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송어 Oct 22. 2019

스무 살, 아빠를 죽일뻔했다. (1)

갱년기와 우울. 내가 우울로 병원을 가기까지.

사교육 시장에 종사하시던 부모님의 영향으로, 우리 집은 항상 학생들이 많았다. 내가 엄마에게 지어준 별명은 '모모'다. 미하엘 엔데의 그 모모. 엄마 앞에서는 어떤 학생도(가령 문제아라고 낙인찍힌 아이도) 곧잘 자기 이야기를 술술 풀어놓고는 한다. 

엄마는 모모답게 잘잘못을 판단하지 않고 들어주시는 편인데, 그럼에도 제동을 거시는 부분이 있다. "오늘 엄마/아빠랑 싸웠어요"라고 하소연하는 학생들에게는 꼭 "부모 자식 간에 어떻게 싸우니, 네가 대든 거지"라고 말씀하셨다. 

우리 집에서는 부모와 싸우는 일은 없었다. 젊은 시절, 나의 부모님은 합리적이고 이성이 통하는 분이었다. 자신의 잘못을 인정할 줄 알고, 자식들의 지적도 겸허히 받아들였다. 싸울 일은 없었다. '자식 이기는 부모 없다'라는 속담은 우리 집에서는 의미 없는 이야기였다. 


어쩌면 나에게 부모에게 복종은 생존과 직결된 문제였다. 사교육 시장에 종사하는 부모를 둔 아이들은, 자기가 반항하면 그 사업 자체가 흔들린다는 것을 안다.

한편으로는 어려운 경제 위기들을 오롯이 몸으로 받아내고 아무것도 남지 않은 부모에게, 착한 자식만큼은 가지게 해주고 싶다는 생각이었다. 이 좋은 사람들에게 무언가 좋은 것 하나는 있어야 한다는 생각이었다. 나는 굉장히 순종적인 아이로 성장했다. 


하지만 아버지의 갱년기가 들어서고, 우리의 관계는 삐걱거렸다. 그 시기는 나의 수험 시기와 맞물렸다. 

아버지는 내가 고등학생 때부터는 병적으로 내 일거수일투족을 '관리'하려 했다. 화장실에서 후다닥 나오지 않는 한은 찾으러 오기 일 수였다. 내 나름대로는 아버지에게 모든 것을 맞췄다. 나의 수면사이클, 식단, 통학 수단까지도. 물론 이 부분에서 아버지와의 기억이 정반대로 갈린다. 

결과는 참혹했다. 나의 성적은 계속해서 떨어졌고, 수능 성적은 내 인생에서 본 그 어떤 시험보다도 가장 낮은 점수를 기록했다. 사실 나는 내 수능이 망할 것이란 것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아빠는 폭주기관차 같았고 그 어떤 것으로도 아빠를 막을 수 없었다. 학습된 무기력. 지금 생각해보면 그랬던 것 같다. 


내가 안 가겠다고 우긴 대학에 엄마는 등록금을 내버렸다. 그때 당시에는 '엄마가 불안해서'라고 하셨지만 나중에야 '또 일 년을 서로 으르렁거리는 것을 더 이상 두고 볼 수가 없어서'라고 하셨다. 아빠가 예상치 못한 대학에 들어가고 나에 대한 아빠의 관심은 차갑게 식었다. 얼마나 차가웠냐 하면 내가 들어간 대학 이름을 1년이 다 되도록 못 외울 정도였다. 


보란 듯이 놀면서 쳤던 두 번째 수능은 성공적이었다. 그 와중에 꼬박꼬박 나가던 대학교 성적도 좋았다. 나는 그것을 '아빠가 내 인생에 도움이 안 된다'는 것에 대한 증명이라고 생각했고 아빠는 '이상하다'라고 의아해했다. 아빠의 교육 인생 통틀어 내가 제일 실패작이긴 했다. 원래 '공자님도 제자식은 못 가르친다'는 말이 있지 않은가. 


아빠는 기억조차 못하는 것 같지만, 하루는 수능을 망친 것에 대해 나에게 미안하다고 하면서 우셨다. 나는 더 이상 아빠가 틀렸다는 것을 입증하기 위해 내 인생을 파괴하는 일을 그만두기로 했다. 아빠가 사과도 하고 인정도 했지만, 심지어 울기까지 했지만 상상한 것만큼 통쾌하지 않았다.

대신에 나는 주체적인 삶을 살기 위해 노력했다. 나의 홀로서기는 성공적으로 가는 듯했다. 아빠의 갱년기가 오기 전까지. 





아빠의 갱년기는 아무도 갱년기인지 모르게 다가왔다. 평소보다 화가 많고, 갑자기 울컥울컥 하는 게 있긴 했다. 하지만 남성에게도 그렇게 강하게 갱년기가 오는지 몰랐고, 아빠는 또래보다도 젊게 사는 편이었으므로 정말 아무도 몰랐다. 사실 사춘기라고 딱히 봐주는 게 없으셨기 때문에 갱년기를 그렇게 요란하게 겪으실지 몰랐던 것도 한 몫한다.

사실 이러니 저러니 해도, 40대까지의 아빠는 '딸바보'였다. 동생이 소외감을 느낄 정도로. 그리고 갱년기는 아빠를 딸 천재로 만들었다. 




딸 천재라는 말을 있게 한 짤. 




내가 집에 들어와 있지 않으면 짜증을 냈으며, 집에 있으면 불러다 짜증을 냈다. 

그날도 아빠의 눈치를 보고 있었다. 집 밖으로 나가는 아빠에게 

"어디가?"

라고 물었다. 정말 그게 다였다. 

아빠는 갑자기 화장실을 다녀오시더니

"너 때문에 나가서 죽는다고 하려고 했어!" 

라고 소리를 질렀다. 

나는 엄마와 소파에 앉은 채였고 나만큼이나 엄마도 당황했다. 아빠가 발작적으로 나에게 화를 낸 경우가 처음은 아니었다. 가끔 눈물 콧물 쏙 빼야만 그만두는 경우도 종종 있긴 했다. 하지만 이것은 훈계도 아니고 훈육도 아니고, 정말 화풀이에 불과했다. 그것도 아무도 원인을 모르는 화.


아니, 나는 알고 있다. 나는 아빠의 오른팔, 미니미라고 불릴 정도로 아빠를 잘 이해하는 사람이다. 나는 아빠가 나에게 발작적으로 화를 내는 이유를 알고 있다. 나는 아빠가 너무나 싫어하고 절대 사랑하지 못할 사람을 너무도 닮았다. 아빠, 스스로를 말이다. 


그러다 아빠가 병원에를 갔다. 어느 날부터인가, 아빠가 정신과 약을 먹고 있다고 엄마가 귀띔해줬던 기억이 있다. 검진표를 작성하고 의사를 만난 날 의사 선생님은 "죽지 않고 살아있어서 다행이라고, 그 마음 잊지 마시라"라고 했다고 한다. 아빠는 중증의 우울증을 앓고 있었던 것이다. 

아빠가 치료를 받기 시작하고, 나는 죄책감에서-아니 중증의 자기혐오에서- 약간 벗어났다. 아빠를 죽일뻔했다는 생각이, 그때 내 마음속 깊이에 들어있었던 것 같다. 나는 내가 정말 뭘 잘못해서가 아니고, 아빠의 병 때문이었다고 생각했다. 지금도, 끊임없이 생각한다. 그때 내가 잘못한 것이 아닐 것이라고.  


그 이후 꽤 오랜 시간이 지난 후 내가 우울증에 걸리고, 아빠가 나에게 "아빠가 뭘 어떻게 해줬으면 좋겠어?"라고 했을 때. 나는 목구멍까지 "그냥 죽고 싶어"라는 말이 올라온 것을 느꼈다. 나는 그날 나에게 소리 지른 아빠를 감정적으로 이해했다. 아 이런 강렬한 충동이었구나. 


다행히도, 나는 그 말이 얼마나 큰 상처가 되는지 알기 때문에 가까스로 삼켰다. 당시에는, 격정적인 마음에 똑같은 상처를 주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동시에 똑같은 실수를 하고 싶지 않다는 생각이 그것을 눌러버렸다. 정말 감사하는 일이다. 아직도, 내가 그 말을 뱉어버리지 않은 것을. 내가 아빠에게 상처 주지 않은 것을. 


동시에 나는 내 가까운 사람들에게 상처를 주기 전에 병원에 가야 한다는 생각을 했다. 아빠가 그랬듯이, 나 역시도 누군가에게 상처를 줄 수 있었다. 내가 날 제어하지 못한 상태에서. 그것도 가장 가깝고 약한 사람에게.

 

우울증이 발현했을 때, 가장 안 좋은 결과는 자살이라 생각할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결국 나를 가장 아끼는 사람을 다치게 한다. 나는 빨리 병원에 가야 한다는 생각을 했다. 

누군가를 다치게 하기 전에. 나는 빨리 병원에 가야 해. 






그렇게, 3년이 넘는 시간이 흘렀다.  


(글은 이어집니다) 





작가의 이전글 해방가로서의 그분을 추모하며.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