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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 오는 날엔 땡땡이 좀 칠게요!

새하얀 연희동에서 뜨개 땡땡이치기

by 체리

뜨개 초보의 고군분투 뜨개 일상

작가소개.
리틀포레스트 같은 삶을 사는 게 소망이었고, 최화정씨 같은 명랑어른이 되는 게 꿈이었는데 그것들에 한 발짝씩 가까워지는 중. 매일 달라지는 계절에 맞춘 작은 미(美)식을 즐기고, 조금씩 나아가는 뜨개에 그 뜻을 두며 살고 있다.


눈을 뜨니 별안간 온 세상이 하얗다.


아직도 날이 덥다며 더디 오는 겨울을 그리는 타령을 한지 며칠 되지도 않았는데 눈이 내렸다. 속없이 내뱉은 말에 대한 자연의 응징일까, 어마어마하게 역대급 폭설 수준으로 쏟아부었다. 어디 만화영화에서나 본 모양새로 온 세상 나뭇가지에 두터운 하얀 자락이 드리워진 비현실적인 풍경이다. 아주 잠시 꿈을 꾸고 있는 걸까 생시를 살핀다.


하필 이런 날 뜨개 수업이 있다. 오늘은 오지 않아도 된다고, 친구 유진에게 연락할까 하다가 ‘그녀는 다른 일처리를 하고 출발할 거라 늦을 예정’이란 메시지를 보내왔다. 그렇다면 나도 덕분에 준비를 해봐야겠지.


나의 뜨개방은 연희동 안자락에 위치해 있다. 어떠한 교통수단을 이용해 가더라도 몇 차례 갈아타고 굽이굽이 들어가야만 하는 동네다. 눈이 두텁게 쌓인 길에는 자동차 바퀴가 닿는 자리만 거무죽죽하다. 지저분하게 녹은 도로를 헤치고 마을버스를 타고 연희동에 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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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촌에서 연희로 가는 길, 단풍 위로 폭설이 내리는 꼴은 상상도 못한 풍경이다


연희동은 참 신기한 동네다,
온 계절의 변화가 면면이 드러나는 곳,
온 계절의 모든 모습을 품는 동네.


뜨개방 앞뒤로는 높지는 않아도 제법 으리으리한 주택이 빽빽이 있었는데, 신기하게도 대부분의 집 마당에 그 집 크기만큼이나 커다란 대봉 감나무가 있었다. 잘 익은 대봉이 여전히 숱하게 열린 나무 위로 눈이 두터이 쌓여있는 생경하고도 이색적인 풍경이 펼쳐진다. 만화에서 봤더라도 ‘에이- 현실 고증이 안 되었네’하고 코웃음을 쳤을 것 같다. 그 옆에는 아직도 한아름 은행잎을 달고 있는 나무 위로도 눈이 한가득이다.


전날 밤 질리도록 내린 눈이라 오늘은 더 이상 안 오는 줄 알았는데, 하늘에 구멍이라도 난 것처럼 신촌역에서 연희동으로 이동하는 내내 너풀너풀 춤추며 내리는 눈송이가 끊임없이 이어진다. 우산을 미처 챙기지 못해 어젯밤 보송하게 감았던 머리 위로, 뽀글뽀글 퐁신한 무스탕 위로 눈꽃이 잠시 앉았다 사라진다. 오랜만에 어린아이처럼 기쁜 마음이 든다, 동시에 ‘넘어지며 안된다’는 긴장으로 온몸에 힘이 들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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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처럼 눈이 내리고 쌓이는 연희동의 어느 날.


건물에 들어서자 따스한 온기가 얼굴에 훅하고 와닿는다. 눈송이를 훅훅 털어내며 따스한 강의실로 입장!

안녕하세요!

이 것이 이 수업에서 막내를 담당하는 나의 역할이 아닐까. 날씨 때문인지 수업에 참여한 인원이 대폭 줄었다. 평소에는 양손가락 가득 꼽도록 앉아 있어야 했을 인원이, 오늘은 나를 포함해도 네 명뿐이다.


늘 고정석처럼 앉는 선생님 바로 앞자리는 커다란 통창 옆에 붙어 있어 바깥 풍광을 한눈에 담을 수 있다. 뜨개가 지루해질라치면 고개를 우로 돌려 바깥에 보이는 사람들의 움직임, 자연의 변화 따위를 감상할 수 있는 VIP 석이다. 지난 4개월 간 연희동을 오고 가며 올망졸망한 주택가에 살면 모든 계절을 눈에 어여삐 담을 수 있다는 걸 알게 됐다. 더불어 이 동네에서 살아보고 싶다는 진한 열망도 생겼다.


여름 끝자락이면 탐스럽고 진득하게 달린 능소화가 온 동네를 휘감는다. 어김없이 뜨거운 햇볕 아래서 선홍색의 꽃을 눈과 카메라에 담으려 모두가 유난이다. 가을 역시 아름답다. 하늘 가까운 끝부터 서서히 물들어가는 은행과 단풍, 또 이름 모를 나무들의 주차별 변화를 담는 즐거움이 있다. 가장 기대하지 않았던 겨울에는 또 다른 장관이 있었다. 제 색깔이 알록달록 다양한 연희가 반쯤 하얀 융단으로 뒤덮였다.


매 계절 액자 틀을 갈아 끼우는 듯
한 폭 한 폭 새로운 풍광이
다음 뜨개날을 기다리게 한다.


덕분에 반복적으로 흘러가던 일주일에 분기점이 생겼다. 서울 도심에선 미처 제대로 느끼지 못했던 온 순간의 변화가 증폭되는 동네, 그래서 수요일이 좋다. 내가 흘러 보냈던 계절을 조금 더 움켜잡고 느낄 수 있는 공간인 것 같아서 말이지. 내가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뜨개를 하고, 한 켠으로는 ‘유진이는 언제 오지’ 하던 찰나에 조금 늦게 도착할 거라던 유진은 결국 땡땡이를 칠 거라 선언했다.


든 자리는 몰라도 난 자리는 안다더니, 유진이 없으니 뜨개 하는 내내 영 허전하다. 역시 나는 뜨개를 핑계 삼아 애정하는 친구와 대화를 나누고 싶은 콩고물에 관심이 더 컸나 보다. 안 그래도 지루하다고 징징 대던 뜨개감을 던져두고 코바늘 뜨개를 시작하려 애써 새로운 도안을 펼쳐 들었다. 코바늘로 뜨는 작품은 대개 작은 소품류가 많아 몇 시간만 숭덩숭덩 떠나가도 결과물 형태가 얼추 완성된다. 그래서 내가 더 즐기는 뜨개의 형태인데, 오늘의 무료는 코바늘 도안을 펼쳐드는 민간요법으로도 수습이 불가했다. 바깥으론 눈이 부시게 아름다운 눈송이들이 쉴 새 없이 내려앉아서 도무지 마음이 잡히질 않았다. 엎어지면 코 닿을 거리의 카페에 친구 유진이 자리 잡았다고 했다.


쌤! 저도 오늘 땡땡이요!


수업을 듣는 언니, 아주머니는 너무 정이 없으니까, 언니라 하자!, 들이 웃음을 푸핫 터뜨렸다. 발걸음을 재촉해 친구 유진의 옆에 앉았다. 항상 시키던 산미 높은 드립커피를 시켜두고 옆에서 뜨개감을 펼쳐든다.


그래, 이거야. 이 안정감을 원했어. 근래 있던 고민거리를 펼쳐두며 그녀와 이야기를 나눴다. 아니, 그녀가 나의 하소연을 들어주었다. 이렇게 내 일상을 미주알고주알 알고 있는 존재는 그녀가 유일해서 확정된 그녀의 이사가 다시금 아쉬워졌다.


눈이 내리니 비로소 겨울 같고, 크리스마스 같다 (벌써?)


그래도 그녀 없는 연희에도 적응하겠지,
눈 오는 날이 눈이 시리도록 아름다워 그 부재를 원치 않다가도 금세 적응할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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