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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쉐비 Aug 31. 2023

구닥다리 향수

동대표 시절에 대한 잘못된 미련

   8월의 정기회의 분위기는 사뭇 진지하고 무거웠다. 관리사무소 인건비 인상과 관련한 노인들의 반발이 계속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벌써 4개월 전에 의결하고 시행 중인 사항이라 사실상 되돌리기는 불가능한 상황이다. 어떻게 된 사정인지 그에 대한 민원이 뒤늦게 불거졌다. 이번 회의에서는 동별 대표자들의 의견을 모아 최종 입장을 정리하기로 하였다. 회의개최 공고를 하던 5일 전, 회장의 제안으로 기타 안건(민원사항 처리의 건)을 목록의 끄트머리에 추가하였다.


   통상 회의자료는 소장이 안건을 발굴하고 제목을 한다. 물론 회장이나 동대표도 안건을 제안할 권한이 있다. 하지만 실제로 이들로부터 제안이 들어오는 경우는 거의 없다. 무관심하거나 소장에게 미루는 일이 다반사이기 때문이다. 제안이 있다면 그것이 오히려 이례적이라 할 정도다. 기타 안건이 들어간 이번 회의가 그랬다. 안건의 제목최종적으로 대표님들의 확인을 받아 확정한다. 소장은 그때서야 비로소 의안의 세부 내용 작성을 시작한다. 사실은 틈나는 대로 미리미리 메모하며 초안 작업하던 것을 정교하게 다듬는 작업에 들어간다는 뜻이다. 안건마다 의결주문 - 제안이유 - 주요 내용 - 비용추계서 - 관련근거 순으로 내용을 기술한다. 관리규약으로 정해놓은 틀이다.


   금번 민원사항에 관한 회의자료는 회장님이 직접 작성하겠다하였다.  밖이었다. 소장의 시각으로 쓰는 것보다는 자신의 생각을 직접 피력하는 것이 낫겠다는 뜻으로 해석되었다. 동별 대표자들의 의견을 집약해 뜻을 모으겠다는 의지일 것이다. 비장하고 듬직해 보였다. 나로서는 고민스러운 내용을 하나 덜게 돼서 후련하고 반가웠다.^^


   월요일 아침, 이메일로 온 회장님의 자료를 내려받았다. 주말 내내 홀로 고뇌를 거듭하며 신중히 써 내려간 흔적이 역력하였다. 나의 생각과 별로 다르지 않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달리 조언할 만한 여지가 없었다. 나는 틀에 맞춰 회의자료 작성을 마무리하였다. 그리 경리주임의 협조를 받아 동별 대표자 숫자만큼 출력하고 한 부씩 갈색 대봉투에 정성껏 담았다. 동대표들에게 배포하는 일은 기전주임이 담당하였다. 나의 경험이 일천하기는 하지만, 이처럼 회의자료를 입주자대표회의 회장이 손수 작성하는 경우여태껏 보지 못했다. 이번이 처음이다. 관리소장이 할 일이기 때문이다. 그만큼 비장한 각오로 임하고 있다는 심경을 읽을 수 있었다. 고맙고 감사했다.

 

   회의의 시작과 끝은 회장이 의사봉을 각각 세 번 두드림으로써 선언한다. 의사진행은 회장의 주도 아래 소장이 설명하는 방식으로 진행된다. 서기는 대표 중 총무이사가 담당하며 개별 발언과 의결사항을 기록하게 된다. 우리 단지는 연로한 총무이사를 대신하여 두 명의 여자 감사 중 한 명이 수고를 해주고 계신다.


   회의는 바야흐로 막바지에 이르고 초미의 관심사인 민원사항을 다루는 순서가 되었다. 먼저 회장님의 서두 발언이 있었다.  건에 대해서는 특히 대표님들이 최소한 한 마디씩 의견을 말해달라고 요청하였다. 총의를 모으자는 뜻이었다. 대표들도 사안의 심각성을 알고 각자 소신을 피력하였다. 사뭇 심도 있고 진지한 토론이 이뤄지는 모습이었다. 대표들은 회장이 회의자료를 통하여 제시한 방안에 적극 지지를 표명하는 식으로 뜻을 모아주었다.


   결의사항을 전달하는 방법도 논의하였다. 처음에는 자초지종이 잘 드러난 회장의 회의자료 내용을 그대로 전체 입주민들에게 공개하는 방안을 유력하게 고려하였다. 하지만, 토의 끝에 채택하지는 않았다. 불필요한 논란을 불러올 수 있다는 우려에서였다. 그것보다는 같은 내용을 해당 민원인들에게 개별 통보하자는 의견이 우세하였다. 노인들의 반발이 불을 보듯 예상되기는 하지만, 원칙대로 흔들림 없이 밀고 가자는 쪽으로 결의를 하였다. 땅, 땅, 땅!

 

   회의는 끝났다. 회장은 자리에서 일어나지 않고 이제 허심탄회하게 얘기를 해보자며 계속 대화를 이어갔다. 뒤풀이하듯 분위기가 자못 느슨해지며 금방 달아올랐다. 화제는 아무래도 민원인들에 관한 이야기로 다시 모아졌다. 과거 다년간 마을 통장을 역임  감사가 당시 직접 보고 들은 일화를 소개하며 주목을 받았다. 금번 민원을 제기한 사람들이 그때 동대표를 같이 하던 시절이었단다. 한참 이야기를 듣던 중 아주 흥미로운 대목에서 귀가 솔깃했다.


   동대표이면서도 그들은 종종 직접 보수공사를 하더라는 것이다. 무료로 하는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다며 표정이 일그러졌다. 돈을 받아갔다고 했다. 공사비 대가로 챙겨간 셈이다. 일을 외부 업자에게 맡기지 않고 자기들이 직접 하니 비용이 싸게 들고 관리비도 절감되는 것이라는 식이었다. 금번 기전직원 1명 충원이 못마땅하다며 반발하는 이유가 거기에 있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나도 모르게 실소가 나왔다. 한마디로 괴변이었다! 그런 방식은 전혀 공정하지도 않고, 정의롭지도 않으며 투명하다고 할 수도 없다. 아무리 호랑이 담배 피우던 시절 이야기라 하더라도 납득하기가 어려웠다. 그런 도덕적 해이가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노인들이 혹여 지금도 그런 구닥다리 향수병에 젖어있다면, 시대착오도 이만저만이 아닐 수 없다. 

 

   맞는지 모르겠지만, 관리사무소를 기웃거리는 노인들의 속내가 어렴풋이 들여다 보이는 듯하였다. 흘러간 추억에 아직도 미련을 두고 있는 건 아닌지, 염불보다는 잿밥에 관심이 있는 건 아닌지 심히 의심스럽기만 하였다. 지난달, 대표들과 마주 앉아 대화를 가졌을 때 근엄하고 날카로웠던 어르신들의 목소리가 다시 떠올랐다. 그것은 시커먼 의도를 감춘 가식의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라는 생각에 비유가 상했다. 가관이다.


   구청에서도 민원이 접수되었다며 관리사무소로 전화가 왔다. 대체 무슨 일이냐며 구두로 상황파악 겸 점검을 하였다. 민원서를 통하여 관련 서류를 미리 살펴본 주무관의 반응은 간결하였다. 입주자대표회의에서 정식 절차를 밟아 결정한 것이므로 감독기관에서는 달리 조치할 사항이 없다는 것이었다. 시간의 흐름에 따라 업무환경이 변화하고 더욱 촘촘해지는데 사람의 사고방식은 좀처럼 바뀌기가 어려운 모양이다. 사람은 나이가 들수록 더욱 확실한 자신이 되어간다고 하더니 그들을 상대하기 어려운 까닭이 그 때문 인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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