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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강채리 Jun 05. 2020

멋쩍다

-파나마에서 연남동으로

도연에게.



  너의 남해여행 사진을 설레며 기다린 내 마음은 흡사 어릴 적 이민 간 친구가 보낸 그곳의 근사한 풍경이 담긴 엽서 한 장이 내가 있는 곳까지 배달되어 오길 기다리는 그런 마음이었는데... 내가 멋쩍을 만큼 풍경 사진을 전혀 찍지 않았더구나. 하긴.. 먹는 게 남는 거지... 그래.. 네가 먹은 그 꾸덕한 물회는 나도 정말 맛보고 싶어 지더라. 

네 말대로 내 족발은 성공적이었어. 이미 내 인스타와 블로그에서 사진을 봤겠지만 나는 내 족발이 대견하니까(?) 브런치에도 족발 사진을 첨부할게. 족발은 꽤 성공적이었는데 아쉬운 점이 있었다면, 삶을 때 팔각을 넣지 못했다는 점이야. 팔각은 중국 향신료인데 한국에서 유명한 오향족발 있잖아! 그 오향이 다섯 가지의 향신료를 뜻하는 거래. 그중 하나가 팔각인데 '족발 집에서 삶기' 레시피를 보니 열에 아홉은 팔각을 넣더라고. 집 앞 슈퍼에서 쉽게 구할 수 있는 재료였지만 그땐 통행제한이 풀리기 전이라 나갈 수가 없어서 팔각을 못 넣었어. 족발을 삶는 동안 무김치를 뚝딱뚝딱 만들어내는 나 스스로를 보면서 셀프로 궁둥이를 퉁퉁 쳐주고 싶은 마음이 들더라고.  김치깨나 담가봤더니 이제 찹쌀풀도 안 들어가는 이런 무김치는 별 거 아니더라고? 훗. 

족발의 허벅다리 살이 이미 잘려 있었던 터라 내가 원하는 그 족발의 모양대로 자를 수는 없었는데 어쨌든 한식 먹으러 한국이나 과테말라에 가고 싶은 마음이 절반 이상은 줄어든 것 같아!!(ㅋㅋㅋㅋㅋㅋㅋ)




한국에서 여행해본 곳 중 어딜 가장 좋아하느냐고? 난 두말할 것 없이 제주야. 제주가 너무 좋아. 웬만한 해외보다도 나는 제주가 더 좋아. 조금 긴 휴가엔 주로 외국으로 가서 낯선 공기를 마시며 정처 없이 헤매길 좋아했고, 3일이나 4일쯤의 휴가가 생기면 제주로 향하곤 했지. 제주를 너무 좋아한 부작용으로 다른 곳은 여행을 거의 못 해봤어. 20대에 혼자서 언니의 차를 빌려 여수로 여행을 갔었는데 기억에 남는 건 게장백반을 먹는 동안 다리에 모기를 열다섯 방쯤 뜯겼는데도 짜증을 내지 않았어. '전라도는 음식이 전라 맛있구나...'를 깨달은 나의 첫 전라도 여행이었지. 친구나 가족들과는 주로 동해바다가 있는 강원도를 놀러 갔었어. 이것들을 빼면 난 정말 한국에서 여행을 많이 못 다닌 것 같아. 친구가 지방에서 결혼을 할 때 스치듯 여행한 곳들도 있긴 했지만 그건 여행으로 치고 싶지는 않아. 사실 나는 통영을 스물일곱쯤부터 가고 싶어 했는데 한 번도 기회가 없었어. 남들 다 가는 여름휴가 시즌엔 통영이 물가가 너무 비싸진다는 얘길 들었던 터라 미루었더니 정말 갈 기회가 없더라고. 요샌 한옥 숙소에 꽂혀서 한국에 가면 가보고 싶은 한옥 숙소도 두어 곳 메모해뒀어. 한옥에서 머물러 본 적은 여태껏 없었는데, 한옥의 고즈넉한 정취가 퍽 근사하더라. 


요 며칠 나는 이사 갈 집을 알아보는 것과 시호의 이유식 방식을 바꾸는 것에 온 정신을 쏟고 있어. 나는 집을 단순히 주거의 목적으로 생각하기보다는 얼마쯤 더 많은 의미를 두는 편이라 고르는 일이 영 쉽지 않네. 집은 내가 가장 오랜 시간 머무는 공간이고 내 취향을 고스란히 담아낸 그릇이잖아. 이곳은 1년 단위로 계약하기 때문에 1년 후에 나는 또 이사를 할 텐데(물론 원하면 더 연장해서 살 수 있지만 나는 이사하는 걸 좋아해) 너무 고민하나 싶기도 해. 이러니 저러니 해도 결국 난 이달 말엔 이사를 하고 있겠지. 일주일쯤 짐 정리를 하느라 힘들겠지만 그래도 새로운 공간을 나의 취향으로 재구성하고 채우는 건 나에겐 언제나 설레고 즐거운 일이야. 나의 새집엔 네가 와볼 수 있게 될까? 아니면 그다음 집이 될까? 


너는 다시 강의를 나간다고? 그러고 보면 프리랜서로 살면서 꾸준히 주어진 일이 있다는 게 제법 성공한 커리어우먼 같다. 소식 전해줘!



p.s. 시간 날 때 답장 좀.

파나마에서 채리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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