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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송어 Oct 18. 2019

참을성과 호구, 그 사이 어딘가에서

서른이 가져온 나의 강단에 관하여

우리 집은 나를 제외하고는 내 동생을 합쳐, 모두가 평화주의자다. 가진 것을 빼앗기더라도 가진 것이 적은 것에 감사하는 그런 사람들이다. 우리 집에서는 내가 제일 '싸움꾼'이다. 새벽 세시에 이웃이 소리를 지르며 노래를 불러도 아버지는 '네가 참아'라고 하시고 어머니는 '이웃끼리 조금씩 배려하자'라고 하는 부창부수의 커플과 '나는 안 들리던데?'라는 마음 넓은 동생의 콜라보에서 '참을성이 부족한'나는 조금 힘든 삶을 살아왔다.

우습게도 서른을 기점으로 내가 나에게 가장 맘에 드는 부분은 더 이상 참지않는다는 점이다.


엄마가 거동이 불편해진 후부터 엄마나 나가던 몇 개의 친목계 중 하나는 정말 감사하게도 매 번 모임을 우리 집에서 하고있다. 얼마전 모임에서 주요 이슈는 단연 우리 집에 새로 오신 요양보호사님, 정확히 말하자면 지난 보호사였던 A 씨에 대한 성토 대회였다. A를 알던 사람은 그에게 실망했다고 하고, 그를 모르던 사람은 정말 '한대 치고 싶었다'라고 말했단다.

지난 요양보호사였던 A 씨는 우리와도 25년 이상 알고 지낸 우리 동네 토박이다. 뿐만아니라 동네에 있는 수많은 계의 '돼지엄마'로 활동하고 계시는 핵인싸다.



요양 보호사 서비스는 식사, 목욕, 집안 청소에 말동무까지 할 일이 세분화되어있어 체계적인 서비스를 해준다. 보호사의 가사 도우미화되는 경우가 많아 우리도 어디까지 부탁드려도 될지 알기 쉬워 좋았다.

우리가 신청한 시간은 세 시간, 주 6일이었다. 지금 계시는 보호사님 기준으로 쉴 시간 없이 빡빡한 스케줄이다. 아무리 쉬시라고 권해도 일하는 손을 멈추지 않으신다.


반면 A 씨의 첫 일과는 소파에 앉기였다. 어쩌다 점심 식탁에 숟가락을 놔주면 '원칙적으로는 숟가락도 한벌만 놓는다'는 말을 했다. 매일 해야 한다는 청소는 로봇청소기 버튼 하나를 누르는 것으로 대체했다. 화장실 청소는 쓰레기통 비워주기에 그쳤다. 어딘가 청소한 날에는 티가 났다. 아무렇게나 대충 열어놓고 간 세제통으로 오늘은 여기를 청소한다고 했구나, 하는 짐작만 할 뿐이었지만 말이다. 사실상 그분이 집에 가고 난 뒤에 하는 뒤처리가 더 많은 날도 있었다. 적어도 자기가 코 푼 종이는 자기가 치우고 갔어도 이 글을 쓰지는 않았을 것이다!





A 씨에게도 우리 가정이 나쁘지 않았으리라 생각한다. 세제통을 열어놓고 가도 아무도 불평하지 않았고, 그가 일하는 세 시간 중 한 시간은 엄마의 낮잠시간과 겹쳐 혼자 거실 소파에 누워 티브이를 봤다. 산책도, 목욕도, 식사도 우리는 부탁하지 않았다. (비린맛이 나는 카레를 만든 이후로 아빠가 주방에는 얼씬도 못하게 했었다.) 그럼에도 그가 이런 꿀 직장을 포기하는 데는 나의 예민함, 부족한 참을성의 공이 컸다.


그날은 일주일을 앓다가 아버지의 도움을 받아 겨우 병원에 가기로 한 날이었다. 나의 엄마는 거동이 불편하기 때문에 요양보호사가 오기까지는 아무 데도 갈 수 없는 상황이었다. 그날은 20분을 늦게 왔다. 평소 10분 정도는 늦어도 별말하지 않았지만, 그날은 웃으며 "오늘 또 늦으셨네요"라고 했다. 나는 부모님께 말해서는 아무것도 해결되지 않는다는 30년 간의 선험적 연구를 바탕으로 그 누군가가 저지하기 전에 치고나갔다. 그리고 약간의 설전아니 설전이 있었다. '내가 늦어서 네가 불편하니?'라고 노여워하는 그에게 정중하게 상황을 설명하고 제시간에 와주십사 부탁했다.

그럼에도 A씨는 분이 안풀렸나보다. 병원에 다냐와서도 화장실을 들락날락 거리며 쓸개즙을 토하고 나온 나를 불러 세웠다. 자기가 '성질 같아서는' 당장 그만두려고 했다는 것과 '딸년'이 난리를 쳐서 서럽다는 말도 덧붙였다. 그 정도면 참았을 수도 있다.

옆에 있는 엄마를 붙들어놓고 엄마에게 '불쌍하다'고하지만 않았어도, 아니면 내가 나가자마자 엄마가 있는데도 전화로 소리소리 지르며 다른 일자리를 찾아봤다는 말만 하지 않았어도 말이다.

아버지와 남동생, 어머니에게서 각각 훈계를 당했다. 각각 '네가 그 말을 해서 상대가 받을 상처' '상상할 수 없는 무례함' '네 일이 아니니 신경쓰지말라'는 말들이었다. 서른이 되지 않았다면 나는 후회하고 반성하고, A 씨에게 사과했을 수도 있다. 하지만 서른이 된 나는 물러설 필요를 느끼지 못했다. 이대로라면 우리는 '호구'잡힌다. 그는 거동이 불편한 나의 엄마를 인질로 잡고 있는 셈이다. 결국 센터에 직접 전화해서 보호사를 바꿔달라고 요청하기로 결심했다. 다행히도, 그전에 그 보호사는 사직 의지를 밝혔다.


그리고 어떤 일이 벌어졌냐고? 센터에서는 사실 그 보호사가 평가 때마다 너무 엉망이라 고민 중이었다고 했다. 그리고 그 보호사는 지금까지도 새 가정으로 배치받지 못하고 있다.


나에게도 쉽지는 않은 선택이었다. 우리 집에서나 싸움꾼이지 학부시절 내 별명은 생불이나 처용이었다. 고3 때도 층간 소음을 일으키는 위층 사람에게도 마지막 까지 정중히 대했으며 사장이 남자인 회사에 취직했다고 하니 "몸 팔러 간다"라고 했던 고모들에게도 웃으며 인사하는 사람이다. (고모와의 에피소드는 재밌는 것이 많으니 나중에 풀기로 하겠다.) 하지만 이번에는 엄마의 안전과 직결된 문제였기 때문에 참을 수 없었다.

나를 향한 가족 내 여론은 좋지 않았지만, 평소에도 나에 대한 여론은 좋은가? 안 좋다. 잃은 것은 없다. 다시 돌아가도 같은 선택을 할 것이다.


엄마 모임 사람들이 A 씨에 대해 하는 이야기를 들으며 평소 같으면 뭔가 첨언을 했을 아빠도, 장난으로 받아쳤을 동생도 오늘은 묵묵히 숟가락질만 했다. 나는 그들의 민망함을 고려해 "거봐! 내가 뭐랬어" 라던지 비아냥거리고자 하는 마음을 억눌렀다.

우리 가족은 내가 참을성이 없고 예민하다고 하지만, 그건 정말 모르고 하는말이다. 나는 이렇게나 많이 참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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