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등재-무성서원
조금 울적한 날들이 이어졌다. 가을이 깊어졌어도 그이 탓은 아니었다.
울적한 이유가 분명했지만 마땅히 당장 뭔가 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그저 마음 테두리를 도닥도닥 단속하고 돌이키면 간단히 사라질 일이기도 했다. 옷자락에 묻은 짧은 실오라기를 툭 털어내듯 무심하면 그만인 그런 일. 그런데 한 번 시작된 실금은 계속 다른 줄기를 만들어 뻗어나갔다. 이러다간 소금에 절인 마음으로 푸석해질 것 같았다. 그렇게 10월 끝자락에 다다랐다.
느리게만 가던 더위가 어느 순간 훅 지나더니 알맞게 뜸이 든 가을맛은 노루꼬리만큼 보여줬다.
올 가을 들어 가장 기온이 낮다고 며칠 전부터 만나는 이마다 인사대신 예보를 떠들썩하게 전했다.
새벽 4시 10분. 가볍게 양치와 세수를 마치고 집을 나섰다. 새벽바람이 차가웠고 별은 더 희게 반짝였다. 교회를 나올 때 디지털 벽시계는 6과 10을 빨간 불빛으로 보여줬다. 막혔던 체증이 뚫린 것처럼 속이 후련했다. 발이 시렸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은 여전히 컴컴했다.
뜨거운 물을 끓여 텀블러에 붓고 찬물도 한 병 챙겼다. 샌드위치 만들 시간을 벌어야 해서 잠깐 고민하다가 인스턴트커피 G7 한 봉, 노란 믹스커피 스틱과 발포비타민 스틱 한봉도 더했다. 삶은 계란 두 알, 마늘바게트 두 조각, 일본 생초콜릿 몇 조각과 구운 아몬드를 간단 용기에 넣었다. 머핀컵 유산지에 쿠키가 담겨있던 용기. 주름유산지만 갈아 끼워서 재활용한 거니 일회용은 아니라고 손톱만 한 양심이 피식 웃었다. 귤 두 개도 추가했다.
냉동실에 식빵 몇 장이 남아있다. 그걸 꺼내 쓰기로 하고 유부초밥을 샌드위치로 바꿨다.
돼지고기 다짐육을 후추 조금만 뿌려 소금 없이 볶았다. 물기를 날리고 다진 햄과 게맛살에 섞어 볶다가 계란을 떨어뜨려 샌드위치에 넣을 패티를 만들었다. 치즈 4장, 로메인 상추 6장, 수제 딸기잼과 참깨 드레싱이 샌드위치 속재료 전부였다. 참치캔과 마요네즈를 잠깐 떠올렸지만 맛이 섞이는 건 별로여서 꺼내지 않았다. 토마토와 양상추가 빠진 색상조합은 엉성하고 실속 없지만 모양 빠지지 않은 정도면 됐다.
오늘은 도시락이다. 혼자 나들이 도시락일 땐 언제나 2인분을 챙긴다.
햇살 잘 드는 대청마루에 앉는 호사를 누리게 된다면 잠시 펼쳐봐도 좋을 절친의 책 한 권도 꾸렸다.
세계유산위원회는 2019년 7월 아제르바이잔 수도 바쿠에서 열린 제43차 회의에서 우리나라 서원 9곳을 묶은 '한국의 서원'을 세계유산 중 문화유산으로 등재하였다.
한국의 서원(書院)은 유네스코 세계유산의 등재기준인 ' 탁월한 보편적 가치'의 세 번째 항목인 '문화적 전통, 또는 살아있거나 소멸된 문명에 관하여 독보적이거나 적어도 특출한 증거'에 해당되는 유산으로서 그 완전성과 진정성을 인정받았다. 교육적, 사회적 활동에서 널리 보편화되었던 한국 성리학의 탁월성이 입증된 것이다.
한국 최초의 서원인 영주 소수서원을 비롯, 남계서원, 옥산서원, 도산서원, 필암서원, 도동서원, 병산서원, 돈암서원, 무성서원 9곳이다.
정읍 칠보면의 무성서원이 목적지다.
서원이라 자연스럽게 이끌려 가는 걸음이 경쾌하다. 혼자 나서기에 쓸쓸하지도 적적하지도 않으니 아무 특별할 것 없는 소탈한 걸음이면 충분한 곳.
오래된 목재 건축물에서 느낄 수 있는 투박한 질감이 마음 한구석부터 따뜻하게 지핀다. 기둥이나 서까래의 갈라진 틈으로 스며든 세월의 흔적과 빛바램이 있는 영정그림, 담장에 얹은 오래된 기와에 피어있는 이끼가 카메라 셔터를 누르라고 재촉하는 곳. 정갈하게 비질을 마친 마당 가득 햇살이 쏟아지는 시간이라면 더욱 좋고 된 서리에 풀이 죽은 맨드라미가 뒤뜰에서 찬바람에 눈 흘기고 있다면 반갑겠다.
별서정원이나 서원에 마음이 잇대어 있는 이유이다.
일찍 서두른 탓에 9시 40분쯤 서원 주차장에 도착했다. 영하와 영상 경계를 넘나들던 바람이 막 떠오른 햇살에 조용히 붉어지기 시작하는 시간. 추자장에 잇대어 있는 화단에 뒤태 고운 감색 긴외투 여인이 한창 흐드러진 나비바늘꽃무더기에 바짝 붙어서 연신 카메라를 들이대고 있다. 먼저 온 관광객인가.
해설사의 집 간판을 단 농막이 보이기에 주춤주춤 다가갔다. 꽃무더기를 안은 양 꽃에 코를 박고 계시던 그 여인이 불러 세운다.
건네는 인사가 내 등 뒤쪽에서 비치는 햇살처럼 따사롭다. 마주 인사를 건넸다.
예약 없던 나 홀로 방문객에 선뜻 해설의 은택을 입혀주시겠단다. 찬바람에 굳어지던 손가락이 확 풀어진다.
햇살 쏟아지는 서원 쪽마루를 생각하며 텀블러와 책이 든 가방을 메고 문화해설사님 옆에 나란히 걷는다.
서원이 들어앉은 동네 초입쯤에서 보았던 물길이 너무 예뻐서 해설도 하기 전에 묻기 바쁘다.
"요 앞에 물이 흐르던데 다리도 있고요, 버스가 마침 제 앞서 달리다가 왼편으로 꺾어져 다리를 건너더라고요 그게 얼마나 예쁜지 차를 길가에 대고..."
멈칫하지도 않고 말이 술술 나온다. 전북에서 발원하여 전북에서 끝나는 동진강이란다. 또 하나의 강이 조정래 소설 아리랑과 윤흥길의 기억 속의 들꽃 배경이 된 만경강이다.
무성서원 해설 시작도 전에 사담이 오간다.
섬진강을 좋아하노라고, 나도 그렇다고. 섬진강 어느 줄기를 자주 가느냐고, 나는 곡성, 나는 임실. 손가락이 칠보댐을 가리키며 칠보댐 너머 이쁜 드라이브 코스가 있다고, 나는 섬진강 둘레길이 좋더라고.
큼직한 눈이 순하고 부드러운 시선을 내고 목소리는 나긋하면서 낭랑하니 푸근하다. 정읍사람 해설사와 방문객 사이에 도무지 낯섦은 끼어들 틈이 없다. 내가 알고 지낸 정읍사람은 하나같이 소탈하고 움푹진 푹하지 않는다. 이 분도 그런 느낌이다.
무성서원의 강학공간인 명륜당이 한창 보수공사에 들어가서 볼 수 없었다.
해설은 끝도 없이 깊고 넓어졌다. 고려 최치원 선생으로 출발해서 조선 숙종, 흥선대원군과 서원철폐령, 상춘곡의 불우헌 정극인선생, 면암 최익현, 둔한 임병찬과 의병궐기 등 과거로 거슬러 올라갔다.
진정한 선비란 어떤이를 말하나. 끝질문이었다. 선비에 대한 견해를 서로 조심스레 내놓고 해설이 끝났다.
서원 담장 너머는 여염집이고 집주인은 부지런히 마당에 내려앉은 가을을 손질하고 있었다.
뒷 뜰을 지나 칠보산으로 이어지는 서원 둘레길을 올랐다. 멀리 칠보댐(칠보 수력발전소. 우리나라 최초의 유역변경식 수력발전소)이 한눈에 들었다. 섬진강 상류인 옥정호 물을 끌어다가 동진강으로 흐르게 해서 호남평야에 물을 공급하는 댐.
동진강은 하늘을 그토록 사랑했을까. 서로 닮는다더니 가을 물빛이 시리도록 푸르다.
고즈넉한 무성서원을 홀로 만끽하라고 자리를 비켜주셨다.
천진난만한 어린애라도 되는 양 햇살이 수줍게 내린 툇마루에 걸터앉아 다리를 흔들흔들 앞뒤로 내저었다. 흐르는 이 순간이 아까웠다. 텀블러를 꺼내 차 한잔을 만들고 잠깐 책을 펼쳤다. 소리내어 몇 문장을 툇마루에 띄웠다.
두 번째 목적지는 상거가 한 시간 거리인 장성 필암서원.
한 사람 몫의 샌드위치와 간식, 감사 인사를 건네고 싶었다. 해설사의 집 문 앞에 망설임도 없이 섰다.
노크소리에 문이 활짝 열리고 은은한 커피 향 사이를 채우는 한마디.
"추웠지요? 차 한잔 드시고 가세요."
바닥은 따뜻했고 공기는 좋은 기운으로 빼곡했다. 그렇게 서로 마음속으로 마중을 나갔다.
도시락으로 챙겨 온 것들이 둥근 탁자에 차려졌다. 한 사람은 삶은 계란 껍데기를, 한 사람은 마당에서 직접 딴 단감 껍질을 벗겨내며 눈동자가 흔들렸다.
두 사람의 이야기는 잘 익은 정읍 대봉시처럼 말랑말랑하고 투명했다.
낯선 이와 낯선 이가 마주 앉은 식탁.
블로그와 브런치, 취미활동과 철학서 필사이야기, 최근 발간한 절친의 책과 인문학 이야기, 혼자 여행이 좋은 이유가 우리 사이에 씨줄과 날줄로 촘촘히 짜였다.
신명이 났다. 장성까지 갈 일이 아니었다.
정읍에서 오후를 다 보내기로 했다. 다음 목적지인 김명관 고택 뒤로 신경숙 소설가 고향 깻다리가 메모장에 입력되었다.
급기야 교보문고 웹을 열어 절친의 책을 즉석에서 온라인 구매하는 상황에 이르렀다.
정읍시청 누리집에 칭찬글을 업로드하겠다며 호기롭게 명함을 한 장 얻어 답례를 약속했다.
수줍고도 반가웠다. 고마웠고 뿌듯했다.
그도 나도. 우리는 그랬다.
무성서원 노란 잎이 고운 은행나무 앞마당에서 들려주신 시구이다.
고운 최치원의 추야우중(秋夜雨中)이다.
쓸쓸한 가을바람에 괴로워 읊조린다
이 세상 뉘라서 내 마음을 알아주리,
삼경 깊은 밤 창밖에 비는 내리고,
등불 앞에 초조한 심사는 만리를 달리네
[秋風唯苦吟 世路少知音
窓外三更雨 燈前萬里心]
삼경 깊은 밤도, 우중도 아니지만 함께 보낸 세 시간은 절친같은 진심이었다.
서로의 마음이 들려주는 이야기를 알아주는 낯선 이와 낯선 이.
그곳엔 하늘 닮은 물빛 동진강이 흐르고 있다.
덧)
무성서원을 방문하실 분은
공사가 완료되었는지 확인 후 방문하세요.
공식기간(11월 28일)보다 늦춰질듯 하여
연말로 추측한다고 합니다.
아래는 김명관고택 사진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