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대학 입시 때 가나다군 모두를 여학교로 지원했다. 나는 여자끼리 모였을 때의 그 무한한 가능성과 반짝거림을 좋아한다. 나는 여학교에서 만난 내 친구들을 좋아한다.
오늘은 그중에서도 가장 애틋한 친구들을 소개하려 한다.
나를 브런치로 소개하고 이끌어준 내가 그의 문하생을 자처하게 만드는 김금장화와
모두 안된다고 할 때도 너는 된다고, 근거 없이 믿어 주는 로맨티시스트 Vague다.
우리 셋, 이라는 결집이 생긴 것은 2015년 겨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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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겨울. 나는 회사에 있었다. 아빠와 병원에 갔던 엄마에게서, 전화가 왔다.
"보호자가 와야 된대."
당시 대학생이던 남동생과, 회사에서 신입은 면한 내가 불려 갔다. 엄마가 아빠 옆을 지키고 있었지만, 병원은 엄마가 이제 누군가의 보호자가 되기엔 너무 늙었다고 판단했나 보다.
"자녀분들 다 오셨어요? 들어오세요"
나는 그때 맨 앞에 가서 앉았다. 어떤 결과가 나오든지. 내가 책임져야 한다고 생각했다. 졸업도 못한 동생을, 이제는 법적으로 보호자일 수 없는 엄마를 내 등 뒤로 숨겼다.
모니터 속에는 PET 결과가 있었다. 암세포를 의미하는 빨간 점이 아빠의 온몸에 찍혀 있었다. 아니, 아빠가 하나의 빨간 점이었다. 백혈병이나 골수종이라면 치료는 받을 수 있다고. 하지만 전립선암이라면 마음의 준비를 하셔야 한다고. 정확한 것은 결과가 나와봐야 안다는 이야기를 듣고. 나는 맨 앞에 앉아서 오열했다. 아빠가 등을 툭툭, 두드려줬다.
우리는 서로 얼굴을 보지 않았다. 우리는 항상 어떤 위기든지 함께 이겨냈다. 하지만 그 날은, 서로를 위해 강해져야만 했고, 그 어떤 때보다 고독했다. 아빠는 의사를 따라 어딘가로 갔고, 동생은 엄마를 모시고 병실로 갔다. 나는 소리 내 우는 법을 잊어버렸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나는 짐승의 울음소리를 내며 병원 건물 밖으로 나와 소리 내 울었다.
결과가 나오기 전은 하루하루를 살아냈었다. 정말 그냥 살아냈었다. 검사 결과가 얼마 남지 않았을 때쯤 내 친구 금장화 선생의 부친상을 접했다. 믿기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때는 vague가 아버지를 보내드린, 초겨울. 그 겨울 끝이었고 아직 날이 풀리기도 전이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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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겨울의 초입의 그날. 나와 V는 단기 파트타임을 하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V는 나가버렸다. 고향에 일이 있어서 먼저 가봐야 해. 어색한 미소를 남기고. 파트타이머들을 관리하던 관리자는 계속해서 말을 흐리더니 퇴근 준비를 하는데, V가 그렇게 급하게 가야만 하는 이유를 말해줬다.
그녀가 학기 중에도 훌쩍 '고향 다녀올게'라고 하고 떠났던 그 길을. 나는 졸업 후에야 처음으로 밟아 보았다. 자기 일에 대해서는 아무 이야기도 하지 않던 V 대신해 동기들에게 연락을 돌렸다.
나는 외동인 vague의 곁을 지켰다. 물론 그가 눈물을 보여줄 만큼 그에게 든든하지도 않았고, 속 이야기를 털어놓을 만큼 믿음직스럽지도 않았지만 말이다. 그래도 그의 친척들에게 눈을 흘기기도 하고, 난생처음 보는 그의 고향 친구들에게 말을 걸기도 했다. 도저히 못 참고 곯아떨어진 순간을 제외하고는 그에게 힘이 되기 위해 노렸했다. 발인이 얼마 남지 않아, 마지막 인사를 드리고 빈소를 떠나면서. 나는 V의 아버지의 사진을 오래도록 쳐다보았다. 인사도 몇 마디 나눴다. 결국 V의 눈물은 보지 못한 채로.
하지만 겨울의 색이 짙어진, 금장화의 때는, 거기까지 가기도 너무 어려웠다. 경북이던 전남이던, 서울 사는 나에게는 똑같이 멀었다. 하지만 나는, 나의 상황은 너무 달라져있었다.
그때는 끼니도 걸러가며 12시간 가까이 일해야 했다. 그러고도 밤에는 아빠의 체온이 올라가면 바로 응급실로 뛰어가야 했다. 당시에는 나도 동생도 운전에는 영 젬병이었으므로 택시를 집 앞까지 불러서, 아빠를 모시고 온 가족이 손을 잡고 한 시간을 달려 서울대학병원 응급실로 향하는 날이 이어졌다. 그러고도 다음날 새벽이 되면 다시 출근을 하러 가야 했다.
그중에서 삼 일을, 아니 단 하루라도 어딘가로 떠난다는 것은 사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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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이 살포시 다가올 때쯤, 아빠가 다행히도 다발성 골수종이고, 치료를 시작할 수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항암치료, 무균실, 자가골수이식. 그게 무엇이든 상관없었다. 우리는 기뻐했다. 마치 병이 다 나아서 퇴원을 하는 사람들처럼. 나는 가족들과 웃고 축하하며 병원을 나섰다. 그와 동시에, 금장화가 떠올랐다. 내가 아빠의 곁을 지키느라 찾아가 보지도 못한 금장화의 고향. 나는 지금까지도, 금장화에게 무엇으로도 갚을 수 없는 부채감을 가지고 있다.
평생을 도시에서 살아온 나는, 언젠가 지나가는 말로 배에서 낚시를 하고 바로 회 처먹는 데에 로망이 있노라 했다. 그런 나에게 금장화는 아버지에게 배가 있으니 언제라도 바다로 갈 수 있다며 초대해주었다. 금장화를 꼭 닮은 그의 아버지와, 새벽에 배를 타고 낚시를 하는 상상을 나는 참 많이도 했었다. 그의 아버지는, 내가 누구든지 간에 딸의 친구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아침에 잠을 포기하고, 나를 배에 실어, 낚시를 시켜주고, 손수 회를 쳐줬을 분이었다. 아무런 망설임 없이 나를 초대하는 금장화에게서, 나는 그것을 보았다. 하지만 나는 그분과 한 번도 만나지 못했고, 심지어 중요한 순간에 그의 딸에게 힘이 돼주지도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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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부터인지 모르겠다. 동기들 중에서 우리 셋만 카톡방을 파게 된 날이.
난 그 카톡방을 판 날, 그 방 이름을 이렇게 붙였다.
"인생은 실전이야 존*나"
이 말은. 이 상스러운 말은, 내가 힘이 들고 지칠 때 그 어떤 말보다 힘이 된 말로, 금장화가 농담처럼 했던 말이었다.
어느 날 금장화가 독서모임에 나갔다는 소식을 전했다. 자기 계발서를 주로 읽던 리더(대학생)가 모임의 취지를 발표하며 인생이 뭔지, 삶이 뭔지 일장연설을 하길래 속으로 '인생은 실전이야 존 마나'라고 읊조렸다고 전했다. 나는 그런 그가 정말 멋있었다.
그리고 그 말이 이상스레 힘이 됐다.
아빠는 나를 강하게 키웠다. 아빠가 입버릇처럼 하시는 말씀이 "내가 가르쳐주지 않으면 세상이 너에게 가르쳐준다"였다. 세상의 온갖 더러운 규칙들을 알려줘야만 내가 현명하게 피할 수 있다는 뜻이었다.
하지만, 영영 모르고 사는 사람들도 있다는 것을, 세상의 더러운 규칙에 치이던 시점에 알게 됐다. 혼인 적령기가 된 내 친구들은 시부모님이 사주신 아파트에 친정 부모님이 해주신 고급 승용차를 주차했다. 그들에게 세상은 아무것도 가르쳐주지 않았다.
물론 그들에게도 나름의 사정이 있고 무게가 있으리라. 하지만 부모님이 편찮으시고, 결혼을 하기엔 지금 살고 있는 집 대출금을 해결해야 하고, 부모님의 생계를 책임지고 있는 나와 바꾸자고 하면, 바꿀까?
"인생은 실전이야 존*나"
아버지의 치료가 진행되고, 조금씩 좋아지기 시작하면서. 아무것도 좋아지지 않는 나의 생활에 대해 불만이 쌓이기 시작했다. 어린 시절부터 미리 가르친다고 나를 혹독하게 대해놓고서는, 나를 혹독한 세상으로 내보낸 아버지가 원망스러웠다. 그 모든 원망이 나를 잠식하려 할 때마다 마음속으로 외치는 말이 바로 그것이었다.
'인생은 실전이야. 존 마*'
아버지가 편찮으심을 어쩔 수 없이 알려야 하는 순간들이 있었다. 아빠가 좀 안 좋으셔서요.
실전을 살고 있는 나의 박복한 친구들은
그들의 불행 앞에 감히, 미안한 마음으로 전한 내 근황에
어디서 듣고 온 항암 성공 사례들을 줄줄 읊었다.
'별일 없을 거야, 괜찮아지실 거야.' 그런 막연한 희망 따위는 내게 아무런 위로가 되지 못한다는 것을 그들은 이미 체득하여 알고 있었다.
그 이후로도 줄줄이 사탕처럼 엮여 오는 사건사고와 고통들을 그들은 이미 다 알고 있다는 듯이
담담하게 받아들였고, 필요한 정보를 건넸다.
나의 ㅈㅁㄴ 친구들은 앞에서 끌어주고 뒤에서 밀고 있다.
나는 지금도 글을 쓰다 막힐 때는 나의 금장화 선생을 찾아간다.
아무런 결실이 없어 힘들 때는 V에게 문자 한다.
그들은, 나보다 더한 실전을 경험한 그들은 내게 말한다.
"잘하고 있다"라고.
주변의 그 어떤 위로보다도 더 위로가 되고
그 어떤 사람들의 인정보다도 더 큰 힘이 된다는 것을 그들은 알까.
이제 곧 알게 될 것이다.
내 브런치에 올리는 글을 누구보다도 먼저 보고 있을 것이기 때문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