찐빵과 두쫀쿠 사이

by 라이테

숫돌에 칼을 가는 동안 눈치가 빨라야 했다. 자주모란꽃이 박힌 양은쟁반을 발돋움으로 잽싸게 꺼내왔다. 우물물 한 바가지를 끼얹고 나니 매끈하고 불룩한 배를 타고 물방울이 흘러내렸다. 한가운데 다소곳이 앉아 있으면 예리한 칼이 몸을 찌르고 들어갔다. 광 한쪽에 몰래 숨어 꿀단지 뚜껑 열 때도 두근두근 이랬다. 칼 끝을 견디지 못해 이내 쫘악 벌어졌다. 소리를 듣는 순간 칼을 든 이도 지켜보던 이도 백기투항하고 말았다. 햇빛을 쏟아놓은 듯 발간 속살에 대칭으로 까만 점이 콕콕 박혔다. 보기만 해도 침샘은 최고속 가동, 그걸 삼키느라 목젖이 방아를 찧었다. 소리와 빛깔이 합동작전으로 공격을 퍼부어댔다.


과자 봉지쯤이야 새로 난 송곳니가 나설 필요 없었다. 이번에야 말로 제대로 힘을 쓸 참이었다. 보기 좋은 떡이 먹기도 좋은 법. 소쿠리에 레이저 광선을 쏘아 빛의 속도로 선별하는 게 선공이었다. 뒤적뒤적 손을 대는 것은 반칙. 투시도를 보듯 아래 것까지 뚫어보는 매의 눈을 장착할수록 유리했다. 이것은 철저히 그 간의 경력과 비례했기에 어릴수록 억울함이 컸지만 감내할 수밖에 없었다. 억울하다고 손을 댔을땐 매서운 손등 공격을 피할 수 없었다. 푸르스름한 게 아직 풋내를 못 벗고 솜털도 손에 묻어나지 않는 딱딱한 것도 좋았다. 살강살강 씹히는 맛이 새뜻했다. 이번에는 봉숭아 물들여줄 때 보았던, 윗집 경자언니 앙가슴 닮은 말캉말캉 뽀얀 속살이 사로잡았다. 먹다 보면 손금을 타고 흘러 팔꿈치께로 단물이 줄줄 새는 무른 것. 볼그족족한 꽃 내음을 속살에 콕콕 새겨놓았는지 한 입 베어물 때 사방으로 튀는 과즙에도 향내가 짙다.

그런데 수박도 복숭아도 아닌, 삼복더위에 왜 하필 찐빵이었을까.




보리 타작을 할 땐 뉘 집이나 하지감자가 새참을 도맡았다. 장마 지기 전에 보리밭도 감자밭도 수확을 마쳐야 했다. 여름 갈증과 허기를 동시에 책임진 것이 어른들에게 막걸리, 아이들에겐 미숫가루였다. 낮은 길고 아이들은 우썩우썩 자랐다. 미숫가루와 감자를 들여놨지만 여름 간식은 금방 동이 났다. 생계에 바쁜 어미는 간식까지 세세히 챙길 수 없었다. 옥수수와 사탕수수가 뒤이어 가세했지만 턱없이 부족했다. 푸성귀나 곡식이 차지한 텃밭에 참외, 수박은 발을 들일 수 없었다. 한여름 더위엔 오이 잎도 혀를 쑥 내밀고 말라비틀어졌다.

방학으로 온종일 어슬렁거리는 장마철 여름풀 같은 자식들의 허기는 '없는 집 제사 돌아오듯'했다. 이럴 땐 곡기를 가득 채워야 긴 오후가 든든했다.




제사 때도 아닌데 광에서 팥자루가 나오면 마음이 두근거렸다. 팥은 전날에 뉘를 골라내고 정갈하게 씻어 불려 놓았다. 새벽 두 세시부터 팥 삶기가 시작되었다. 한 번 포르르 삶은 물을 버리고 다시 물을 부어 삶았다. 물러지는 동안 밀가루 반죽을 치대어 놓았다. 온 집안에 알싸한 팥 냄새가 자욱했다. 팥냄새가 잠결까지 스며들었는지 다른 날보다 일찍 일어났다. 부엌과 마당을 오가는 어머니 곁으로 다가갔다. 수건 쓴 어머니의 이마에는 벌써 땀이 송골송골 맺혔다.

어린 손이 도울 게 있었다. 삶아진 팥을 대나무 소쿠리에 부어놓으면 얼굴보다 더 큰 부채로 한 김 식혀야 했다. 양팔에 번갈아 쥐며 부채질을 시작하면 뜨거운 김이 얼굴로 와락 달려들었다. 어머니 얼굴처럼 내 얼굴도 금방 땀범벅이 되었다.

여름 새벽은 짧았다. 벌써 햇살이 마당에 쇠비름 번지듯 오고 있었다. 부채질이 끝나면 한숨 돌릴 새도 없이 어머니는 팥을 나무 주걱으로 으깼다. 말없이도 척척 아는 어머니와 딸의 협업이었다. 그럴 땐 소쿠리가 최대한 덜 흔들리게 테두리를 바투 쥐었다. 팥이 다 으깨지면 양은 대야에 쏟고 설탕은 나우, 소금은 살살 넣어 달달한 소를 만들었다. 허기가 느껴질 때쯤 한숨 돌렸다.

어머니가 식구들 아침상을 준비하는 동안 나는 도르래샘물을 길어 세수를 하고 닭장 물그릇에 부어주었다. 쥐, 고양이는 강아지 메리가 단속하고 나는 발을 굴러 '메리, 안 돼'를 외치며 킁킁거리는 메리를 단속했다.

부엌에선 경쾌한 도마소리가 나고 격자문을 활짝 젖히면 밤 새 지워졌던 하루 대신 쓰기 공책 한 칸 같은 일상이 다시 열렸다.

이번에는 찜솥에 물을 부어 시루를 안쳤다. 내려놓은 협업을 다시 잇고 찜솥과 시루 사이에 김이 빠져나가지 못하게 시룻번을 붙여야 했다. 밀가루 반죽을 한 덩이 떼어서 양손으로 마주 비벼 지루한 장마처럼 길게 만들었다. 찜솥이 맞닿은 시루에 빙 둘러놓으면 어머니 손으로 꾹꾹 눌러 마감했다. 양은 쟁반에 밀가루를 서리 온 듯 나붓이 흩뿌리고 나면 본격적으로 찐빵을 빚었다. 먼저 어머니가 한 개 분량의 반죽을 선보이면 그때부터 눈대중으로 덩이를 떼어 놓았다. 덩이를 둥글려서 손바닥에 올려놓고 팥소를 넣어 찐빵을 만들기 시작하면 설거지를 마친 언니도 달려들었다. 지루한 과정이 시작되었다. 이런 날 점심과 간식은 찐빵이었으니 옥수숫대처럼 껑충하게 자라는 사 남매가 들락거리며 먹을 분량을 채우는 건 만만치 않았다.

해는 점차 쪽마루를 올라 짙어지고 마당 그늘은 사라졌다. 햇살이 올라탄 어머니 등이 군불 지핀 아랫목처럼 뜨끈해져도 손을 멈출 수 없었다. 여름 팥은 쉽게 시큼해져 빨리 만들어 먹고 끝내야 했다. 먹는 일이야 재빠르지만 만드는 일이 먹는 입을 앞서 나갈까. 마음은 급하고 손은 더뎠다. 김이 모락 오르는 찜솥에서 찐빵을 꺼내는 어머니 얼굴에 땀인지 김인지 분간할 수 없는 물기가 더께더께 얽혔다.


자정 무렵 풋잠으로 끈적이는 하루를 등 떠밀어 보내고 빨랫줄의 덜 마른 옷 같은 하루를 시작한 어머니의 허기는 자식들이 먹는 것만 보아도 채워졌을까. 삼복더위에 찐빵이라니. 내 몸에서 나온 수분을 짜내 찐빵을 익혀 뜨끈뜨끈 채반에 내놓으면 속도 모르는 어린 자식들은 제 입에 넣기 바빴던 시절이었다.




지난 늦가을부터 두쫀쿠가 열풍을 일으키고 원재료 품귀현상까지 이어졌다. 원재료 구매 사이트 오픈런에 성공한 재료들이 다섯 배까지 웃돈을 입고 재판매가 되었다. 두쫀쿠 하나가 소소한 선물 자리를 차지할 때쯤 기어이 두쫀쿠를 만들어보겠다는 딸아이 극성에 보조 역할을 맡았다. 그 시절 어머니 옆에서 두근거리며 찐빵이 나오기까지 조급하고도 설렜던 마음이 두쫀쿠 앞에서는 품절되었다. 처음 보는 식재료와 새 도구들을 마주하니 시작하기도 전에 흥미를 잃었으나 딸아이 등쌀에 신나는 표정의 마스크를 한 겹 써야 했다.

투명케이스에 한 개씩 들어앉은 두쫀쿠는 찐빵보다 더 고독하면서도 찬란하게 높은 값을 쳐 줄 만했다. 그러나 한 입 베어 물면 입 안에서 퍼지는 달달하고 포슬포슬하고 진진한 찐빵의 감촉을 결코 흉내 낼 수 없었다.


세대가 엇갈린 모녀의 뒤치다꺼리가 찐빵에서 두쫀쿠로 이어졌지만 뿌듯함은 그 시절 속으로 다 갈무리되었나 보다. 귀부인 두쫀쿠 앞에서 어쩐 일인지 해미가 뿌옇게 몰려온다. 흐려진 눈앞으로 희끗희끗 밀가루 묻은 힘줄 툭툭 불거졌던 손이 자꾸 우련하게 떠오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