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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송어 Oct 20. 2019

해방가로서의 그분을 추모하며.

내 젖꼭지에게 자유를 준 당신께. 

먼저 나는 1년 이상 우울증 약을 복용 중임을 밝힌다. 

얼마 전 우울증으로 생을 마감한 아이돌 멤버의 죽음 앞에서 사람들은 '상상조차 못 했다'는 이야기를 한다. 자기 신념이 있었고, 자신에게 다가오는 악플들을 '이겨내는' 모습을 보여줬기 때문이다. 

하지만 우울증을 앓는 사람들은 생각한다. "우울증이란 게, 원래 그렇답니다."


나는 그 그룹이 처음 데뷔할 때 기사가 기억난다. 모두 떨어서 제 기량을 발휘하지 못했지만, 그분은 긴장한 느낌 없이 숙련된 퍼포머로 역할을 다했다는 내용이었다. 그 기자는 그 멤버를 보고 그 그룹의 가능성을 봤다고 했다. 다음 무대에서 다른 멤버들 역시 제 기량을 펼쳤고 난해한 콘셉트에도 불구하고 탄탄한 마니아 층을 확보했다. 

하지만 몇 년이 지나고 해당 멤버의 '불성실' 이야기가 나왔다. 춤을 대충 춘다고, 팬서비스를 대충 한다고. 그 '여'아이돌은 공개연애를 시작하고, sns에 자신의 연애담을 올렸다. 그냥 그 또래 청춘들이 할 만한 것들을 올렸다. 그렇지만 사람들은 그가 어떤 옷을 입는지. 아니 입지 않는지를 가지고 따졌다. 


나는 그 멤버의 sns를 팔로우한 적이 없다. 태생적으로 나랑 연관이 없는 사람의 이야기에 큰 관심이 없다. 하지만 그녀의 피드를 모두 안다. 수많은 어뷰징 기사들이 그분의 포스팅을 하나하나 기사거리로 만들어 올리기 때문이었다. 나는 그의 젖꼭지가 보이는지 안 보이는지 관심이 없었다. 알고 싶지도 않았다. 그가 어디에서는 브라를 입고 안 입는 것에 대해서 나는 하등 관심이 없었다. 그래서 브라렛을 입었다. 사실 아예 벗어던졌어야 옳지만, 나는 그분에 미치지 못하는 소심한 사람이었다. 


정말 놀랍게도, 브라렛 1회 차에 고모에게서 핀잔을 들었다. (나의 고모들은 정말 특이한 사람이다. 정말로. 만난 지 30초 만에 사람을 그야말로 화나게 할 수 있는 기술자들이다. ) 

-너 뽕 좀 하고 다녀라. 초등학생도 아니고 그게 뭐니. 

나는 애석하게도 친탁을 했다. 외탁을 했으면 이런 일이 없었을 텐데. 외갓집에서 살다시피 한 어린 시절 나는 성인 여성은 모두 b컵이 되는 줄 알았다. 그게 아니란 것을 깨달은 것은 친가 집 잔치에 가서였다. 


나는 나름대로 유머러스하게 '이 상황이 매우 불쾌하니 그만하자'라고 이야기를 했다. 하지만 그것이 고모의 심기를 건드렸다. 내가 아니라 고모의 심기를! 

그렇게 살면 잠이 잘 오냐고 물어봤다. 고모 입장에서는 조카의 가슴 걱정을 해주다가, 무례한 사람으로 구분된 것이 싫었나 보다. 고모는 나에게 절연을 선언했다. 그 사람 딴에는 매우 결연하게 말했지만, 나는 너무나 행복했다. 알고 지내봤자 좋을 것이 없는 사람. 나에게 있어서 그 사람은 그 정도뿐이었다. 나는 신이 나서 친구들에게 브라렛의 효용에 대해 문자 했다. 이만한 효용이 없다.

그런데 만약, 그분이 이런 어젠다를 만들지 않았으면 나는 브라렛에 도전할 수는 있었을까?


그분이 나에게 끼친 선한 영향은, 그분에게 게 까지 끼치진 못했던 것 같다. 그분은 가진 것이 많고, 잃을 것이 더 많은 분이었다. 마치 브라 끈에 차는 땀처럼 그분에게 달라붙었고, 브라 끈이 살을 파고들 듯 그분을 파고들었다. 그분의 그 선구자적 행동 덕분에 나는 싫은 사람을 떨쳐냈지만, 그에게서는 아무것도 떨쳐내지 못했다. 






다시 우울증 얘기로 돌아가자. 양극성 장애라는 것이 있다. 흔히 말해서 '조울증'이라고 불리는 이 병은. 익히 아는 대로 조상태와 울상태가 2주 정도 주기로 옮겨간다. (그러니까 그냥 감정 기복이 심한 사람들이 '난 조울증이 있나 봐'라면서 자신의 무례를 남에게 이해해달라고 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여기서 정말 위험한 것은 조상태라고 한다. 무언가 할 수 있을 것만 같은 느낌에, 용기를 가지고 자살을 택한다. 많은 사람들이 당황하는 부분이 바로 여기다. 이 병이 없는 사람은 잘 이해가 되지 않을 수도 있다. 그래서 나의 경험을 토대로 설명하겠다. 우울증의 큰 양상 중의 하나인 '무기력'은, 정말 사람을 무력하게 만든다. 나의 경험에 미루어 나는 이 세상에서 아무 쓸모가 없는 것처럼 느껴지고. 숨 쉬는 게 아깝다. 왜 숨을 쉬지. 갑자기, 숨이 멈춰서 죽어버렸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아니 죽음도 사치처럼 느껴진다. 이불 밖으로 발 한쪽을 내미는데 300킬로의 철근을 옮기는 것 같은 힘이 든다. 몸을 일으키다가 눈물을 흘린 적도 종종 있다. 그런데 이게 병으로 인한 것이라는 것을 모르면 더더욱이나 스스로가 너무 의지가 약하고 무능력한 존재로 여겨져 자기혐오의 굴레에 빠지게 된다. 

그러다가 조금, 조금 괜찮아져서 출근을 한다. 이것저것 일을 해결하면서 출근을 하다 보면. 달려오는 지하철 불빛이 따스해 보이거나, 달리는 차 사이로 들어가는 것이 갑갑한 마음을 뻥 뚫리게 해주는 시원하고 스릴 넘쳐 보이는 스포츠처럼 느끼게 한다.



내가 주변에 친한 친구들에게 우울증이 있다고 밝히면서 가장 후회했을 때는. 네가 그렇게 힘든지 몰라줘서 미안하다고 우는 친구 앞에서였다. 아니, 누군가가 뭘 해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이것은 오롯이 자기 자신의 싸움이다. 

그래서 그분의 sns에 들어가서 선플 하나 남기지 않은 내가 죄책감을 가지는 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는 일이다. 물론 이렇게 그분을, 감히 이름조차 부르지 못하면서 추모하는 것 역시 아무 의미가 없는 일이다. 그래도 오늘은, 감사드린다는 말을 전하고 싶어서 이렇게 글을 쓴다. 아주 운이 좋으면 그분 같은 누군가에게 이 글이 닿아서 내가 그분에게 못했던 지지가 닿을수도 있을것이라 자위하며. 

비겁하고 소심한, 아직도 브라렛을 이용하는 나는 겨울을 기다린다. 내 젖꼭지에게 완전한 자유를 주기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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