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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송어 Nov 21. 2019

미달이의 고함.

외할아버지에 대한 단상 1

외출을 하고 돌아왔는데 내 이름이 쓰인 봉투가 아무렇게나 놓여있었다. 

할아버지의 봉투였다. 

옛날 회사 생활을 한 사람들이 명함만큼이나 많이 준비해놓는 자신의 이름이 인쇄되어 있는 봉투. 


-이거 어디서 났어? 

-아 서랍에 있길래 꺼내서 가계에 보탰다. 

아빠는 별생각 없이 말했다. 사실 별일 아닌 일이었다. 우리는 현금통을 같이 놓고 쓰니까. 

하지만 나는 계속해서 되물을 수밖에 없었다. 

-... 이걸 왜 뺐어. 할아버지가 마지막으로 주신 건데. 

그 말을 끝으로 화장실에서 숨죽여 울었다. 


사실 부모님은 없는 살림에 없는 슬픔을 느끼게 해주지 않으시려고 금고를 항상 열어두셨다. 우리 가족에게 사유재산이란 존재하지 않는 개념이기는 했다. 

하지만, 그 봉투는 아니었다. 


2년 전 할아버지의 상을 치르고 첫 명절-설에 할머니가 준비하신 봉투였다. 

할머니가 눈물로 꾹꾹 눌러쓴 나의 이름 석자. 

할머니는 "마지막으로 할아버지가 주시는 것이니 받으라"며 손주 아홉 명 모두에게 봉투를 나눠주셨다. 

나는 할아버지의 큰 손주, 첫 손주로서. 

손주들 중에서 중년의 할아버지와 가장 가까이 살던 아이로서. 

손주들 중에서 노년의 할아버지와 가장 오랜 시간을 지낸 아이로서. 

자손들 중에서 말년의 할아버지에게 가장 가까이 앉아 있는 사람으로서.  

"저 취직하고 나서는 할아버지가 세뱃돈 안 주셨는데요" 

장난스럽게 말하면서도 흐르는 눈물을 참을 수는 없었다. 

그리고 나는 그 돈을 평생 쓰지 않은 생각이었다.








내가 지금도 학을 떼는 시트콤이 있는데 바로 '순풍산부인과'다. 

순풍산부인과의 원장 오지명의 장녀 미선은 변변치 못한 남자를 만나 남편과 친정에서 산다. 

지명은 사위 박영규와 영규의 딸 미달의 가정까지 책임지는 가장이다. 

영규는 지명 앞에서는 기를 펴지 못하고 산다. 


내가 이 시트콤을 질색하는 이유는, 내 상황이 미달이와 다르지 않았기 때문이다. 

아무런 멋을 내지 않고 하나로 묶은 포니테일에, 사시사철 헤어밴드를 하고 다니는 것은 물론이고. 

외할아버지 집에 얹혀살고 있는,

기죽어있는 아버지가 있는,

가난한 집의 장녀. 


애석하게도 나는 미달이 처럼 당당하지도, 잔망스럽지도 않았다. 

나는 내 현실을 깨닫고 너무 빨리 어른이 된 아이였다. 사람들이 걱정하는 정도의 어른스러운 아이. 너무 빨리 어른이 돼버린 아이. 그게 나였다. (넌 어른 같아서 너무 징그러워,라고 말한 어른도 있었다.)




내 유년시절의 할아버지는 다정한 분은 아니었다. 마치 시트콤의 오지명 씨처럼 그는 사회적으로 성공한 사람이었다. 오히려 더 나을지도 모른다. 내가 태어나고 병원에서 집으로 떠날 때, 그는 기사를 대동하고 고급 세단을 끌고 나를 데리러 왔다고 한다. 그는 공기업의 중역이었다. 고졸 출신인데도 승진 시험에서 1등을 차지한, 회사 내에서도 전설적인 인물이었다. 할아버지는 자신 스스로에게도 엄하고 완고한 사람이었다. 


하지만 나는 할아버지의 사랑을 느꼈다. 

내가 태어나기 전부터 우리집에는 할아버지가 준비하신 고급 아기 용품이 즐비했다고 한다. 심지어 너무 들뜬 할아버지는 유치원생이나 쓸 법한 교구까지도 미리 사놓으셨다고 했다. 그것들은 내 밑으로 여덟 번째 아이까지 사용할 정도로 튼튼하고 좋았다. 그건 한 다섯 번째 아이가 물려받아 쓰고 있을 때 알게 됐다. 약간 삐걱거리는 아기그네에 기름칠을 하며. 나는 그 모든 애들 중에서 내가 제일 할아버지의 사랑을 받는 아이라는 생각을 했던 것 같다. 잠시 동안 할아버지를 독점한, 유일한 아이.  





할아버지는 사실 굉장한 로맨티시스트였다. 

할머니는 그 시절에 그러하셨듯, 다른 형제자매를 위해 본인의 교육의 기회를 포기했다. 비극적 이게도 할머니는 희생정신만큼이나 호기심이 많고, 학구열이 높은 사람이다. 할아버지는 신혼 때 할머니에게 직접 알파벳과 영어를 가르쳐주셨다고 했다. 당신이 나보다 머리가 더 좋다고,  거듭 칭찬하셨다고. 어린 시절의 내가 들었다면 전설처럼 들려오는- 저 사람이 밤이 되면 여우로 변한대 같은- 신화적인 이야기로 그쳤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연세가 드시고 표현이 더 자유로워진 할아버지는 가끔 우리를 불러 할머니가 정말 예쁘지 않느냐고도 하시고, 너희 할머니가 얼마나 지혜로운지 아냐고 하셨다. 


할아버지는 말년에 했던 얘기를 계속 반복하셨는데, 레퍼토리 중 하나는. "우리 *큰 공주, 어쩌면 이렇게 예쁘지?"였다. (*엄마도 어린 시절 이름을 불린 적이 없다고 했다. 할아버지의 첫 아이였던 엄마도 항상 큰 공주였다. 둘째/셋째 공주는 없었던 것 같다. 무조건 큰 공주. 그래서 큰 공주를 부르면 나와 엄마가 모두 돌아보는 상황이 벌어지기도 했다.)

결과에 따라 조건부적인 사랑을 보여주는 아버지와는 다르게, 무조건적인 사랑을 주는 분이었다. 물론 아버지와 할아버지가 아이에게 가지는 마음이 같을 수는 없다는 것은 안다. 

그래서 더 이제 이 세상에 나를 무조건적으로 사랑해 줄 수 있는 사람은 없다는 것을 뼈저리게 느꼈다.






박정희 시대에 공기업 중역이었던 할아버지는 많은 뇌물과 청탁의 유혹에 놓여 있었다. 당시에는 공기업 중역을 뇌물로 넘기면 오지에도 전봇대를 세우고, 전선을 이을 수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할아버지는 그 어떤 뇌물도 받지 않았다. (못난 자식 중 하나는 그것이 아버지로서의 직무 유기라고 하더라마는.) 


일제시대 때 군인이셨던 할아버지의 아버지와, 세무서에서 근무하셨던 할머니의 아버지는 뇌물을 받고 수탈에 앞장서기 딱 좋은 위치였다. 하지만 해방 이후에 마을 사람들이 몰려와서 문패를 고쳐줬다고 한다. 군인이셨던 증조부는 일본인들의 눈을 피해 척박한 땅을 개간하여 마을 사람들에게 나눠줬고, 세무사셨던 외증조부 역시 일체 뇌물을 받지 않으시고 오히려 민원인을 도와줘서 한국 사람들 사이에서 명망이 높았다고 한다. 두 분이 서로에게 장남을, 장녀를 내어주었던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나의 할아버지는 그 정신을 제대로 이어받은 분이었다. 때문에 뇌물-그때 당시에는 문제의식이 적었던-을 받은 동기들에 비해 턱없이 가난했다. 건설업자를 소개해주려는 사람에게 위트 있게 거절하기 위해 집 평수를 10배로 불려서 말했지만, 사람들이 납득을 하고 돌아갈 정도였다. 남들보다 그만큼, 가난했다. 


하지만 그 청빈함은 할머니를, 엄마를, 그리고  나를 매료시키기에 충분했다. 

나의 가난은 더 이상 아빠의 무능에 의한 것이 아니었다. 할아버지의 지조와 절개, 양심이 만들어 낸 훈장 같은 것이었다. 

나는 내가 태어난 해에 지어진 그 집에서 유치원에 입학했다. 초등학교 시절에는 '내 방'을 가지기 위해서 그 집에 유일한 3룸인 반지하에서 살았다. 초등학생 때, 서울에 물난리가 났던 해에 "지하에 사는 사람 손 들어봐"라는 무심한 질문에, 무심하게 손을 들었었다. 담임과 아이들은 나를 불쌍한 눈으로 쳐다보았다. 나는 순간 손을 들지 않은 다른 지하방 사는 아이를 봤고, 이것이 부끄러운 일이라는 것을 알았다. 하지만 나는 고개 숙이지 않았다. 엄연히 할아버지 집에서 살고 있는 것뿐이니까. 반지하라 사람들의 발이 보이고, 무례한 사람들이 들여다보는 일이 종종 있었지만 괜찮았다. 나는 할아버지 집에서 할아버지랑 살고 있는 것뿐이니까. 

나는 굉장히 예민하고 눈치를 많이보고, 자격지심도 심하다. 전형적인 잘못 자란 가난한 집 아이. 그런데도 너무 크게 의기소침하지 않게 자라지 않은 것은 할아버지가 지켜온 명예와 할아버지가 쌓아 올린 것들 덕분임이 분명하다. 



수많은 미달이 중의 한 사람으로서 말한다. 

미달이는, 슬프지 않다. 미달이는 할아버지의 2층 집에서, 할아버지의 큰 티브이로 깔깔거리며 티브이를 본다. 

미달이는 눈칫밥을 먹지 않는다. 할아버지는 미달이를 사랑하니까. 상황이야 어찌 됐든 내 손주 미달이를 가까이서 보는 매일매일은 할아버지에게는 즐거움일지도 모른다. 아니 적어도 미달이에게는 할아버지와 함께 지내는 매일매일이, 어른이 된 이후에도 자양분으로 남아있을 것이다.   



내가 존경하는 인물이라는란에 쓰는 인물은 나이가 변하면서 계속 바뀌지만, 할아버지의 자리는 항상 공고하게 지켜지고 있다. 그것도 항상 맨 앞자리에. 

나의 팬 네임 이송어는 내가 가장 존경하는 나의 외할아버지의 성을 따온 것이다. 앞으로 내가 다양한 장르의 글을 쓰게 되고, 다양한 이름을 쓰게 되더라도 앞 글자 역시 바뀌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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