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연에게.
오늘은 사실 하루 종일 우울의 늪에 빠져지냈어. 그래서 교환일기고 나발이고 오늘은 그런 거 쓸 기분이 아냐! 했다가 너에게 결혼이나 출산 같은 거 하지 말라고 쓸까?(그냥 나의 현재가 다 짜증나니까 다짜고짜 막무가내식) 했다가, 에잇 그냥 잠이나 자야겠다, 했는데 남편이 내가 우울한 걸 알고 마사지를 해준다는 거야. 남편은 뭉친 어깨뿐만 아니라 내 마음까지 풀어주었지. 그래서 사실 지금의 마음은, 도연아 결혼은 좋은 거란다. 좋은 사람과 서로를 위하며 평생 함께 산다는 게 얼마나 근사한 일이니?라고 말하고 싶다. 어쨌든 나는 오늘 교환일기를 거를 작정이었는데 남편의 마사지에 에너지를 얻어 시원한 밤바람을 맞으며 랩톱 앞에 앉아있어. 파나마에 온 후로 가끔 서러울 정도의 외로움과 처절하게 벗어나고 싶은 우울함이 나를 옴짝달싹 못하게 할 때가 있어. 아마도 외로움은 이곳에서 사는 한 어쩔 수 없는 일일 테고 우울함은 호르몬의 영향이었을 거야. 임신과 출산으로 호르몬의 대격동을 겪어내고 이제 좀 괜찮나 싶었는데.. 출산 후 첫 생리를 하게 되었어. 사람 몸이라는 게, 특히 여성의 몸이라는 게 얼마나 신기한지! 아이를 태중에 품고 있을 땐 생리를 안 하잖아. 그리고 아기를 낳으면 바로 다시 하는 줄 알았는데 모유수유를 하는 동안에도 생리를 안 하는 거야. 근데 모유를 끊었더니, 한 달 지나니까 생리를 시작하더라. 아기를 품던가 젖을 줄 거 아니면 생리를 하게끔 몸이 설계돼있다니 너무 신비롭긴 한데... 졸라 열 받더라고! 인체의 신비는 어제 마신 술 때문에 하루 종일 변기통을 붙잡고 '내가 다시 술을 마시면 사람이 아니다' 생각했지만 퇴근 시간이 다가오면 슬슬 컨디션이 회복되어 오늘은 또 어떤 판을 짜서 술을 마실까, 하고 있는 나를 발견했을 때에만 느껴봤는데, 진정한 인체의 신비는 이런 거구나 싶어.
오늘의 이 우울함의 끝에선 스스로를 자책했어. 왜 나는 이렇게 성격이 별로지. 뭐가 이렇게 뾰족해. 왜 고작 이따위 인품밖에 안될까. 왜 나는 이렇게 질투가 많을까. 왜 내 안에 사랑과 이해심이 고작 이것뿐일까. 왜 나는 손해 보는 걸 견디기 힘들어하는 걸까. 이렇게 쓰는 와중에도 내가 너무 구린 사람이라서 괴롭다. 그럼에도 내가 가족이라는 이유만으로 나를 좋아해 주는 사람들이 있잖아. 가장 마지막으로 나와 가족이 된 내 아들은 내가 엄마라는 이유만으로 나를 좋아해 줄 테지. 그렇게 생각하니 출산도 좋은 거 같다. 대가 없는 사랑을 준다는 거 얼마나 아름답니, 도연아? 물론 이것도 지금의 마음이야.
어쩌다 보니 이 편지의 결론은 결혼과 출산은 좋은 거다, 라는 게 되어버렸네.
그렇지만 가장 좋은 건 뭐니 뭐니 해도 네가 지금 하고 있는 그것 아닐까 싶다. 나는 다시는 해보지 못할 그것.
연애.
P.s. 시간 날 때 답장 좀.
파나마에서 채리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