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뜨개 초딩들, 방학은 이제 끝이에요

문어 뜨기 공법을 멈추는 법

by 체리


방학이 마칠 때면 모든 초딩들이 바빠진다. 약 2개월 정도의 기간 동안 발생한 온갖 재미난 이야기를 일기장에 담으려면 손 옆면이 짓눌려 아프도록 연필을 굴려야 한다. 엄마에게 그간 있었던 일을 묻고, 때로는 일자를 바꿔 방학 동안 발생한 온갖 일을 콜라주 하는 경험을 하게 된다.


요즘에도 이런 광경이 펼쳐지려나?


어떤 시간의 묶음을 갈무리하기 위해 이렇게 종료되는 지점이 꼭 있어야만 한다. 빙빙 돌아 이런 말을 꺼낸 이유는 올 늦여름부터 호기롭게 뜨기 시작한 짝꿍의 목도리를 아직도 뜨고 있다는 말을 하려 했다. 연 내에는 꼭 완결된 형태로 주고 싶어서 나름 열심히 뜨고 있었지만 3호 대바늘로 떠야 하는 아주 얇은 캐시미어 실로 구성된 목도리는 떠도 떠도 그 끝이 나질 않는다. 13단을 뜨고, 한번 꼰 뒤 다시 13단을 떠나가는 아주 반복적이고 단순한 구성. 하지만 바늘과 실이 얇아 되려 손에 더 힘이 많이 들어가서 줄곧 떠내기 힘든 구조다. 보통은 두어 시간 떠야 2번쯤 꼴 수 있는 식이었다. 시간을 의도적으로 내어 떠야만 하는데 바쁜 일상을 살아가는 현대인에게 이런 시간은 쉽게 얻어지는 것이 아니다.


사실 이런저런 핑계를 차치하고 속도가 안 나는 도안은 손이 가질 않는다. 그래서 조금 더 훌렁훌렁 떠지는 형태의 두꺼운 실을 활용한 도안, 코바늘 따위로 눈을 돌리게 되는 것이다. 결국 문어발처럼 여러 도안을 늘어놓고 하게 돼버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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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스로 정한 일종의 마감일인 12월 중턱이 가까워질수록 마음이 급해졌다. 연초에 사귀기 시작한 우리는 곧 있으면 2주년이 된다. 전년부터 연말에 여러 기념일을 한 번에 챙기고 있어 12월 중턱에 다시 한번 기념 여행을 떠나기로 했다. 이 여정에 직접 뜬 목도리를 건네주겠다는 호기로운 목표로 속도를 내어 뜨기 시작했다. 그러니까 내겐 그 여행이 방학의 끝인 셈이었다.


변변찮은 목도리가 없는 짝꿍에게 짠-하고 목도리를 둘러주고 싶은데, 연말도, 또 이 기나긴 겨울도 금세 끝나고 말까 봐 겁이 났다. 사무실에 오가는 지하철 안에서, 혼자만의 타임어택처럼 ‘이번에 2줄 뜨고 내리자’는 결심을 하고 바삐 손을 움직이고, 잠자리에 들기 전 침대에 비스듬히 누워 졸린 눈을 끔뻑대며 뜨개를 했다. 장장 3개월의 시간 동안 뜬 길이보다 바쁜 마음으로 일주일간 뜬 양이 압도적으로 길었다. 이미 내 팔을 두 개 이어 붙인 길이만큼 떴지만, 키가 큰 짝꿍에게 주려면 아직도 갈 길이 한참이다. 아, 내 방학은 이제 끝이어야 했는데... 어쩔 수 없이 나만의 방학을 한 차례 연장하기로 한다.



연말까진 꼭 떠서 둘러주자!


이미 기념일을 위한 여행은 코앞으로 다가왔다. 한참 전부터 ‘목도리 떠줄게-’하고 떵떵 소리치던 나는 그에게 대신 좋은 브랜드의 목도리를 구입해 둘러 주었다. 여전히 나는 곧 있으면 끝날 것 같은 결과물을 두고 밤마다 씨름 중이다.




많은 뜨개인들이 점점 커지는 작업물로 인해, 한 도안으로 지속하는 건 지루하니까 수개의 도안을 펼쳐두고 문어다리처럼 뜨게 된다. 어느 하나 끝내지 못한 채 그저 그 과정을 반복하게 되는 거다. 그 와중에도 예쁜 도안과 실은 자꾸만 나오니까 우리의 다리는 또 하나 늘어나기 마련이다. 그러니 뜨개도 이렇게 끝을 정해두고 방학숙제를 마무리하듯 해야겠다.


IMG_0427.HEIC 나의 문어다리 1. 코바늘로 뜨고 있는 동물인형


뜨개가 갈 대상을 만들고, 그 기한을 정해 쉴 틈 없이 떠서 문어다리를 다 처단해 주겠어!

2-30년 전 단련된 실력 덕분인지 한 차례 미뤄두었던 방학 끝이 다가온다. 시간제한이 있는 상황에서 무언가 해내는 경험은 온몸의 세포가 깨운다. 손을 바삐 움직이는데 참 우습고 재미났다. 이렇게 즐거운 숙제라면 할 만하잖아!


ps. 성인을 위한 목도리 등을 뜨개 선물로 주겠다는 큰소리는 하지 말자. 완성할 때쯤 뜨고 있음을 공개하는 것도 방법이겠다.


숙제를 앞둔 초딩은, 친구들과의 여행길에도 뜨개감을 챙겨 떠났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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