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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라이테 Jul 31. 2024

머리채 잡혀 운 좋은 날

튜브 없이 물놀이 못 하는 중년 아지매

논산과 서천 등 충남지방을 특별재난지역으로 선포하는 결과를 초래한 이번 장마가 완전히 끝이 났다. 지방 소도시이며 도농 복합지역인 우리 도시도 충남과 경계를 둔 인근지역에 홍수 피해가 적지 않았다. 예측할 수 없는 자연재해 앞에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밖에 없는 우리. 재난 앞에서 천재인지 인재인지를 두고 엇갈린 판단들이 있으나 중요한 것은 자연을 거스르지 않고 순응하며 조화를 이루는 것이 결국 우리 삶을 유지하는 비결이 아닐까 한다.


이렇게 장마가 지고 물이 많아질 때 떠오르는 어릴 적 기억이 있다.

그 시절, 아무래도 시골은 도시보다 문명의 혜택이 더딘 게 당연한 일이었다. 사람은 태어나면 서울로 보내라는 말처럼 모든 문명 혜택이 서울 쪽에서 내려왔으니 말이다. 도시에 짤순이와 세탁기가 있을 때 우리는 동네 앞 개울가나 공동 우물이나 마당 귀퉁이 작두샘에서 손빨래를 해야 했다. 큰 빨래는 양쪽에서 서로 끝을 잡고 반대방향으로 비틀어 물을 짜내는 협응력도 필요했다.




장마에 들어설 즈음이면 모내기한 논의 모종들이 제법 자리를 잡고 굵어진다. 비 오기 전 시원하게 불어오는 바람에 흔들리는 키 작은 초록벼들을 보고 있으면 농품잔(농약 품은 컨트리클럽 잔디)은 결코 비교할 수 없는 연초록 희열을 느낄 정도이다. 김태은 시인이 말한 '나무의 눅눅한 그림자까지 초록으로 스며드는 7월'로 넘어가는 시기의 남녘 들판이 이렇다. 별당아씨의 정갈한 가르마같이 줄을 잘 맞춰 나란히 서 있는 초록벼들 사이에는 장마로 맑은 물이 흐른다. 어린 벼 사이에서 찰랑거리는 논물을 박차고 순식간에 뛰어오르는 청개구리에 화들짝 놀라서 가던 길을 주춤하던 풍경이 있는 때이다.

시골 우리 동네에는 동네 앞을 가로지르다 철도교각을 지나 동네 옆 들판 쪽으로 굽어 흐르는 농수로가 있다.

이 농수로를 따라 빨래터가 세 곳 있다. 농수로는 폭이 좁아졌다 넓어졌다 하면서 폭에 따라 수심도 달라진다.  송사리나 올챙이가 헤엄쳐 다니는 걸로 봐서는 아주 맑은 물도 탁한 물도 아닌 보통 농수로였다. 장마철엔 이 농수로 유속과 수량이 최대치를 찍고 연중 가장 맑은 물이 흐른다. 이곳은 어린 우리들의 여름날 핫플레이스였다.




점심을 먹고 나서 감나무 그늘에 앉아 감꽃을 실에 꿰어 목걸이를 만든다. 그것도 시들해지면 공기놀이를 한다. 그러다 해가 저~~ 기 가장 높은 곳에 오르고  담장 쪽으로 기울어진 감나무 그늘이 보자기만 해지면 각자 집으로 돌아간다. 집에 있는 은색 양동이와 대야에 빨랫감과 비누를 담아서 다시 모인다. 이때 신발은 싼마이 슬리퍼나 하얀 바탕에 꽃무늬가 이쁘게 그려진 고무신이어야 한다.  싼마이어야 하는 이유가 있다. 빨래터에서 놀다 보면 자칫 물에 둥둥 떠내려가서 되찾지 못하는  일이 종종 있어서다. 대야를 옆구리에 끼고 양동이를 손에 들고 빨래터로 향한다. 세 곳 중에서 가장 멀고 수량도 많고 수심이 깊어 계단처럼 3단으로 콘크리트 처리된 곳이 낙점되었다. 그곳은 여름 핫플 중에서도 눈치작전이 펼쳐지는 곳이라 빨래하는 사람이 없을 때 재빨리 가야 한다. 지금이 딱 그때다. 언니들이 잰걸음으로 먼저 뛰다시피 가고 동생들은 신발이 벗겨질세라 따라간다.


찬물도 위아래가 있는 법. 자리 좋은 핫플은 주로 언니들 차지. 언니들이 평평하고 빨래하기 좋은 자리를 선점하면 나머지 자리에 꼬붕들이 자리를 잡는다. 언니들의 빨래는 가사를 돕기 위함이요, 나와 친구들의 빨래는 놀이목적이기 때문에 자리 불평이 없다.

빨래터까지 땡볕에 걸어오느라 땀이 났다. 빨래하기 전에 얼른 세수부터 해서 땀을 씻어낸다. 중학생 언니들은 제법 큰 빨래도 척척 해낸다. 그 이쁜 손으로 세탁비누를 빨래에 벅벅 문지르고 조물조물하면 손가락 사이로 거품이 삐져나온다. 앞뒤로 조물조물하다가 거품물이 나오지 않을 때까지 헹군다. 발등에 고무밴드가 세모를 이루는 학교 실내화도 못쓰는 칫솔로 박박 문질러 척척 잘 빤다. 언니에게 얻은 양말짝으로 나도 빨래를 한다. 내가 하는 것은 놀이다. 언니가 그 많은 빨래를 할 동안 고작 양말 몇 켤레를 빨고 헹구고 빨고 헹구고 한다.


자운영꽃

농수로 옆에 이쁘게 토끼풀과 때늦은 자운영이 눈에 띈다. 빨래를 던져놓고 총총총 일어나 토끼풀을 뜯고 자운영을 섞어 이쁜 꽃팔찌를 만든다. 토끼풀꽃이 제법 많아서 친구와 넉넉히 나눠 놀기에 충분하면 목걸이까지도 만든다. 옅게 풍겨오는 향긋한 토끼풀꽃 냄새를 맡으며 물을 첨벙 대고 있으면 언니들이 물 튄다고 눈을 흘겨본다. 그때 단번에 멈추어야 하는데 장난기가 발동한다. 아까보다 더 세게 발을 동동거린다. 물이 언니들 옷에 스며든다. 언니들은 금방 일어설 듯한 표정으로 흰자위가 더 많이 드러나게 째려본다.

토끼풀

그러다가 잠깐 한눈을 파는 사이에 언니가 빨던 오빠 교복 바지가 언니 앞을 떠나서 내가 있는 쪽으로 둥둥 떠온다. 이미 언니가 잡아채기에는 늦었다. 곧바로 내 앞으로 떠내려오면 좋으련만 내 쪽으로 내려오면서 점차 농수로 가운데 쪽으로 흘러간다. 큰일이다. 오빠 교복바지인데  빨래를 건저 내지 못하면... 저녁에 마주할 엄마의 화난 얼굴이 떠오른다. 그 파동이 우리 4남매 모두에게 미칠지도 모르는 중대사안이다. 게다가 내가 장난쳐서 그리 되었다고 언니가 이실직고를 하게 되면... 으악, 정신이 번쩍 들어 망설일 시간이 없다. 무정하게 떠내려가는 것을 붙잡으려고 순간 팔을 뻗는다.


다행이다.


잡았다.


잡은 순간 동시에 풍덩.


발이 콘크리트 빨래터를 떠나 빨래와 함께 자유롭게 유영한다. 물속에 빠진 김에 오빠처럼 시원하게 수영이나 하면 좋으련만 가장자리에서 물장구나 칠 줄 알았던 나는 수영을 못해 허우적거린다. 물속을 들어갔다 나왔다 한다. 희미하게 언니가 애타게 나를 부르는 소리가 들린다. 소리 나는 쪽을 바라볼 정신이 없었다. 그때 머리채를 잡아끄는 손길이 있었다. 코로 입으로 물을 잔뜩 먹은 나는 그제야 고개를 들었고 흘러내리는 물줄기 사이로 구원자를 바라보았다.

어이구!!! 이 멍청이야,

그냥 바닥에 발을 딛고 서면 될걸

그걸 못하고 왜 허우적 대냐?

엄마에게 등짝 스매싱을 당하는 대신 언니에게  머리채를 잡히고 등짝 스매싱을 당했다. 물속에서 나올 때는 조금 민망했다. 일어서니 물 높이가  허리에도 안 찼다. 그래서 무릎을 살짝 구부려 키를 낮추고 비 맞은 족제비가 되어 걸어 나왔다. 언제 그쪽 물이 그렇게 얕았지? 떠내려가던 빨래는 내 목에 걸쳐있었다.

언니는 물에 빠진 머리를 감겨주고 씻겨주었다. 빨래가 끝날 때까지 고무신으로 뱃놀이나 하라고 했다.

강아지풀

고무신 한쪽 끝을 발라당 뒤집어 배를 만들고 거기에 꽃잎 몇 장이나 강아지풀을 뜯어다가 태워 노는 뱃놀이.

물에 빠지지 않았다면 고무신으로 송사리 잡이 놀이를 했을 텐데 아쉽다.

얼마나 다행인가. 그날 우리 언니는 고자질 같은 것은 하지 않는 쿨내 풀풀, 동생 사랑 넘치는 천사였기에 4남매로 번지는 뒤끝 작렬의 여파 없이 깔끔하게 종결되었다. 죽을 뻔했지만 정말 운이 좋았다.

이후로 빨래터는 따라갔지만 물이 많은 장마철에는 빨래터 주변에서 풀꽃놀이나 하고 물수제비 연습을 했다.

 



국민학교 저학년 이후로 더 이상 빨래터 출입을 할 일이 없게 되었다. 언니도 바빠지고 집집마다 상수도시설이 설치되었다. 빨래터는 논일을 마친 어른들이 흙 묻은 농기구나 장화나 팔토시를 씻는 일이 전부였다. 유년을 벗어나면서 기억 속에서도 서서히 사라지고 점차 생활 오폐수가 유입되고 송사리도 이미 떠난 지 오래되었다. 그러나 물에 빠져 허우적대던 기억은 빨래터가 사라졌어도 계속 남아 여름 물놀이를 주저하게 만들었다.

 

 대학 입학 후 첫여름 MT를 속리산 자락 계곡으로 가게 되었다. 계곡물이 깊었다. 그냥 물속에 들어갈 없어서 알록달록 색깔도 고운 튜브를 꺼냈더니 일행들이 모두 박장대소했다. 그러거나 말거나 한동안 물놀이에 항상 빼놓을 없는 필수품이었다. 바닷가에 가서도 선후배, 친구들은 모두 바닷물 속에서 비치볼을 가지고 노는데 혼자 타이어만 한 튜브를 타고 놀았다. 혼자 놀기 심심하다고 말 잘 듣는 남자 후배 몇이 교대로 놀아줬다. 친구들이 새로 생긴 실내 수영장에서 수영을 배울 때 혼자 킥보드판 잡고 물장구만 쳤다. 구명조끼가 필수가 아닐 때도 워터파크에서 꼭 구명조끼를 입고 놀았다.지금도 깊고 검푸르게 창일한 물결을 가까이에서 오래 응시하지 못한다. 그때 그 기억 때문인지는 모르겠다.



덧)

대문 그림

박수근 화백의 '빨래터'입니다.

그림에 관한 상세한 설명을

댓글로 달아주셔서

앙티브 Antibes 작가님의 글을

고정댓글로 올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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