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도 집에 엄마 있거든!
나는 기본적으로 물욕이 없는 사람이다.
엄마가 한 번은 없는 살림에 무리해서 문방구를 데려갔던 적이 있다. 동생이 한창 유행하는 로봇을 두 개 놓고 고심하는 중에. 나는 인형을 만지작만지작, 꼬물꼬물 거리다가, 작고 밋밋한 학종이를 골랐다가. 그마저도 내려놓는 어린이였다.
그래서 성인이 된 지금은 무언가 가지고 싶다는 생각이 들면 바로 사려고 노력한다. 내가 또 수많은 이유를 찾아내서 결국엔 포기하기 전에. 취향이란 것을 알기도 전에 형편이란 말을 배워버린 내가 이제는 나 스스로에 집중하기 위해.
그날도 그런 날이었다.
나를 위한 선물-이라는 로맨틱한 문장보다는, 나의 한계를 또 하나 깨버리러 나가는 그런 날.
일을 마치고, 가장 가까운 백화점으로 향했다.
월급이 들어온 것을 확인했다. 남자 친구는 크리스마스 선물을 주노라 약속했고, 선물을 고를 수고가 사라지는 것에 즐거워했다. 모든 준비는 완벽했다.
물건을 사야 한다는 당위성, 물건을 살 수 있는 경제적 여력, 그리고 충분한 고민까지.
일단 사기로 마음먹었으면 큰 시간을 들이지 않는다. 그것이 나의 쇼핑 철학이다.
'없어 보이기' 싫어서 결정을 빨리 해버려야 한다는 중압감도 있다.
-저... 죄송한데 이쪽 분이 지금 구매하신다고 하셔서요.
내가 하고 있던 목걸이를 아까부터 흘끔거리던 모녀가 기어이 '우리가 먼저 봤다'며 소유권을 주장하고 나온 것이다.
두 직원들의 당황함이 보였다. 나는 목걸이를 '양보'하기로 했다.
그들은 꽤 오랜 시간, 많은 디자인을 놓고 고민하고 있었다. 그들이 보지 않은 디자인이라는 것이 있기는 할까, 싶을 정도였다.
그런데 내가 구매 결정을 하니까 그제야, 남의 목에 걸린 후에야 목걸이를 빼앗아 가다니.
사실 엄밀히 말하면, 그 목걸이 때문에 그렇게 화가 난 것은 아니다. 그때 느낀 상실감은. 그들이 내 목걸이를 빼앗았다는 점 보다도, 그 목걸이를 가져간 사람이 '모녀'이기 때문이다.
나는 엄마와 데이트를 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기 때문이다.
아빠가 퇴원을 하고 엄마는 급속도로 컨디션이 나빠지더니 "파킨슨 증후군"이라는 병을 얻었다. 근육이 퇴화되어 움직임이 자유롭지 않은 병인데. "파킨슨 병"보다 그 질이 나쁘다. 파킨슨 병은 원인이 어딘지를 알기에 약물로 어느 정도 증상이 완화된다. 하지만 증후군은 그 원인이 뭔지도 알 수 없어 별다른 치료법이 없다. 파킨슨병 환자가 병실로 걸어 들어갈 때도, 증후군 환자인 엄마는 부축을 받으며 힘겹게 한 걸음씩 내디뎌야 한다.
엄마의 병이 점점 심해지면서, 엄마는 남의 손을 잡지 않고는 걸을 수 없게 됐다. 사실 자력으로는 걸으려고 시도조차 하지 않는 점이 악화를 부추겼으리라 생각한다. 나는 그런 엄마를 참을 수가 없았다. 솔직히 말해서, 나는 엄마가 자력으로 할 일이 계속해서 없어지는 것이 불안했다. 아빠는 엄마가 너무 안쓰러워서 엄마의 수족처럼 움직이고 있기 때문에 아빠가 없는 틈을 타, 엄마를 데리고 아파트를 나섰다.
평소에는 잘 가지 않는 길로, 엄마를 다그치며 달래며 산책이란 이름의 고강도 트레이닝을 했다. 엄마는 필사적으로 나의 손에 매달렸다.
-엄마 잠깐만 놔봐. 세 걸음만 걸어보자.
-안돼.
실랑이가 계속됐다. 나는 엄마의 손을 뿌리치고 앞으로 걸어가 버렸다. 엄마가, 원망이 서린 눈으로 나를 쳐다봤을 때. 내가 그런 엄마를 두고 다섯 보나 더 걸어가버렸을 때. 그때 떠올랐다. 나의 손을 잡아주지 않던 엄마의 모습이.
돌아보면 나는 예민한 기질을 가진, 불안정 애착을 형성한 아이였다. 키우기 성가셨으리라 생각한다. 돌아보면 내가 유치원생이 됐을 때 즈음에, 엄마는 거의 한계에 달한 것 같다. 나는 엄마의 손을 잡고 걷는 것을 좋아하는 아이였고 엄마는 매우 싫어했다. 나의 불안정 애착은 꽤 오랫동안 해결되지 않았다. 나는 초등학생- 중학생 때 까지도 나는 엄마와 스킨십을 하고자 했고 엄마는 엄하게 혼을 냈다.
-나이가 몇 살인데 아직도!
엄마의 체온이 사라진 손끝의 차가움 만큼이나, 가슴이 차가워졌다. 내가 정말 엄마의 재활을 위해 이렇게 걸어와버린 것인지. 아니면 기억조차 못하던 유년의 무의식이 나를 치졸하게 만든 것인지. 분간이 되지 않았다.
나는 그 날 이후로 엄마와 외출을 하지 않았다.
엄마의 컨디션과는 별개로 내가 내 스스로를 끊임없이 의심하고 질문하느라 머리가 복잡했다.
엄마랑 같이 그 백화점에 가서 그 목걸이를 보고 있었더라도 그 목걸이는 내 차지가 아니었을 것이다. 평화를 사랑하는 엄마는 기분 좋게 양보해줄 분이다. 2주가 아니라 한 달을 기다리라고 했어도 개의치 않았을 분이다. 하지만 내 옆에는 엄마가 없었다. 위로해줄, 나를 다독여줄 엄마가 없었다.
엄마랑 다니면서, 내가 가질 수 있는 것을 빼앗아 가다니. 내가 돈으로 사려고 했던 행복이 철저하게 무시당하는 기분이었다.
집에 와서 엄마에게는 누가 내가 고른 물건을 가져가서 그냥 집으로 돌아왔노라며 분통이 터지는 척했다. 억장이 무너지는 것이 티 나는 것보다는 분통이 터져 보이는 것이 낫겠지. 나는 재빨리 방으로 들어와서 남자 친구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리고 소리 죽여 울었다.
-나도 엄마 있는데... 나도 엄마 있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