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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은 나를 살렸다

by 라이테

그 순간을 분명히 기억한다.


오래 지병으로 입퇴원을 반복하시던 시부께서 딸 첫 돌이 될 즈음 병환이 깊어져 다시 입원하셨다. 아기를 두고 병간호를 할 수 없는 상황이라 시부님 병환에 손을 보탤 수 없었다. 당연히 돌잔치도 하지 못했다.

친정 사진첩엔 오빠만 돌 사진이 있고 밑으로 딸 셋, 게다가 둘째 딸로 태어난 내 돌사진은 없다. 모든 일에서 오빠 뒤로 밀려나는 아들 딸 차별이 섭섭했기에 내 딸은 꼭 돌잔치를 해주고 싶었다.

시댁 식구 아무도 돌잔치를 입에 올리지 않았다. 아기의 생일보다 어르신의 병환이 더 중요했다.

당시에는 자녀가 둘셋이어도 백일, 돌잔치를 모두 하던 때였다. 지인 자녀들의 잔치행사에 빠짐없이 참석했지만 정작 내 아이 백일, 첫 생일은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당일에 동생이 친정식구 대표로 찾아와 간단히 생일 축하만 하는 것으로 끝났다. 시모님께서 살아계셨더라면 첫 아이의 첫 생일을 표 나게 축하하고픈 어미의 마음을 읽어주셨으려나. 나이 서른 인 새댁은 철딱서니 없는 생각을 그렇게 했더랬다.

지금 생각해 보면 섭섭할 일도 아닌데 말이다.


섭섭한 마음을 안은 채 친정길에 나섰다.

친정에 가면 직장 생활하던 동생 손에 잠깐 아기를 맡길 수 있어서 한숨 돌렸고 아직은 기운 팔팔한 50대 후반의 엄마가 차려주시는 밥상을 손 하나 까딱 하지 않고 당당히 받을 수 있었다.

그러다가 동생의 서가에서 못 보던 책을 발견했다. A4용지 절반 크기의 책이었나.

두란노 서원에서 발간한 "생명의 삶". QT책. (기도와 묵상, 성경 읽기를 하면서 하나님을 만나는 조용한 시간을 이르는 말)

처음 보는 낯선 책이기에 왼 팔로 아기를 안고 오른손으로 책을 펼쳐 들었다. 그러다 중간쯤 페이지 오른쪽 하단 네모 안에 작은 광고 문구를 보았다.


가슴이 한없이 두근거렸다. 뒤통수를 세게 얻어맞은 기분이었다. 돌잔치 못해서 토라진 마음으로 친정에 쉬러 온 내가 부끄러웠다. 돌잔치 생각이 단번에 사라졌다. 책을 아기 기저귀가방에 넣어왔다.


그 순간을 정확히 기억한다.


광고 문구 아래 적힌 전화번호를 또박또박 눌렀다. 02-544-9544.

결연기관 로고. 물고기와 보리이삭이 상징하는 떡과 복음

내 배 아파 낳은 딸이 있으니 마음으로 낳은 아들이라 생각하고 남자아이 결연을 하기로 했다. 기관에서 지금 막 해외구호사업을 시작한 나라, 아프리카 지역 중 오랜 내전으로 경제상황이 최악인 르완다 아동을 추천했다. 르완다 아동 테오네스테 비메.

해외아동결연 시작이었다.

르완다 아동(가장 어린아이)과 성탄카드


내전으로 아빠가 돌아가시고 엄마가 쓰레기 더미에서 일을 해서 생계를 꾸려가는 가정. 며칠 후 우편으로 아동 사진이 첨부된 소개서가 집으로 도착했다. 눈에 잘 띄는 곳에 사진액자를 두고 볼 때마다 축복했다.


라이언이 태어났다. 라이언 첫 생일을 맞이하던 해에 다시 볼리비아 소녀 빅토리아 팍시 몬타노를 결연했다. 기도할 때마다 두 아이 이름을 빼놓지 않았다.

볼리비아 소녀 빅토리아

후원을 시작한 지 몇 달 되지 않아 남편이 운영하던 일이 완전히 어그러졌다. 집안 형편이 말할 수 없이 어려워졌다. 카드 돌려 막기 끝에 일이 터지고 추심전화를 피해 낮 동안에 아이를 데리고 지인 집을 전전했다. 아이를 맡기고 맞벌이에 나서야 할 상황이었지만 육아에 도움을 줄 가족이 없었다. 그 혼란 중에 결연아동 후원을 중단해야 하는 고민이 생겼다. 아침에 결연을 중단하고 오후에 눈물로 후회하며 결연을 요청했다. 내가 조금 더 수월하자고 그럴 수는 없었다. 허리띠를 졸라매며 두 아동의 결연을 이어나갔다. 상황은 손 쓸 수 없는 내리막길로 치달았다.


결국 군인관사에 살고 있는 친정언니 집으로 두 아이를 데리고 더부살이를 시작했다. 언니가 아이들을 돌봐주고 군부대에서 운영하는 민간인 고용 일자리를 얻었다. 조금씩 부채를 갚아나갔다. 형부의 발령으로 언니네 가족이 이사를 가야 할 상황이 되었다. 일 년을 한 달 남겨놓고 퇴직금을 포기한 채 퇴사했다.


그 뒤로도 쓴맛은 오래 지속되었다. 생활비를 줄이고 줄였지만 부채 갚는데 늘 허덕였다. 어느 해 여름에는 두 아이에게 오천 원 짜리 여름 티셔츠 한 장을 사주지 못하고 그냥 지나갔다. 친정 남자조카들이 입던 옷을 계절마다 딸에게 입히며 이를 악물고 부채를 갚았던 때도 있었다.


그때 잠깐 결연을 멈출까 또 고민했다.

아이들에게 의견을 물었다.

"엄마, 우리가 돈 안보내면 그 형, 누나는 굶어서 배고프잖아. 죽으면 어떻게 해?"


결연을 중단할 수 없었다. 세상은 더불어 살아가야 한다고, 서로 돌보고 베풀며 살아야 한다는 참 교육이었는데 멈출 수 없었다. 아이들 앞에서 부끄럽고 미안했다. 내가 힘들다고, 나만 살겠다고 외면해서는 안 되는 일이라고 가르쳤다.


결연은 10년을 넘고 20년을 지나 지난 주말 만 25년에 이르렀다.

내 나이의 절반이 조금 미치지 못하는 기간이 되었다. 기관과 함께 생의 파고를 넘은 것 같아서 우정이라도 생긴 듯 메시지만 들어와도 반갑다. 얼마 전 기관에서 창립 30주년 기념행사에 초대를 했으나 현생이 녹록지 않아서 참여할 수 없었다. 아니, 참여 대신 서울 오가는 경비를 의미 있는 일에 지출했다.


기관을 어떻게 믿냐고, 그들이 후원금을 어떻게 운용하는지 알지못해 그런다고 어리석은 사람 취급을 받기도 한다. 그러나 그리 생각하는 것은 그들 몫이고 내 알 바 아니다. 나는 기관을 믿는 것이 아니라 기관을 통해 일하시는 전능자를 믿고 그의 손으로 하시는 일을 기대한다.

기관을 믿지 못하겠다고 말하는 지인은 후원해 본 적이 없었고 앞으로도 후원할 생각이 없단다. 그는 그렇게 그의 인생을 살면 된다.

시시비비를 가리자는 이야기가 아니다.

결연 후원은 영리를 추구하는 일이 아니다. 내 것을 조금 덜어내 함께 먹고 더불어 살자는 이야기다. 거기에는 사랑과 희망이 있고 기대와 미래가 있다.

한 사람의 인생을 바꿀 수 있는 힘이 내게 있다. 내가 무엇으로 한 사람의 인생을 바꿀 수 있겠나. 그것이 나는 결연후원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이 일을 멈출 수 없다.


내 주머니의 작은 돈이 구르고 굴러서

예방접종을 하고 말라리아나 전염병으로부터 목숨을 구할 수 있다.

끼니와 깨끗한 생수를 공급받을 수 있다.

학교에 다닐 수 있게 되어 조혼을 피할 수 있고 대가 없는 아동 노동력 착취를 면할 수 있다.

새끼 염소나 양을 분양받아 키워서 다시 새끼를 내고 이게 반복되면 가정 경제의 밑받침이 될 수 있다.

일자리를 찾아 부모는 이웃나라로 떠나고 아이들만 남겨지는 상황을 피할 수 있다.

무엇보다 이 세상에 태어난 것은 우연이 아니고 예정된 축복이며 자신들이 나라의 희망이고 미래라는 자존감을 키울 수 있다.

이뿐이랴.


가장 안타까웠던 것은 파라과이 아동 프란시스코 이야기다.

남편을 사고로 잃고 프란시스코와 살던 엄마가 돈벌이를 위해 아르헨티나로 이주했는데 거기서 또 사고를 당했다. 열 살 남짓한 그 어린아이가 엄마의 사고를 수습하기 위해 할머니와 함께 아르헨티나로 떠나게 되어 결연이 중단된 경우다. 연락이 없는 아동을 한없이 기다릴 수 없어 그 자리를 다른 결연 아동으로 채웠다. 눈이 별빛처럼 초롱하고 수줍은 듯한 미소가 이쁜 천사 같은 아들이었다. 부디 어딘가에서 당당한 청년으로 살아가길 바라고 바란다.

축구용품이 갖고 싶은 프란시스코. 너를 사랑해

가장 뿌듯했던 일은 모잠비크 아들 이야기다. 2008년 1월부터 2017년 12월까지 딱 10년 동안 이어진 결연으로 초등생이던 아구스티뉴가 청년으로 성장했다.

방글라데시 마슘 므린다는 가장 짧은 결연이었지만 그 지역 구호개발사업이 성공적으로 완료되어서 다른 지역으로 센터를 옮기게 되면서 결연이 끊어졌다.


미미한 힘으로 벅찬 일을 이루었다.

이 땅에서 꾸준하게 한 일이 보이지 않는 어딘가에서 축복의 씨앗으로 떨어졌을 걸 생각하면 여전히 설렌다. 25년 동안 르완다, 볼리비아, 파라과이, 방글라데시, 모잠비크, 우간다 결연아동들이 내게 준 축복의 기회를 어찌 다 표현할 수 있을까. 이 땅 소풍이 끝났을 때 다른 세상에서 할 말 한 가지는 생긴 셈이다.


"너는 누구고 뭐 하다 왔지? "

물었을 때 수줍게라도 내밀 수 있는 히든카드가 있어 감사하다.



5년 지속된 유급을 넘어서야 하고,
가사를 돕고 가족을 돌보면서
생계에 보탬이 되어야 하는 아이들,
국경을 넘어서까지 어린아이가
어른 역할을 해야 하는 고통이 따르더라도,
구호사업개발 완료로 엄소 한 마리가 네게 남겨졌거나
또 지금은 빈 손 이더라도
너희들은 꿈쟁이 요셉처럼
채색 꿈을 꾸고
그 꿈을 생각 키우며 자라기를 축복한다.
너희들은 하나님의 기쁨이고
우리들의 미래이고 축복의 기업이란다.
작은 관심이 너희들의 삶을 바꾸리라는
큰 믿음을 갖고 함께 할 테니
너희들은 창대하라.
15주년 기념선물
20주년 기념선물




이 글을 쓰기까지 고민이 많았습니다.

연재북이 혼자 사는 중년의 일상을 그렸기에 라이테를 이루는 퍼즐판에 삶의 조각들이 하나씩 끼워지며 퍼즐판이 완성되는 것이었습니다. 저를 이루는 구성 요소 중 이 이야기는 제 나이의 반생 가까이 지속된 일이라서 빼놓을 수 없었습니다. 저를 드러내고 제가 실제보다 미화되고 제 의가 드러나는 안목의 정욕이 될 수 있겠다는 염려가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끝내 놓지 못한 이야기입니다.

재 소소한 일상의 이야기가 어느 한 분이라도 마음에 순간 스치는 작은 빛줄기가 되었다면 그걸로 충분합니다.

송구합니다.

이손끝작가님의 댓글을 고정글로 올렸습니다.

이 글을 읽고 친정어머님 에피소드를 나눠주셨어요.

미약한 제 글이 또 다른 에피소드를 부르고 결단을 만드는건 글쓴이로서 어느때보다 큰 보람입니다.


대문사진은 지난 6월에 받은 우간다 소녀 룻 난고비 나난게의 편지입니다.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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