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지에 따라 그리고 함께 하는 사람에 따라 여행의 느낌은 확연히 달라진다.
어느덧 이 멤버들(?)들과 제주도를 오게 된 것이
아마도 4번째쯤 되는 듯하다.
가족이다 보니 나이가 다르고, 성별이 다르고, 취향이 다르다.
그러다 보니 통상적으로 4박 5일 타이트하게 돌아보면 다 볼 듯 한 제주도의 여행은 어느 한 곳만 바라보다 가는 것처럼 느껴진다. 그래서 기억은 단순하게 하루정도 다녀온 듯 한 기분으로 남겨지고
제주도를 다녀왔다고 말하면 돌아오는 질문들인 ‘우도는? 성산일출봉은? 바다는?’과 같은 내용에는 답을 할 수 없게 된다.
출발 몇 달 전 크로아티아에서 만났던 분이 제주도 미술관과 박물관 그리고 맛집, 숙소 등등을 알려줘서 기재해뒀건만 계획은 계획일 뿐이다
서울에서 아마도 가장 뜨거울 것 같은 수요일이다.
이벤트 오픈일을 좀 당겨보려 했으나 말일보다는 초가 더 이벤트에 적합할 것 같다는 암묵적 이유로 내 휴가 시작일에 이벤트는 오픈되고, 생각지도 못했던 돌발적인 상황들을 수습하느라 공항까지 택시로 이동해야 했다. 느낌상 택시는 지하철보다 느렸고 택시 안의 공기는 후덥지근한 선풍기 바람과 같이 훈훈했다.
공항에 내려 렌터카를 찾고 숙소 근처로 이동하다 보니 어느덧 저녁 먹을 시간이다.
식당에 들러 식사를 하고 나니 무언가를 더 하기에는 여행의 멤버 구성이 너무 다양하다.
숙소로 들어가 체크인을 하고 나니 엄마의 체력이 바닥을 보인다.
더위 때문이리라.
그래서 간절하게 바라는 조카의 부탁은 내일로 미루고 이른 취침을 취해보지만 바뀐 잠자리는 쉽사리 잠이 오지 않는다. 모기만 없다면 밤 산책이라도 해볼 텐데 말이다. 여행을 좋아하는 내 마음과는 달리 모순적으로 내 몸은 환경과 타협하지 않는다.
다음날. 내 허기는 모든 가족들을 소집하게 만든다. 늦은 시간도 아닐 텐데 식당 입구의 줄이 길다. 관광객이 많은 피크 시즌임을 느낀다.
뷔페는 눈의 욕심만큼 식사시간을 늘려놨다.
여행의 묘미인 걷기를 좋아하지 않는 조카는 숙소에서 진행하는 all day 프로그램에 들어갔다.
나와 함께 새벽 수영을 못 해서 마음이 엄청 서운한 채로 들어가고 있다. 저녁 수영은 꼭 해야겠다며 내게 다짐을 요청하나 조카의 컨디션에 따라 수영하기는 달라진다.
조카를 들여보내는 동안 나의 이른 wake up call로 인해 모두 잠을 설친 관계로 잠시 낮잠을 자기로 했다. 휴가란 것은 원래 이런 거라며...
낮잠 자기 등을 잘 못 하는 나로서는 엄마를 꼬드겨 숙소 앞 바닷가 산책에 나서 본다. 훕! 더운 공기가 폐 속으로 기습공격을 하고 비겁하게 30분을 버티지 못하고 다시 숙소로 돌아온다.
모두들 낮잠에서 깨어날 동안의 짧은 시간 동안 난 혼자 방황을 한다.
지난번 여행 때 저녁이라 못 들어갔던 성판악을 우선 가기로 했다. 1시가 조금 지났으나 입산 금지라는 푯말이 붙어 있다. 어차피 긴 등산을 계획한 것이 아니라서 잠시만 둘러보게 해달라고 요청했으나 안 된다고 한다. 알고 왔으면 헛걸음을 안 했을 텐데 하는 생각이 나지만 뭐 늦은 생각이다. 점심도 먹어야 하기에 지난번 여행에 다녀왔던 짜장면집을 갔으나 여기도 여름휴가임을 느끼게 해준다. 3시가 다 되어가는 시간인데 식당은 사람들로 붐비고 있고, 그로 인해 음식의 질은 많이 떨어져 있었다. 그래서 사람들이 다녀간 시점에 따라 후기가 달라지나 보다.
스벅에 아포가토 메뉴라는 것이 있다는 걸 지난달 알게 된 나는 가족들에게 아포가토를 먹으며 조카를 기다려 보자고 한다. 조카는 나의 얼굴을 보자마자 어제 못다 한 일부터 해야 한다며 어서 숙소로 들어가잔다. 얼결에 엄마와 나는 챙겨 온 루미큐브를 꺼내 준비를 하고.
프로그램 참가 후인데도 아직 에너지가 남았는지 빠른 속도로 루미큐브 숫자를 등록하기 시작한다. 밥 먹으러 나가지 않겠다는 그녀의 완고함 덕분에 숙소의 비싸나 맛있지 않은 햄버거를 저녁으로 먹어야 했다. 늦은 점심의 짜장면 그리고 버거. 훕 식도락 여행인가.
어제의 입산금지를 피해보려고 오늘은 조금 더 서둘러봤다. 살짝 내리던 비는 한라산 근처로 올라갈수록 빗줄기가 굵어지더니 앞이 보이지 않을 정도이다. 차에서 내려 산을 올라간다고 한들 즐길 수 있을지 의문이 들어 계획 중에 하나였던 박물관을 가기로 했다. 많은 준비를 하지 못 한 탓에 무슨 박물관이냐는 질문에 나는 호박 사진을 하나 보여주며, “이 작품이 유명하대.” 하고 궁색한 답변을 내놓는다.
나만 박물관에 내려주고 나머지 가족들은 가까운 곳에서 커피를 마시겠단다. 설득하기엔 취향이 다르고 내 준비가 빈약하다.
본태박물관.
준비 없이 들어가다 보니 색다름이 한결 다르게 느껴진다. 2시간 정도의 관람 뒤 다시 가족들을 만났다. 식사 시간도 지나가고 있어서 제주 오면 가끔 들르던 식당을 갔더니 다른 곳으로 이전했다는 안내문이 보인다. 멀지 않은 곳이라 갔으나 기다리는 사람들이 너무도 많다. 3시인데 말이다. 그렇게 맛집인가? 하는 생각과 과연 기다려서 하게 되는 이 식사는 점심인 것인가 저녁이 되는 것인가 이런 생각을 하고 있는 사이 결정이 빠른 언니가 다른 갈치 집으로 안내를 한다.
나는 절대미각이 아니기도 하고 맛에 대한 기억력 또한 상당히 약하다 보니 맛집에 그다지 집착하지 않는다.
박물관 관람으로 나만 커피 한잔을 못 했다고 식사 후 식당 근처 가까운 스벅으로 발걸음을 느릿하게 옮겨본다. 서울에서는 카페에 머무르는 시간이 거의 없는데 제주도에서는 가족과 함께하는 것이기 때문에 시간을 넉넉하게 즐겨야 했으나 커피를 마시는 동안에도 나 혼자만 마음이 조급하다. 오늘은 절대 숙소의 버거를 먹지 않겠다는 나의 각오가 있었기 때문이다. 커피 한잔을 들이켜고 조카를 태우고 피자집에 갔으나 8시가 가까운 그 시각 재료 소진으로 문을 닫는단다. 어디로 발길을 옮겨야 할지 막막해진 우리는 잠시 주차장에서 의논을 한다. 피자집 사장님은 재료가 일부 있기는 하나 요청하는 메뉴를 만들어 줄 수 없다고 하고 나는 아무거나 먹을 테니 뭐든 좋다고 떼를 써봤다.
떼를 쓰기엔 내 나이가 너무 많았던가. 내일 아침에 오란다.
결국 그 시간 어디를 가도 상황은 마찬가지일 거라서 숙소 풀사이드바에서 요리를 시켜먹으면서 못다 한 루미큐브를 하기로 했다.
조카는 루미큐브를 하면서도 내게 내일은 꼭 새벽 수영을 가야 한다고 다짐을 받아두려고 한다.
나는 그녀의 컨디션과 내 컨디션을 보자고 했으나.
결국
이른 새벽 수영을 위해 나는 늦은 밤 짐을 싸고 있다.
새벽이라 우리만 있을 줄 알았던 수영장은 어르신들이 힘차게 발차기를 하며 앞을 향해 나아가고 있었다. 킥이 약한 나는 느릿느릿 팔젓기로 나아가고, 물에 대한 공포가 많이 없어진 조카는 킥판을 활용하여 힘차게 앞으로 돌진한다. 킥판이 있어도 가라앉던 지난번 여행과 비교하면 실력이 많이 향상되었고 아마도 이 모습을 보고 칭찬해줄 이모의 칭찬 멘트를 엄청 기대하고 오자고 했을 것 같다. 첫 여행 때가 문득 떠올라 피식 웃음이 난다. 단지 들어갔을 뿐인데 자기 죽을 것 같다며 나를 멱살잡이 하던 그녀. 유치원생이었던 그녀의 힘은 원더우먼급이었다.
빠르게 식사를 하고 등산을 싫어하는 조카를 제외하고 삼세번 도전에 나서기로 했다. 사실 나도 등산을 좋아하지는 않으나....
도착시간 11시 10분쯤. 다행히 입산금지 시간은 아니라서 별다른 준비 없이 가방을 둘러멘 채 입구에 다다른다. 내 흰 운동화는 등산에 적합하지 않다고 언니가 뭐라 하고 있으나 뭐 정상에 갈 것이 아니라서.
잠깐 유료 인증에 마음이 흔들리긴 한다.
올라가는 성판악 코스는 나무가 우거져 햇빛이 강렬하지 않으나 바람마저 막아졌는지 생각보다 덥다. 엄마, 형부, 나 그리고 언니가 순차적으로 올라가기 시작하고 어느덧 엄마와 형부가 보이지 않는다. 그들의 걸음이 빠른 것인지 우리의 걸음이 느린 것인지.
얼마 후 멧돼지 표지판을 보고 무섭다고 내려가겠다는 언니와 헤어지고 나는 대피소까지만 가자고 다짐했지만 쉬이 나타나지 않는다
선발대도 후발대도 안 보이는 오롯한 혼자의 산행이 되어버리고...
하는 수 없이 인내심을 좀 더 발휘하기 위해 음악을 켠다. 빠른 스피드의 플로렌스는 발걸음을 조금 가볍게 해주는 것 같다.
2시간 반 정도의 산행을(?) 마치고 아이스크림을 먹으며 선발대였던 엄마와 형부를 기다린다.
오랜만에 먹는 부라보콘이 다디달다~
점심 먹으러 가는 차 안에서 산행의 후기를 듣는데 엄마의 산행 속도가 강시 같았단다.
‘쓱쓱쓱~’
걷는다기 보다는 축지법을 쓰는 걸음걸이 같았다고.
아버지 친구분들이 내가 산행을 하는 날이면 어김없이 “너희 엄마는~~~ “
묻지도 않은 우리 엄마의 산행 실력을 말씀해주셨기 때문에 그 말이 무슨 뜻인지 알 것 같다.
필라테스 선생님이 운동 후 단백질 보충을 하지 않는 것은 일 시키고 월급을 안 주는 것과 같다는 말이 기억나 단백질 보충을 하러 고깃집을 들른다. 브레이크 타임이 있다고 주문을 한꺼번에 하라고 한다. 피크 시즌에 여행을 오니 자꾸 눈치를 줘서 음식을 제대로 즐길 수가 없다.
프로그램을 마치고 잠시 돌아온 조카는 오늘도 루미큐브를 제안한다.
다시 저녁 쿠킹클래스를 들어가는 조카의 부재를 틈타 3 모녀가 루미큐브를 한다. 우리 식구라면 모두 좋아하는 이 게임. 한 게임을 끝내고 두 게임을 끝내어 가는 사이 조카로부터 전화가 오고, 그녀의 복귀 알림에 우리는 모두 아수라장이 되어 게임이 진행되지 않는다. 그녀가 돌아왔음에도 게임이 끝나지 않고 있다면 그녀는 분명코 모든 판을 다 조정하려고 들 테니까.
발걸음 소리가 들리는 것 같은 환청이 온다 ㅎ
딩동~ 하고 울리는 벨소리.
적중률 100%
만들어 온 쿠키를 침대에 올리고 우리가 앉아 있던 테이블로 스스슥 와서 상황을 빠르게 본다.
우선 언니의 판부터 조정하려고 든다. 그다음 할머니 그리고 나의 큐브카드까지.
결국 큐브판은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지도 모르게 얼마 남지 않았던 여유는 빠르게 종료되어버린다.
둘은 포기하고 새로운 멤버 등장.
형부, 조카 , 그리고 나
그러나 나는 벌써 그 아수라장의 멤버였던 탓인지, 새벽 수영 탓인지, 등산 탓인지 두뇌는 거의 가수면 상태가 되었다.
그렇게 오늘도 게임으로 밤이 깊어가면서 여행은 마지막 날을 향해 가고 그럴 즈음이 되면 다음에 올 때는 그곳을 가자~라는 대화가 오고 간다.
예약해야만 볼 수 있는 것들. 준비 없이 와서 볼 수 없었던 것들을 말이다.
“다음엔 예약해서 반딧불을 보자~ “
“다음엔 한라산 코스 중 성판악, 어리목, 영실 모든 코스를 돌아보자~”
“다음엔 루미큐브를 좀 더 잘 해보자~ ㅎ”(이건 내 다짐이었던가?)
많이 둘러보지 않았어도 함께여서 행복했던 하루 같은 제주도 여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