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연남동에서 파나마로
채리에게
편지 잘 받았어, 너와의 사랑 얘기는 여전히 재미있진 않지만 유익했어. 더럽게 현실적인 기지배. 하지만 오히려 이런 관계가 나는 좋아. 내가 뜨거워질 때쯤 찬물을 한 바가지 뒤집어쓰고 나면 뜨거운 마음은 유지하되 침착하게 행동할 수 있게 되거든. 비위를 맞추는 것이 사랑이라면 정말 힘든 일인 것 같아. 하루 이틀이야 비위 맞추는 일이 어렵지 않겠지만 어쩌면 평생 비위를 맞춰야 한다면... 으 끔찍한데... 내리사랑이라지만 아이를 '전혀' 좋아하지 않는 내가 내리사랑과 비위맞추기가 가능할진 의문이야. 그래도 걱정은 그만 할게. 네 말대로라면 나는 스스로 삶을 돌보고 나를 더 나은 삶에 들여놓고 싶어 하는 사람이니까, 더 나빠지진 않을 것 같다는 확신이 들어. 네 편지의 한 문장으로 나는 오늘 삼계죽 같은 하루를 보내겠다.
사실은 나도 일상을 통틀어 펜팔이 제일 재미있어, 연애보다, 밥 먹는 거보다 말이야. 바쁠 때야 일주일이고 못쓸 날들이 많을 테니, 시간이 나고 마음이 설레일 때 부지런히 써두자. 요즘 줌바를 한다고? 집 밖에 나갈 수가 없으니 그렇게라도 운동하는 건 아주 좋은 방법 같아, 너는 집에서 요가도 잘하고 줌바도 하는 걸 보면, 어쩌면 나보다 더 집순이 형 인간일지도 모르겠네. 난 집에선 운동할 흥이 나질 않더라고. 나이키를 전신으로 빼입은 뒤, 거울을 보면서 스스로 만족하거나, 사람들의 시선을 흘끔거리거나 하는 게 나에게 운동할 의욕을 주거든. 여하튼, 식단관리 X 운동을 겸하는데도 살이 안 빠지는 건 말이지 나잇살 이란 게 적용된 것이 아닐까? 나도 삼십 대 중반이 되면서부터는 헬스장에서 한 시간을 넘게 땀 흘리면서 운동해도 살이 '전혀' 빠지지 않더라고. 최근 나는 간헐적 단식을 시작했어, 오후 2시쯤 식사를 최초로 시작하고 밤 10시부터 공복을 유지하거든. 8시간 동안 먹을 수 있어서 2끼 정도를 먹는데 최대한 간단하게 먹고 있어. 살은 좀 빠졌으려나? 겨우내 두터워진 지방이 이제 얇아질 시간인데 영 조짐이 보이지 않네. 파나마는 4계절이 여름이라서 오히려 다이어트의 감흥이 덜할 것 같아, 어때? 여름이 오니까 다이어트를 해야지. 봄이 되었으니 몸을 좀 일으켜볼까 하는 다짐을 할 수 없으니 오히려 더 자기 관리가 중요해질 것 같아. 살도 살이지만 건강을 위해서 적당한 체중을 유지하자고! 우리는 늘 삶을 가꾸는 사람이니까. 건강한 몸과 마음을 위해서 꾸준히 노력하자.
파나마에 지금 비가 세차게 내리고 있구나, 어젯밤에 네 인스타 스토리를 보는데 부러워서 죽는 줄 알았다네. 또 너랑 나는 비에 환장하는 사람들이잖아. 어릴 때는 비 오는 게 '전혀' 좋지 않았거든. 성향이 많이 바뀌어서 비가 오는 게 너무 좋아, 비가 오는 날에 외출을 해서 신발이 젖고 바지의 뒷자락이 축축하게 젖는 것도 좋아. 연인과 함께 라면 한쪽 어깨가 젖어도 좋겠지. 혼자서 음악을 잔잔하게 틀어두고 우산을 쓰고 걷는 것도 좋겠다. 창이 큰 카페에 앉아 비를 하루 종일 바라보며 글을 쓰거나 책을 읽어도 좋고. 이렇게 근사한 하루가 만들어지는 날씨인데 사랑하지 않을 수가 없지! 그런데 요즘 한국에는 비가 통 오질 않아. 봄이 시작될 때 쯔음 자주 오는가 싶었는데 세차게 내리진 않더라고. 너무 아쉬운 점이지... 올여름, 장마를 기대해본다. 언젠가부터 비를 좋아하기 시작하니까 날씨 얘기를 할 때 누군가가 "나는 비 오는 날이 너무 싫어"라고 한다면 나는 그 사람과 가까워질 순 없겠구나 생각해. (너무 편협한가 ㅋㅋㅋ) 그래서인지 비를 좋아하는 너와 내가 대화가 즐거운 게 아닐까 싶네.
어제까지 바쁜 일들을 다 끝냈어, 폴킴의 새 앨범 작업을 마쳤고 곧 나오게 될 포토샵 일러스트 교재도 탈고를 했어. 후련하다! 소설의 2차 수정을 진행하고 있는데 영 진도가 안 나가서 속상한 와중이야.
지금 파나마는 새벽이겠지? 나는 이제 점심을 먹고 다시 일을 해보려고 해. 내일도 눈 뜨면 비가 세차게 내리길 기도해줄게. 그럼 20000.
ps. 안 바쁠 때 답장 좀.
연남동에서 도연이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