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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체리 Nov 22. 2024

하이고, 간 떨어질 뻔했네!

수요일과 연희동의 존재에 대하여

채원, 나 이사가…ㅠㅠ 같이 뜨개…


진동이 요란하게 울린 폰 화면으로 절묘하게 잘린 친구 유진의 메시지가 떠올랐다.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손을 쓸 수가 없는 상황이라 눈으로 급하게 화면을 쫓으며 그녀의 다음 메시지 일부를 읽는다. 남편의 일 때문에 이사를 가야 한다는 내용이었다.


여자가 가장 공주 같을 수 있는 날, 식에서 입을 드레스를 대여하는 샵을 고르는 드레스 투어란걸 하고 있는 날이었다. 그런 날, 한동안 뜨개하는 내 옆에서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어줄 거라 생각했던 유진이 이사를 간다는 청천벽력 같은 선언을 듣고 만 것이다. 서울 내에서의 이동이라면 그녀 역시 시간과 품을 기꺼이 내어 먼먼 연희동까지 뜨개를 하러 달려왔겠지만, 용인 아주 안쪽으로 가버려 우리의 뜨개 데이트를 더 이상 이어갈 수 없을 것 같다고 했다.


지금까지 여러 차례 글을 통해 고백했으나 나의 수요일은 일종의 치유의 시간이자 심리치료 활동과 같은 것이었다. 그런데 그 시간에서 가장 핵심적인 친구 유진의 존재가 빠진다니, 그러면 그 시간은 ‘치유’로서 ‘치료’로서의 역할을 하지 못할 것임이 분명했다. 



공허한 마음에 웨딩드레스를 만지고 입으며
꿈결 같던 마음이 뚝 떨어져 현실세계로 돌아왔다.


시선으로는 반짝이는 실크 원단과 비즈들을 쫓으면서도 현실의 공간과 아득하게 유리되는 기분이었다. 지금 드레스 샵을 어디 할지가 문제인가, (여전히 문제긴 했지만) 머릿속은 그보다 큰 수요일의 행방에 더 가있었다. 과연 친구 유진의 존재 없이도 내가 이 취미를 꾸준히 해나갈 수 있을까? 치열하게 고민했지만 결론은 아니다.


뜨개라는 행위를 분명 사랑했으나 그 사랑의 한편에는 함께하는 이와의 수다와 정 따위의 것들이 크게 자리하고 있었다. 그녀가 없으면 누가 먼저 도착해 내가 애정해 마지않는 산미 높은 드립 커피를 사다 줄 것이며, 때로는 역으로 그녀의 커피를 사며 설레는 순간을 박탈당할 것이 아닌가.


집으로 돌아와서도 침대에 누워 한참을 고민했다. 그녀 없이 노력해 볼까, 말까. 잠에 스르르 드려던 무렵, 다시 한번 핸드폰이 울려왔다.


나 3월에 이사 갈 것 같아서 뜨개 할 수 있을 것 같아!


아주 덜컥했던 일이 무색하게, 그녀의 이사 선언은 잠시 보류가 되었다. 덕분에 저 지구 밑바닥 내핵까지 떨어졌던 심장이 다시 솟구쳐 제자리로 돌아왔다. 조금 더 늦추어 이사를 가게 됐다는 그녀 덕에, 마침 종료됐던 수강증을 다시 연장하기로 했다. 다행이다, 다행이야. 우린 아직 작별의 준비가 되지 않았다.




유난히도 칙칙한 수요일 아침, 연희동으로 향한다. 다시 그 안온한 공간으로 향할 수 있어 너무 다행이라고 행복해했다. 그 새 연희동은 크리스마스 분위기로 가득 찼다. 연희동은 어떤 계절에도 독보적으로 아름답다. 지금까지 너무나 당연했던 수요일과 연희동이 보장됨에 새삼 안도한다. 최근 결혼 준비로 이런저런 비용을 지불할 일이 많아지며 겨우 10만 원 하는 수강증 결제도 잠시 고민이 됐다. 하지만 박탈(할 뻔한) 경험을 계기로 당연히 지불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심리치료 비용으로 치환하자면 아주 몹시 저렴한 금액이며 기꺼이 지불해야 할 금액이다. 거기서 내가 얻는 심리적 만족감과 일상의 윤택함을 생각한다면 더더욱!



다시 약 3달, 중간에 낀 연휴들 덕에
13주의 시간 동안 나를 지탱해 줄 
수요일이 보장된다. 


어느 때보다 기쁜 마음으로 늘 우리가 앉던 가장 앞 책상에 앉아 뜨개를 해나갔다. 서로 얼마나 놀랐는지 모른다며, 격앙된 목소리로 대화를 주고받는다. 그녀 역시 이 수요일을 존속할 수 없음에 슬펐다 했다. 그 사이 유진의 목도리도 제법 길어졌고, 나의 뜨개감 역시 제 모양새를 갖춰가고 있었다. 평소 같으면 지루하다며 한탄했을 반복적인 도안에도 씩씩하게 떠나간다. 우리는 앞으로 새로운 13주 동안은 ‘옷’을 떠보겠노라고 약속했다.


그날은 들뜬 우리의 마음만큼 강의실도 어수선했다. 인사를 주고받았던 아주머니께서 교실 모두에게 과자를 두 개씩 건네주셨다. 추워진 날씨에 제법 난이도가 있는 편물을 뜨고 있는 이들이 늘어나, 온 구석에서 쉴 틈 없이 선생님을 불렀다. 이 소란과 다복한 분위기가 난 정말 좋다. 어쩌면 나는 뜨개보다 이 공간과 시간에 매료되어 뜨개인이 되어버린지 모른다. 얕고 느슨한 연대로 이어진 이 강의실이 주는 안정감, 정말 좋네.


내가 사랑하는 수요일 아침의 모습, 매뉴팩트 커피를 마시며 친구 유진과 함께 뜨개를 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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