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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라이테 Dec 04. 2024

열여덟, 서른하나

소녀가 된 은채이야기 - 정읍살이 2

동민의 날 행사를 한다고 온 동네가 들썩들썩했다. 이런 날 식당 문을 하루 닫아걸고 쉬면 좋으련만 송이아빠 병산은 더 많은 재료를 주문해 놓았다. 학교도 유치원도 쉬는 날이니 아침부터 송이와 고운이를 돌보면서 식당 일을 도와야 하는 경이는 공휴일이 더 바빠서 싫었다. 조합에서 준 커다란 달력의 빨간 숫자를 모조리 지우고 싶은 심정이었다.

경이가 달아 준 날개를 장착한 송이 엄마에게 바쁜 식당 일은 이제 강 건너 불구경이었다. 걱정할 일이 아니었다. 경이가 조금 더 잰걸음을 걸으면 얼마든지 해결되는 일이었다. 평소에는 고운이 유치원 갈 시간에나 일어나는 늦잠인데 이 날은 새벽 댓바람부터 일어나 미용실에 가서 머리를 매만지고 거울에 구멍이라도 뚫을 기세로 치장을 했다. 여밈에 미역줄기 같은 프릴이 요란한 물방울무늬 흰 블라우스와 가수 소방차들이 현란한 춤을 출 때 입는 일명 승마바지를 돌청 재킷과 함께 입었다. 행사에 걸맞게 선택한 질서 없는 옷차림이었다. 옷차림만큼이나 기분이 부풀어 올랐는지 빨간 스테레오카세트에서 나오는 나미의 빙글빙글 노래를 흥얼흥얼 따라 불렀다. 가수 나미라도 된 것인 양 한껏 이리저리 몸을 돌려가며 거울에 비춰보았다.


"내가 부녀회 총무라서 아주 중요한 일을 맡았거든. 일 좀 보고 올 테니까 송이랑 고운이 잘 데리고 놀아."

꼭 이럴 때만 다방 미스정처럼 친절했다.


"송이 고운이 데리고 가시면 안 돼요? 오늘 사장님이 바쁜 날이라고 했는데."

"얘가 지금 무슨 소리야. 내가 이 차림으로 애 둘을 끼고 가야겠어? 안 그래도 우리 경이 일 잘하니까 용돈 좀 올려주자고 송이아빠한테 얘기하려고."


송이 엄마는 미닫이문 옆에 걸린 국제석유집 낡은 거울에 닭 볏처럼 세운 앞머리가 제대로 인지 최종점검으로 얼굴을 비춰보더니 치~~ 익 헤어스프레이를 한 번 뿌렸다. 행사가 열리는 중학교에서 울리는 주현미 노랫소리는 얼마나 큰지 중화반점까지 들려 송이엄마 마음을 재촉했다. 털을 고르는 고양이처럼 옷매무새를 살피고 서둘러 또각또각 휑하니 나가버렸다. 송이엄마의 구두소리는 운동장에서 울리는 노랫소리만큼 경쾌했지만 경이의 마음은 묵은 목화솜이불처럼 무거워졌다. 


처음 받은 용돈으로 사놓은 게 하얀 바탕에 빨간 로고가 옆으로 찍힌 르까프 운동화였다. 하얀 운동화는 매일 아침 중화반점 앞을 지나 학교로 향하는 여학생들의 발걸음에 당당한 신발이었다. 운동화를 구입하고 나서 큰맘 먹고 두 번째로 구입한 것이 비키니 옷장이었다. 마땅히 둘 만한 곳이 없었지만 손님용 테이블 간격을 좁히고 들여놓은 이걸 두고 송이엄마는 탐탁지 않아 했다.


"가뜩이나 좁은 방에 손님들 불편하게 왜 이런 걸 들여놓아? 어디 앉으라고. "

"방이 따로 없으니까 어쩔 수 없어요. 주욱 늘어놓은 제 물건 손님들이 보는 거 싫어요."

"그냥 사과박스 하나 가져다 접어서 옷 넣으면 되는 건데. 불편하면 방 얻어 나가든지."


걸핏하면 방 얻어 나가든지였다. 그럴 돈이 없는 것을 알면서도 꼭 그렇게 찔러서 마음을 꺾어놓았다. 용제의 탱자나무 가시 같은 말이 정읍까지 따라와서 송이엄마 입에서 도사리고 있다가 거침없이 튀어나왔다. 그걸로 마음을 붙잡아 두려는 것이라면 오산이었다. 사람 심리가 그렇잖은가. 더 급하고 세게 휘두를수록 빠르고 멀리 튕겨져 나가게 되어 있다는 것을. 둘 사이를 매어놓은 끈 어딘가가 조금이라도 풀려있다면 튕겨져 나가는 것은 시간문제였다. 송이엄마는 그 매듭을 자꾸만 풀리게 했다.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경이의 야무진 손을 언제든, 새벽이나 한밤중이라도 마음만 먹으면 부릴 수 있는 단맛을 송이엄마는 포기하기 힘들었다. 손에 물 적실 일 없게 야무진 경이 살림솜씨에 이미 길들여졌다.

사교모임을 좋아하고 입담도 좋은 송이엄마였다. 식당 영업을 마무리하고 나면 곗날 모임에 나가는 것 자체가 있을 수 없는 일이었으니 그런 날은 화풀이를 병산에게 해서 부부싸움이 었다. 이제는 곗방에도 나가 늦도록 화투판을 벌이고 온 동네 조잡한 일들을 은밀하게 수군대는 짜릿함도 누릴 수 있게 되었으니 경이의 든 자리는 그 존재감이 꽤 컸다. 무엇보다도 친동생이라도 되는 양 송이와 고운이를 챙기는 것을 보면 송이엄마보다 야무졌다. 경이 손길을 타면서 송이와 고운이의 때가 쏙 빠졌다. 손빗질도 안 될 것 같은 엉킴 머리가 반질반질 곱게 땋아 리본핀까지 얹는 머리가 되었다. 지각이 사흘 건너 하루이니 그때마다 꿰차고 나가기 쉽다고 계절도 잊은 맨발에 슬리퍼였던 게 뽀얗게 세탁된 양말에 아침마다 물걸레로 닦아주는 구두로 바뀌었다. 단무지 쪼가리나 짜장소스로 대충 넣은 도시락 반찬이 색색깔 채소를 다져 넣은 고기볶음과 진주햄 줄줄이 비엔나로 바뀌면서 점심시간마다 친구들의 부러움을 사는 송이가 매일 도시락을 건네받을 때마다 경이를 향해 엄지 척을 날리는 것도 그 이유였다. 이런 경이의 꽁무니를 언니, 언니 하며 따라다니는 송이와 고운이가 엄마를 귀찮게 하지 않으니 이런 호강이 없었다.




 운동화는 비키니 옷장 아래칸에 얌전히 들어갔지만 나올 일이 없었다. 하루 일과가 끝나고 밤이 되면 혼자 신발을 꺼내신고 빈 방안을 걸어보는 것으로 그쳤다. 꺼내 신을 일이 도무지 생기지 않았다. 식당에서 잡일 하느라 구정물이나 튀는 신발을 벗을 날이 없는 경이는 눈처럼 하얗고 고무냄새가 풀풀 풍겨나는 새 운동화를 신고 가뿐하게 걷고 싶었다. 내 손으로 벌어 처음 사 본 운동화였다. 한쪽 구석에 고이 모셔두고 아까워서 신지 못한 신발을 꺼내 신고 인숙과 만나기로 했었다. 새로 생겼다는 즉석 떡볶이 집도 가고 매운 입을 달래주러 프린스제과에 가서 소프트 아이스크림을 먹자고 약속했는데 어긋난 일이 되었다. 평소보다 일은 더 많아졌고 게다가 송이 고운이 자매까지 따라붙었다. 억울한 마음을 감추지 못하고 울먹이며 인숙에게 전화를 걸어 약속을 취소했다.

중화반점에 주문이 밀려들어 급할 때마다 가까운 곳은 경이가 배달을 직접 갔는데 인숙은 그렇게 알게 된 법원 앞 대서소 직원이었다. 정읍에 와서 처음으로 친해지기도 했지만 경이에게 살갑고 친절해서 용제살이때 석영에게 의지했던 마음이 인숙에게 옮겨왔다. 동민의 날에는 시간을 주겠다고 설레발을 쳤던 송이엄마 말만 믿고 섣불리 약속을 해버린 경이는 자신이 어리석었음을 깨달았다. 식당 운영에 관한 결정은 병산에게 있었다는 것을 알지 못했다. 약속 취소로 인숙과 관계가 틀어질까 봐 경이는 침울해졌다.


집중을 못했는지 짜릿한 한 줄기가 왼 손 검지손가락 두 마디를 예리하게 훑고 지나갔다. 몸이 오싹하고 기분이 야릇하게 나빴다. 손에서 붉은 맨드라미 솟아났다. 재빨리 수돗가로 달려가 손을 씻었다. 맨드라미는 옅은 물로 변해서 줄줄 흘러내렸다. 수건으로 손가락을 감싸 쥐었다. 짜릿한 한 줄기가 그대로 남아서 나 여기 있다고 존재감을 아릿한 통증으로 드러냈다.

예리한 한 줄기보다 더 예리한 주방장 인복이의 고함소리가 등 뒤로 들려왔다.


"너 일하기 싫어서 일부러 그런 거여? 이년이 정신을 어디 두고 일을 하는거여? 오늘 바쁜 날인지 몰러?"


일부러 손을 다칠 사람 어디 있냔 말이다. 갑자기 삼복더위에 딴 맏 물 땡고추보다 매운 기운이 눈에 확 끼쳐 들었다. 매운 건 지금까지 갠 날 없이 진창인 삶인지, 양파의 알리신 성분이 화학반응을 일으켜 그런 것인지, 울지 않으려고 억지로 참으려는 시큰거림인지 알 수 없었다. 입을 앙 다문 잇사이로 쓰디쓴 삶의 끄윽거림이 새어 나왔다.


유난히 조용하고 뭔가 허전했다. 불안이 돌개바람처럼 경이를 나선 모양으로 감싸며 일어섰다. 참새처럼 재잘거릴 익숙한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돌개바람에 섞인 불안의 정체를 직감으로 알 수 있었다. 오래 생각할 필요도 없었다.

그럴 리가 없는데 송이와 고운이가 너무 조용했다. 공휴일이라고 대방출해주는 텔레비전 특집방송에 빠져 있나? 아침밥을 먹이고 머리를 가지런히 빗겨줄 때까지 방안에 있던 아이들이다. 정신이 번쩍 들었다. 다친 손을 간신히 여미고 안방 문을 거칠게 열었다. 텔레비전도 조용하고 자매가 먹다 만 과자부스러기만 바닥에 흩어져 있다. 영업 전 환기를 위해 식당 출입문을 열어두었으니 밖으로 나갔다면 언제 그랬는지 소리로는 알 수 없었다. 식당 주변부터 찾아보기로 했다. 식당 밖 큰길에서 자매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옆 집 철물점도 건너편 레코드가게도 모른다고 했다. 송이가 자주 놀러 가는 보득이네 거울가게에도 가보았다. 거기에도 오지 않았단다. 미술학원 다니고 싶다고 졸랐던 송이 말이 생각나서 씨소미술학원으로 갔다. 학원 올라가는 계단셔터가 닫혀 있었다. 조금 멀긴 해도 체육대회가 열리고 있는 중학교 운동장으로 나가보는 수밖에 없었다. 아찔했다. 어떻게든 찾아야 했다. 송이엄마, 병산에게 야단맞는 것은 두렵지 않았다. 동생처럼 이쁜 송이, 고운이를 끝내 찾지 못할까 봐 더럭 겁이 났다. 눈앞이 흐릿해졌다.

엄마를 잃는다는 것은 나이를 먹을수록 가슴에 바늘로 고통을 세공하는 일이었다. 경이에게 엄마가 없을 뿐 아니라 엄마를 엄마이게 하는 곁딸린 가족조차 부재하다는 것은 치명적인 일이라는 것을 경이는 수 없이 깊게 체득했다. 그런 일을 송이와 고운이가 겪게 할 수는 없었다.

마른 먼지가 뿌옇게 일어나는 운동장에 경기를 진행하는 스피커소리가 요란하게 울렸지만 경이에게는 오직 어린 자매의 발자국 소리가 있는 곳으로 귀가 초집중되었다. 운동장을 둘러싸고 빽빽하게 가득 찬 사람들 틈에 송이, 고운이 자매는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미역줄기를 여밈에 달고 닭 볏이 자존심인양 스러지지 않게 치켜세웠을 송이엄마의 모습도 거기에 없다. 세 사람이 모두 보이지 않는다는 것은 함께 있다는 반증일까? 등줄기에서 식은땀이 났다. 주방장 인복에게 당할 일 따위는 걱정도 아니었다. 조마조마한 마음은 심장이 해야 할 일을 가중시켜 가슴에 손을 대면 심장 실루엣이 손에 더듬어질 것 같았다. 아찔해서 자꾸 정신이 혼미해지려는 것을 마른침을 삼키면서 정신줄을 붙잡았다. 급기야 소리도 없는 눈물이 터져 나왔다.


"식당 바쁜 날이니까 데리고 가라 했는데 내가 어떻게 일하면서 둘을 돌보냐고... 엄마 아빠가 있는데 왜 내가, 왜 내가 책임을 져야 하는데. 왜 내가."


헤매던 걸음을 다시 중화반점으로 돌렸다. 식재료 트럭에서 물건을 받던 병산에게 자매를 찾고 있다고 말해야 했다. 병산은 경이에게 친절하지도 무심하지도 않은 과묵하고 점잖은 사람이었다. 인복과 다툴 때도 이유 없이 화를 내지는 않았다. 김 안나는 숭늉이 더 뜨겁다고 그런 사람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경이의 말을 들은 병산의 눈빛이 순식간에 싸늘해졌다.

순간 번쩍하고 암흑과 빛이 교차했다. 귀가 터지는 줄 알았다. 찰나 비명을 지르며 경이 몸이 휘청이더니 인도 보도블록에 이마를 부딪혔다. 바로 일어설 수가 없었다. 따끈하고 농탁한 물이 이마에서부터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손가락 상처를 싸맨 수건이 벗겨져 도로 쪽으로 떨어져 나갔다.

아팠다. 찢어진 이마보다 자식을 잃었을까 봐 일순간 섬광처럼 분이 올라오는 그의 부성이 경이를 더욱 아프게 했다. 경이는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그 자리에서 일어서지 않았다.  이마에서 시작된 농탁한 물이 목을 타고 흘러내려 앞섶을 붉게 물들였다. 눈을 감았다. 사람들의 웅성거림이 먼 기적소리처럼 가물가물 들렸다.


"어, 언니? 경이 언니잖아. 고운아 우리 언니 맞지? "

"언니, 경이언니 피난다. 언니 왜 그래?"

"언니, 눈 떠봐. 일어 나 언니. 언니 왜 그래. 우리 언니 넘어졌어? 고운아, 언니 일으키자. "


가물가물한 소리를 뚫고 듣고 싶던, 기다리던 목소리가 선명하게 들려왔다. 경이는 눈을 더 질끈 감았다. 눈에서 삐져나온 물이 흘러들어 조금은 옅어진 붉은 물이 꽃처럼 흘러내렸다.


한 바탕 소란스러운 일이 있었던 날도 노을은 여전히 아름다웠다. 길 건너 싹눈이 막 트기 시작한 나목의 가지에 걸쳐진 석양이 나무에 달린 큰 열매처럼 보였다. 저 열매를 한 입 베어 물면 헛헛한 것들이 가득 찰까. 갑자기 입안이 홀라당 벗겨지도록 뜨거운 음식이 먹고 싶었다. 가지에 간신히 매달린 붉은 열매는 더 이상 무게를 견디지 못하는 듯 점차 땅을 향해 쏟아졌다. 붉은 연시처럼 쏟아진 열매는 어둠을 토해내더니 뭐든지 다 삼켰다. 허무의 심연에서 미처 빠져나오지 못한 열일곱의 경이는 용제에서부터 애지중지 아끼던 묵직한 책 한 권을 손에 든 채 밤안개가 구렁이 같은 미동(微動)으로 퍼지는 거리를 목적도 없이 배회하다 빨간 불빛에 이끌리어 큰 건물 앞에 멈춰 섰다. 낮에 만나지 못했던 인숙이 경이를 기다리고 있었다. 인숙은 경이 손을 잡고 첨탑십자가 불빛이 환한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경이 너 지난번에 여기 왔던 아주머니 기억나? 키가 작고 얼굴이 곰팡이 핀 메주같이 푸르뎅뎅한. 그 왜 있잖니 너한테 몇 살이냐고 묻던."

"아, 그 입이 메기처럼 생겼다는 아주머니요? "

"응, 그래 맞아. 그 아주머니 아들이 있다는데 너 한 번 만나볼래?"

"왜요? 왜 만나요?"

"왜긴 왜야? 선보는 거지. 어휴 아직 어리다고 안된다는데도 그 아주머니가 굳이 너를 꼭 소개하라고 얼마나 성화인지. 나야 네가 계속 여기 살면 좋겠는데. 이제 너도 벌써 열여덟이고 만큼 컸으니 욕심만 채울 없는 거잖니. 일찍 시집가서 자리 잡아야 돈도 모으고 출생신고도 하지."


그 남자 박문수와 약혼식을 하는 날이었다. 말이 약혼식이지 그날 경이는 약혼할 남자를 두 번째 만나는 날이었다. 그는 아침 일찍 어머니를 앞세우고 경이를 만나러 중화반점에 도착했다. 88 올림픽이 끝난 지 일주일이 다 되었지만 텔레비전에서는 여전히 올림픽 후일담 열기가 사그라지지 않았고 대한민국에서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실시한 서머타임이 끝나는 날이었다.

점심 장사 준비나 도와주고 나서길 바랐던 송이엄마는 일찍 도착한 문수가 영 밉상이었다. 삼촌 조카뻘이나 되는 나이 차이에도 세상물정 모르게 빈 손으로 들이닥친 문수가 얄미웠을 수도 있었다. 문수는 중화반점의 몇 안 되는 옥색 테이블 중 벽 쪽에 붙은 곳에 자리를 잡고 앉아 경이가 준비를 마치고 나오기를 기다리는 동안 테이블 위의 냅킨만 만지작 거리고 있었다.

송이엄마와 메기 주둥이를 닮은 중년여자는 중화반점 문 앞에서 소곤거렸다.


"약속이랑 다르잖아요. 봄에 데려간다더니 왜 이렇게 서둘러요. 용돈 몇 푼 쥐어주고 몇 달은 더 부릴 수 있는데."

"시한(겨울의 방언)에 일 없을 때 데리다 놔야 집안 살림 허는 거 가리쳐서 봄 되믄 일허제. 천하에 고아 아녀. 그러니 멀 알것냐고. 어르신덜 모시는 거이랑 내 집 식구들 수발 들자믄 손 좀 봐야 허지 않겄어?"

"그건 아주머니 사정이지요. 다짜고짜 이렇게 서두르면 손해 볼 건 어쩌라고요."

"그니깨 어쩌긋어. 내 말이 영 틀린 말도 아니잖여. 일이 이러코롬 됐응게 어쩔 도리 읎지. 그려서 그거 감안허고 내가 봉투에 조금 더 넣었당게. 너무 섭섭게 생각 말더라고."

"뭐 이젠 어쩔 수 없지요. 대신 경이 빈 몸으로 보내는 거는 아시죠? 촌년 데려다 먹이고 재우고 용돈도 챙겨줬으니까 경이도 할 말 없을 거예요."


문수와 경이는 메기 주둥이 여자와 송이엄마에게 인사를 나누고 헤어졌다. 문수와 경이는 약혼 기념 여행으로 강주 나들이를 가기로 했다. 몇 발자국 걷던 송이엄마가 뒤돌아서서 경이를 한쪽으로 불러 세웠다.


"신랑이랑 강주 가서 구경 잘하고 와. 너 이거 한 가지는 명심해. 오늘 꼭 집에 들어와야 한다. 만약 오늘 안 들어오면 다시는 우리 집에서 함께 못 사니까 그런 줄 알아."


벌써 오후 2시가 다 되어가는 시간인데 강주까지 장거리에 풍남문, 덕진공원이라도 구경할라치면 시간이 빠듯하다는 걸 송이엄마도 알고 하는 말이었다. 집에 들어오기 힘든 상황이란 걸 예측하고 그 길로 경이를 쫓아낼 셈이었다. 이미 메기 주둥이 여자에게도 넌지시 그래줄 것을 부탁해 두었다.


"총각이 나이가 많은 데다 경이는 아직 시집가기 싫어하는 눈치인데 까딱 잘못하면 일을 그르칠 수 있으니까 오늘이 기회다 하고 꽉 잡아야 해요."

구실 삼아 쫓아내는 게 아니고서는 2년 가까이 일을 부렸으니 빈 손으로 내보낼 수는 없는 일이었다. 더구나 모든 소문의 진앙지인 레코드가게 영주엄마가 혼사가 오가는 경이 일에 관심을 보이는 것도 큰 부담이었다. 메기 주둥이 여자에게 경이를 보내는 대가로 봉투를 받았으니 경이만 쫓아낸다면 손해는 아니었다. 게다가 대서소 인숙과 어울려 지내는 경이가 부쩍 출생신고에 관한 얘기를 자주 꺼내고 채근하는 것도 치통처럼 은근 신경이 쓰이던 차에 더 이상 데리고 있다가는 여러 가지 복잡한 상황으로 일이 치달을 것 같았다.


경이는 그날 그들의 모의대로 중화반점에 돌아가지 못했다. 어린 날의 경이가 받지 못했던 사랑을 쏟아붓듯 했던 송이와 고운에게 인사도 제대로 하지 못한 채 정읍을 떠나올 수밖에 없었다. 처음 달달했던 송이엄마의 말에 여기서 정 붙이고 살아볼까 했던 마음은 2년의 시간이 흐르는 동안 어리석었다고 여지없이 경이의 등짝을 찰지게 내리치는 채찍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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