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불 킥 챔피언

-연남동에서 파나마로

by 도연

채리에게


언제나처럼 숙취에 시달리다 겨우 몸을 일으켜서 노트북을 열었어. 호르몬이란 건 정말이지 무서운 거 같아. 감정 기복이 호르몬 때문이란 건 30대에 와서야 알게 되었어. 이유 없이 우울하고 인생이 개떡 같다는 생각을 할 때면 꼭 생리 때가 되서더라고. 인체의 신비인 거지, 30대 중반의 미혼 여성은 신체에서 출산을 해야 하는데 출산을 하지 않아서 생리통도 심해지고 자궁경부암의 확률도 높아진다잖아.(카더라 통신) 신체 장기마저 출산을 장려한다는 것도 신기해. 일 년 만에 생리를 다시 시작한다니까 귀찮겠지만, 그래도 축하를 해야겠지? 다시 원래의 몸으로 돌아온 것 같으니까 말이야. 그래도 넌 언제나 밸런스를 잘 잡는 편이니 호르몬의 폭풍과 우울감, 외로움 속에서도 너만의 행복을 발견하고 잘 지낼 거라 믿어 의심치 않아. 곁에 든든한 버팀목 같은 남편과 너무나도 귀여운 시호가 있으니 대가 없는 사랑의 기쁨을 느끼면서 조금씩 나아지길 바랄게. 그리고 이렇게 먼 거리에서도 친구와 펜팔까지 하고 있으니 을매나 인생이 즐겁냐! 기분이 영 환기되지 않는다면 커피를 한잔 내리고, 창을 열고 우기의 밤바람을 만끽해보면 어때? :)


결혼은 좋은 것이라니. 내 주변 사람들이 마치 판을 짜듯이 '결혼은 좋다'라고 입 모아 말하는 것이 아무래도 내가 결혼 생각을 하게 만드려고 하는 것 같군? ㅎㅎ 네가 부러워하는 그 '연애'란 것을 하는 요즘 나는 말이야. 결혼 생각보다도 '그 사람의 있는 그대로를 받아들이기'를 연습 중이야. 누군가를 내 프레임에 맞춰서 변화하길 바라는 것, 내 기준에 못 미치는 것을 단점으로 치부해버리는 것을 조심하려고 하고 있어. 뒤늦은 자기반성을 해보자면 말이야, 나는 늘 서운한 게 많은 여자였어. 기대를 하기 때문에 실망도 크고, 내 기준에서 원하는 노력과 배려를 해주지 않는 사람은 나쁜 남자로 치부되기 일쑤였지. 그래서 이번엔 그런 매력 없는 행동을 하지 않으려 노력하고 있어. 그랬더니 웬걸, 연애가 너무 쉬운 거야. 서운한 게 없어지고 오히려 고마운 일만 투성이야. 그런데 자꾸 술만 취하면 원래의 버릇이 나와서 '이래라저래라' 하면서 꼰대 짓을 해. 그래서 어젠 나도 내가 너무 싫은 하루였다.

'나는 왜 이렇게 참을성이 없을까. 나는 왜 술만 먹으면 헛소리를 해대는 걸까. 나는 왜 이렇게 다크 하지. 난 왜 남자한테 바라는 게 많은 걸까...' 이불을 몇 번 발로 걷어차고, 그리고 이 자괴감이 조금 걷어지고 나면 또다시 술에 취해서 꼰대 짓을 일삼겠지... 이래라~저래라~이거 하지 마라~저거 하지 마라 하면서...


사랑을 하는 일은, 건강한 관계를 이어가는 일은 참 어렵다는 생각을 한다.

숙취에 오늘은 하루 종일 누워만 있었어. 내일부터는 또다시 소설의 2차 수정 마무리 작업에 박차를 가해야지!



ps. 시간 날 때 답장 좀.

연남동에서 도연이가.

매거진의 이전글우울의 늪