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럼에도 불구하고

by 꼬드kim

진행자는 인생 목표에 대해서 기재해보라며 2분의 시간을 주었다. 나는 목표라기보다는 그간 하고 싶다고 할 수 있는 것들을 적기 시작했다. 책 많이 읽고, 여행 많이 가고, 운동 열심히 등등의 뻔한 그러나 달성하기 쉽지 않은 소망들.

2분이 지나자 5년 뒤 죽는다면 5년을 어떻게 살 것인가에 대해서 기재해보라며 다시 2분의 시간을 주었다. 이루고 싶은 꿈들을 제외하고 조금 더 소비적인 소망들을 적어 나갔다.

2분이 다시 지나자, 진행자는 내게 6개월의 시간이 남았다면 무엇을 하고 싶은지에 대해서 기재해보라고 했다. 망설임과 고민으로 주어진 2분에서 1분을 소비한 것 같다. 과연 6개월이란 시간이 남았을 때 무엇인가 이루고 싶은 것이 있을까 하는 생각, 그리고 고등학교 때 영어 선생님 생각.


그 해 여름은 내게 더 무더웠을지도 모른다. 여름방학임에도 불구하고 학교에 모여 보충수업을 시작했기 때문이다. 부정확한 기억이지만 에어컨은커녕 선풍기조차 없었던 것 같다. 나를 제외한 학생들의 불타는 학구열이 더해져 나는 지쳐가는 듯했다. 무더위에 보충수업을 받아야 한다는 것에 불만 가득함에도 불구하고, 전교 100등까지의 학생들에게만 베푸는 특혜였기에 오히려 감사하게 생각해야 하는 이상한 상황이었다.

보충수업시간이라서 그런지 원래의 학과목 선생님이 아닌 다른 선생님이 들어왔다.

영어수업 시간이다. 하얀 얼굴, 큰 눈망울에 선함을 가득 담고 있는 선생님이 등장했다.

'우와~ 이쁘다.'

나도 모르게 혼잣말을 뱉어냈다. 늘 무서운 선생님들 얼굴만 보다가 코스모스 느낌의 선생님을 보니 그날 하루는 생경함에 수업이 어떻게 진행되었는지도 기억하지 못 한채 끝났다. 다음 영어 수업이 기다려지기도 했고, 그런 기다림은 영어 수업으로는 내 인생 처음이었다.

선생님은 새로운 단어가 나올 때면 칠판에 단어와 발음기호를 표기해 주시고, 다 같이 따라 해 볼 수 있도록 두어 번 발음해 주셨다. 사전을 찾아봐도 되지만, 게으른 학생들을 위하여 그런 배려를 해주는 것이 아닐까 싶다. 많은 지문의 독해, 문법 등을 알려주시는 동안 더위에 대한 나의 불만은 조금씩 잦아들었다.

그러던 어느 날 영어수업 시간이었는데 아무리 기다려 보아도 선생님이 오시지 않는다. 그러다 알게 되었다. 백혈병을 앓고 계셨던 선생님이 쓰러져서 출근을 못 하신 거라고.


결국 선생님은 얼마 후 세상을 떠났다. 30대였을 한창의 나이에 자신의 인생이 시한부일 수 있음을 알았을 수 있던 그때 그분도 그 짧은 유한의 기간에 대한 계획을 써 내려갔을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이들을 보람차게 가르치겠노라고...


나는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길 수 있는 1년의 시간인 2022년 계획을 제대로 세웠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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