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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강채리 May 18. 2020

생긴 대로 살자

-파나마에서 연남동으로

도연에게



   관계라는 건 몇 살이 되어야 의연해질 수 있는 걸까? 이 나이쯤 되면 사람과의 관계에서 받는 상처 같은 건 꽤 덤덤한 일이 될 줄 알았는데 우리는 여전히 관계에서 마음을 다치고 있구나. 가깝고 친한 관계일수록 약간의 거리를 두어야 한다고, 편안한 사이의 업무일수록 더 정확하게 주고받아야 한다고... 그렇게 하는 게 가까이서 보면 정 없어 보이고 냉정해 보이지만 사실 얼마나 영리하고 지혜롭게 관계를 리드하고 있는 것인지... 우리는 알고 있지만 그게 그렇게 쉽지는 않지. 그런데 뭐, 꼭 좋은 관계만 유지하면서 살아야 되냐?? 그냥 생겨 먹은 대로 살자! 네 편지 제목대로 좋은 사람 말고 그냥 내가 되자구. 내가 너에 대해 장담할 수는 없지만 말이야, 내가 본 너는 어차피 다음에도 또 그렇게 남을 배려하고 좋은 게 좋은 거지~ 하면서 넘기고, 정에 연연하면서 이성보단 감정적으로 사람을 대할 거야. 근데 그게 어때서? 그게 매번 너에게 상처만 주는 건 아니잖아. 너의 그런 면 때문에 좋은 사람들이 네 곁에 머물기도 한다고. 너무 계산적이거나 이기적으로 굴지 않고 타인과의 조화로움에 마음을 쓰는 건 졸라 나이스하단 말이야. 사람은 자기다울 때 가장 빛나잖아. 나답게 굴지 않겠다고 다짐하는 순간, 나의 타고난 광채를 잃게 될지도 모른다구.


   그나저나 육아법에 대해선 말이야, 네 친구분 말대로 그냥 엄마가 하고 싶은 대로 하면 되는 거 같아. 내 친구들도 보면 어떤 이는 젖양이 부족한데 어떻게 해서든 아기에게 모유를 먹이겠다며 모유양이 많아지는 데 도움이 된다는 차도 우려서 마시는 반면에 또 다른 친구는 모유양이 너무 많아서 젖이 빨리빨리 차니까 힘들다고 조리원에서부터 젖을 말려버린 친구도 있어. 정답은 없어. 뭐가 좋다고도 말할 수 없지. 내가 아기를 키우며 느낀 건 하나야. 엄마가 행복해야 아기도 행복한 아기로 키울 수 있다는 것. 네 언니는 뭐든지 직접 하셔야 스스로 만족하고 행복하셨을 테지. 나도 친정집에서 언니가 아기를 키우며 힘들어하는 걸 바로 곁에서 지켜봤잖아. 내가 우리 언니한테 뭐라 그랬게?? 사람들이 도대체 애를 왜 낳는지 모르겠다고 그랬어. 대부분의 엄마들은 경력단절까지 겪어가며 하루 종일 집에서 애랑 실랑이만 하고 친구랑 커피 한 잔 마시러 나가는 것도 편히 못하니... 그런 걸 보면서 애는 왜 낳아가지고 저러고 사나 싶더라니까. 이건 뭐 애 낳기 전에 누리던 대부분의 것들을 포기해야 하더라고. '희생' 그거 말고는 다른 단어로 표현이 안 돼. 근데 우리 언니가 뭐라고 대답했냐면 "아기를 낳아 기르는 건 너무 힘들고 고된 일이지만 아이가 주는 새로운 행복의 세계가 있어."라는데 나는 도무지 이해가 안 가더라고. 조카, 당연히 너무 이쁘지. 근데 조카가 나에게 행복의 세계까지 열어주지는 않았거든. 아무튼 나는 그래서 엄마한테 애는 낳지 않겠다며 개를 키우며 살겠다고... 그러나 인생은 역시 계획대로 안 살아지고....

근데 언니의 육아를 보면서 느꼈던 회의감이 막상 내 육아에 도움이 되는 거야. 아기를 낳을 때 마음을 아주 단디 먹었지. 하... 내 인생은 이제 끝났다. 난 뒤졌어... 거의 이런 마음가짐이었는데 마음을 너무 단디 먹었던 건지 막상 하니까 '어? 생각보다 할만한데?' 이렇게 되더라니까. 그러니까 너도 너무 겁부터 먹을 필요는 없어. 아기 낳으면 마냥 아기 이쁜 줄만 알고 육아를 시작하는 것보다 넌 훨씬 유리한 위치에 있어! 

참고로 나의 육아방식은 그냥 되는대로 하는 편이야. 주어진 상황에서 적당히.. 한다고 해야 할까. 되게 최선을 다하지는 않는 거 같은데 그렇다고 또 막 키우는 거 같지도 않고. 언제나 내 행복을 우선시하면서, 내가 행복해야 시호가 웃는 엄마를 보며 덩달아 웃고 행복하게 자란다! 를 되내며.. 그렇게 오늘도 나는 시호에게 짜증을 냈다.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생각보다 할만하긴 한데 불쑥불쑥 올라오는 짜증은 왜 이렇게 다스려지지가 않는 거냐. 어디 가서 인내심 좀 사 오고 싶다. 

인간관계든 육아든, 우리 그냥 생긴 대로 자연스럽게 살자! 


난 이제 천사처럼 쌔근쌔근 자는 시호 옆에서 생선 작가의 신간을 읽을 거야. 너 혹시 읽었어? 꽤 재밌더라. 얼마 전 한국에서 사 온 다섯 권의 책 중에서 마지막 책이라 유난히 애틋한 마음을 가지고 읽고 있어. 읽으면서 내 브런치 여행 매거진에도 글을 좀 써야하는데... 생각했지. 글을 쓰고 싶은 마음이 들게 해주는 책은 참 고맙고 대단해.


한국은 오늘 비가 온다던데, 이런 날엔 방에서 세찬 바람에 창문이 덜컹이는 소리와 토도도독- 창문에 부딪치는 빗방울 소리 들으며 김치만두로 네 안에 쌓인 불행 먼지 좀 밀어내며 글을 쓰면 좋겠다.  



p.s. 시간 날 때 답장 좀.

파나마에서 채리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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