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나마에서 연남동으로
도연에게
너의 편지를 읽으면서 중간중간 댓글을 달고 싶어 죽겠는 마음에 아침부터 답장을 써. 사실 교환일기를 시작할 때에는 일주일에 한 번씩 쓰면 적당하겠다고 생각했거든. 그런데 이렇게 데일리 일과가 되어버릴 줄이야! 우리 지금 교환일기가 세상에서 제일 재밌는 일인 양 굴고 있어. 뭐 적어도 나에겐 썩 틀린 말은 아니긴 하지만.. 교환일기기 나한테 주는 설렘이 어느 정도냐면, 내가 줌바를 시작했다고 했잖아?! 오랜만에 하는 운동인데 효과 좀 봐볼까 하며 저녁을 거르기도 한단 말이야. 솔직히 완벽한 공식이잖아 '식사조절 x 운동 = 체중감량'. 그런데 오늘 아침 몸무게를 쟀는데 빠지기는커녕 쪘더라????(어쩌면 아침과 점심을 너무 많이 먹고 있나 봐) 내가 체중계에서 내려오면서 'ㅅㅂ'이라는 상황에 아주 적확한 단어를 뱉어내지 않은 건 교환일기 덕이라고 생각해. 마음에 설렘이 가득해서 부정적인 감각은 저기 구석에 좀 밀어뒀어. 게다가 오늘은 새벽부터 줄기차게 비도 내리고 있거든. 파나마에서 이렇게 긴 시간 비가 내리는 건 정말 선물 같은 날이라 비 오는 날의 바이브를 온몸으로 비벼대며 느끼고 싶어. 살쪘다고 짜증 낼 시간이 없어.
자, 그럼 이제 댓글을 하나씩 달아볼게!
일단 요리를 시작한 이유에 대해서 물었지? 이건 아주 명확한 두 가지 이유가 있어. 첫 째는, 손님을 대접할 음식들을 연습하는 거야. 아내로서 엄마로서 그리고 며느리로서, 이제 나는 누가 해준 밥을 얻어먹기만 할 수는 없는 종류의 가족 구성원이 되었거든. 물론 여전히 우리 집 메인 셰프는 남편이지만 나도 조금씩 연습이 필요하다고 생각했어. 손님 접대용 메뉴 위주로 연습을 하는 이유는, 아마도 내가 요리를 하는 날은 시어머니 생신이거나 남편의 생일이거나.. 그럴 게 분명하기 때문이야. 두 번째 이유는 남편에게 무언가 해주고 싶은 마음이 들어서야. 남편은 겉절이를 좋아하거든. 남편은 우리 가족을 위해 매 끼니 요리를 하잖아. 그래서 남편을 위해 겉절이만큼은 내가 책임지겠다고 다짐했지. 요리라는 게 말이야, 막상 해보니까 청소나 빨래와는 다르게 노고가 드러나는 작업이더라고? 게다가 상대방의 피드백까지 즉각적으로 받으니 이 성취감이 대단하더라.
아! 김치볶음밥은 나도 좋아하는 음식인 데다가 오빠가 아주 맛있게 잘하니까 걱정 말고 파나마 놀러 오렴.
지난 너의 편지에선 사랑 얘기가 사실 메인이었지. 네가 나에게서 임경선스러움이 있다고 말했는데 말이야. 나는 사실 교환일기 책을 읽으면서 임경선 작가한테 조금 실망했지 뭐야. 그렇게 사랑을 좋아하는 사람인지 몰랐거든. 이건 뭐 사랑꾼이더라고! 그 책을 읽으면서도 사랑 얘기가 나올 땐 솔직히 빠르게 눈으로 대충 읽고 책장을 넘기면서 나는 아무래도 사랑 얘긴 별로인가 보다, 생각했어. 사랑을 좋아하는 너와 교환일기를 쓰면서 언젠가 사랑에 대한 이야기를 하게 될 줄은 예상했지만 그게 이렇게 금방일 줄은 몰랐다.
아무튼 네 현재의 연애가 '뭐가 이렇게 다 쉽지'라는 생각이 든다고 했잖아. 그 말은 즉, 딱히 거슬리는 점이라던가 극복해야 할 상황 같은 게 없다는 거잖아. 나는 그걸 사랑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로 치거든. 왜 그런 말이 있지? 상대가 좋아하는 일을 하려기 보다 상대가 싫어하는 일을 하지 말라는. 나는 그 말에 십분 공감하거든. 그런 사랑은 대체로 자극이 적고 편안하지. 나는 그런 사랑을 좋아해. 활활 타오르는 뜨거운 연애보다 적당한 온기를 품고 있는 뭉근한 사랑. 결혼해서 어떻게 매일같이 자극적이고 짜릿한 사랑을 하겠어. 결혼생활이 그렇게 자극적이면 내 감정은 금방 너덜너덜해지지 않을까? 생각만으로도 마음이 지친다.
오빠와 결혼할 때 어떤 마음이었는지 물어봤지? 이게 참 웃기다니까. 내가 결혼 전에 선자리가 몇 번 들어왔어. 한 번은 대기업 과장이랬나? 나이가 마흔이라는 거야. "뭐? 마흔? 나이가 너무 많잖아!" 하면서 깠어. 응. 내 나이도 서른넷이었는데. 그리고 또 다른 한 번은 나이는 나보다 조금 많았는데 사업하는 집안이라는 거야. "나는 월급 따박따박 나오는 월급쟁이가 좋아."라면서 깠어. 자, 근데 내가 어떤 사람과 결혼했니? 사업하는 마흔 살 남자하고 결혼했어. 결혼할 인연은 그런 거 상관없이 결혼을 하게 되는 건가? 신기했는데 반대로 오빠와 결혼을 하면 좋겠다고 느꼈던 순간들은 무지 시시해. 한 번은 벚꽃이 흐드러지게 핀 계절이었는데 드라이브를 하고 있었어. 창문을 내리고 음악을 크게 틀었어. 둘이서 고개를 까딱 거리고 노래를 따라 부르며 그저 달릴 뿐이었지. 근데 그 별 것 아닌 순간에 '평생 이렇게 살고 싶다' 생각이 들었어. 너도 알잖아, 행복은 원래 그렇게 별 것 아닌 시시한 순간에 숨어있는 것. 또 한 번은 둘이서 술이 조금 얼큰했는데 집에서 힙합 음악을(곡명은 good day였어) 틀어놓고 춤을 췄어. 이렇게 살면 재밌겠다 싶었지. 듣고 보니 엄청 시시하지? 아! 그리고 결정적으로 결혼을 결심하고 준비하는 과정이 너무 쉬웠어. 걸림돌이 없었고 의견 충돌도 없었지. 축복만이 가득한 느낌이랄까. 나의 결혼은 그렇게 착착착 이미 결말이 정해져있던 영화처럼 그렇게 흘러간 거야. 참고로 아이를 낳은 건 계획에는 없던 일이었어.
며칠 전에 우리 엄마랑 영상통화를 하는데 엄마가 나한테 뭐라는 줄 알아?
"우리 딸은 남의 비위를 못 맞추는데 어떻게 애를 잘 볼 수 있는지 걱정이네. 네가 애 비위를 맞출 수 있어?"
그래서 내가 뭐라 그랬냐면 "내가 엄마 비위는 못 맞춰도 내 자식 비위는 맞추게 되던데? 엄마가 내 비위 맞춰주듯이" 그랬더니 엄마가 막 웃더라고. 그건 분명 공감의 웃음이었어. '내리사랑'이라는 말이 괜히 있겠어?
그러니 너무 걱정 말게 친구.
나를 사랑하고 내 삶을 돌볼 줄 아는 사람은 본능적으로 균형을 잡으려고 노력하게 될 테니.
역시, 나랑 하는 사랑 얘기는 재미 없지?? 미안하게 생각한다.
p.s. 안 바쁠 때 답장 좀.
파나마에서 채리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