지 않고 예전처럼 주남이 아버지의 담배냄새와 요강에서 나는 오줌 지린내만 풍겨 나왔다. 주남이는 학교 오가는 길을 역전으로 바꿨다. 학교 끝나고 오는 길에는 역사 앞 긴 나무 의자에 앉아있다가 기차가 도착하면 내리는 사람을 꼼꼼히 살펴봤다. 대합실에 앉아 있는 사람도 살펴보고 실망한 얼굴로 힘없이 집으로 돌아오곤 했다.

그로부터 한 달쯤 지나 추석이 다가오자 주남이는 학교에 가지 않는 날에도 역전에 나갔다. 완행열차가 동네를 지나는 시간을 기억했다가 철로변에 서성였다. 그러나 보름달이 유난히 컸던 그 해 추석, 끝내 정미 언니는 애타는 동생 마음을 몰라주었다.

덩굴강낭콩


가을이 지나고 겨울이 한창일 때 매일 일하시던 주남이 어머니께서 일도 쉬시고 동네 이장님과 함께 안산행을 하셨다. 그리고 기다리던 정미 언니를 데리고 왔다. 언니를 데려온다는 소식에 나도 반가워서 잊었던 방 안의 향내가 떠올랐다. 그러나 정미 언니는 방 안에서 시름시름 앓던 그때보다도 더 건강이 나빠져서 뼈만 남은 상태가 되어 돌아왔다. 주남이 아버지께서 누워계시던 그 자리에 이제는 말도 못 하는 정미 언니가 눕게 되었다.

언니 친구들은 교복 입고 고등학교에 다닐 나이였다. 둘째 딸을 바라보시는 주남이 아버지의 한숨이 더 깊어갔다.


봄이 다가오고 있을 즈음 주남이는 다니던 학교를 그만두려는지 결석이 계속 이어졌다.  담임 선생님은 우리 집이 주남이네와 가깝다고 매일 하교 때 나와 함께 주남이네 집에 찾아가셨다.  주남이 아버지를 설득했으나 끝내 주남이는 학교로 돌아가지 않았다. 담임 선생님도 주남이네 형편을 아시기에 더 이상 설득이 어렵다고 판단하신 모양이었다. 그렇게 주남이는 의무교육기간을 1년 남기고 초등학교 졸업을 하지 못했다.


둥근잎애기나팔꽃

지금 주남이네 집은 외지인에게 팔리고 감나무도 사라지고 없다. 감나무가 있던 자리에 조립식 집 한 채가 세워지고 시내에 사시는 택시기사님들의 아지트가 되어 주말이 시끌벅적하다. 거기서 고기파티도 하시고 노래방기기도 들여놓고 동네가 떠나가게 음주가무를 즐긴다고 한다. 그들끼리 마늘을 캐서 나누기도 하고 김장철에는 여러 집이 모여서 김장파티를 한단다.


시골에 가면 친정 대문간에 서서 주남이가 있던 풍경을 조용히 그려보다 쓸쓸하게 돌아온다.

그때 그 시절은 우리가 세세히 알지 못해서 더 아프고 슬픈 이야기들을 그렇게 품고 아름답게 흘러갔다.

벌써 벼이삭이 누렇게 익어갑니다. 시골 동네 앞 들판입니다. 제가 서 있는 뒤쪽에 농수로가 흐릅니다.

덧)

글이 어둡고 아픈 글이에요.

친구 주남이 이야기를 쓰다보니 가장 제기억에 남은 사건이라서요.

글 읽고 힘드셨다면 죄송합니다.

읽으신 작가님들께서 힘들어하셨어요.

글이라는게 카타르시스가 있어야는데

오히려 바윗덩어리를 얹어드린것 같아요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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