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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쉐비 Aug 20. 2023

그냥 우리 식대로 살자고 했다.

뒤늦게 불거진 민원

   세대 내 베란다 쪽 거실 벽면이 물에 젖었다며 관리사무소에 보수를 요구한 민원이 접수되었다. 베란다의 한쪽 구석을 수직으로 관통하는 우수관에서 물이 새 들어온다는 것다. 즉시 기전과장을 현장에 보내 확인하도록 하였다. 점검 결과, 가까운 과거에 세대에서 확장공사를 했던 사실을 확인할 수 있었다. 누수 원인은 그로 인한 것이며, 따라서 보수작업은 입주자 부담으로 해야 한다고 알려주었다. 세대주는 기전과장의 설명을 듣고 순순히 수긍하였다. 민원은 그렇게 종결되었고 민원대장을 정리하였다.

 

   입주자 등은 자기 집에 무슨 문제가 발생하면, 무조건 소장을 찾는 경향이 있다. 책임자에게 직접 다짐을 받고 싶은 마음에서다. 민원인의 심정은 십분 이해하나 그렇다고 그런 방식이 반드시 옳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기술자가 봐야 한다. 소장의 전공이나 전문분야가 무엇이냐에 따라 원인 규명과 치유책을 직접 제시할 수도 있고, 그렇지 못할 수도 있다. 특히 그가 사무직이나 행정직에 종사했다면, 명쾌한 판단과 처방을 내놓기는 어렵다. 나 역시 그쪽 부류에 속하기 때문에 기술적인 사항은 일단 기전과장이 전담하게 다. 그게 효율적이기 때문이다.


   처리방향은 기전과장이 현장에 체크한 사항을 들어보고 같이 상의하며 결정한. 가급적이면 내가 다시 가서 직접 확인하는 과정을 거친다. 그래야 더 확신할 수 있고, 민원인이나 대표님들에게도 정확하게 설명을  있기 때문이다. 보수작업이 불가피하다면, 관리사무소와 해당 세대 중 책임 소재가 어느 쪽에 있는지를 분명하게 가리는 것이 우선이다. 그것은 동시에 예민한 비용부담 주체를 가리는 일이기도 해서 중요다. 


   관리비를 투입해야 할 사안이라면, 마땅히 입주자대표회의 안건으로 상정하고 사전 동의를 받아야 한다. 그러한 일은 전적으로 관리소장의 몫이다. 소장이 관리업무를 지휘총괄하지만, 기전과장이 격일제로 일하게 되면 이러한 일상적 분업이 원활히 이뤄지기가 쉽지 않다. 최근 과장의 근무방식을 일근제로 바꾸고 나서부터는 분위기가 확실히 달라진 것을 체감할 수 있었다.


   이제 막 시스템이 갖춰졌다고 생각했는데 견제가 들어왔다. 격일제로 근무하던 기전과장을 일근제로 전환하고, 그 자리를 대체할 맞교대 기전직 주임 한 명을 증원한 지 4개월이 되던 시점이었다. 당연히 입주자대표회의 의결을 거쳐 결정한 일이었다. 80세 전후 연령의 노인 4명이 뒤늦게 이의를 제기하고 나섰다. 우리 단지에 할 일이 뭐가 그리 많다고 한 명을 더 뽑느냐, 게다가 봉급까지 올려주다니, 말도 안 된다며 언성을 높였다. 다른 단지들이야 어떴게 하든 우리는 그저 우리 식대로 살면 된다고 말하였다. 직원 안 늘리고 봉급 안 올려줘도 전혀 문제가 없다는 것이다. 모두 취소하고 원상 복구하라는 요구였다.


   공무원 출신의 점잖은 회장님이 화들짝 놀랐다. 노인들의 주장처럼 사전에 주민동의를 받았으면 좋았을 것이라며 안타까워. 듣자 하니 일말의 후회가 담긴 듯한 뉘앙스로 들려 유감스러웠다. 애당초 결정할 때 좀 더 신중을 기했으면 좋았으련만.ㅠ.ㅠ. 물론 직원 증원이나 급여인상 시 사전에 주민동의를 받아야 한다는 규정은 없다. 그것은 곧 공무원 봉급을 인상하기 전에 미리 국민투표로 동의를 구해야 한다는 말이나 다름없는 식의 주장이었다. 아전인수격이다. 내가 너무 규정만 들먹이며 방어에 집착하는 건 아닌지 돌아보기도 하였다.


   최근 몇 년 사이에 법적으로 관리주체가 수행해야 할 일들이 많이 늘었다. 최악은 관리영역이 아닌 세대 내 전유 부분의 전기설비와 소방설비를 관리주체가 각각 전수 점검하도록 법률로 규정한 것이다. 세대 내 시설에 문제가 발생하면 관리주체가 책임지라는 것이냐며 업계의 반발도 큰 상황이다. 중대재해처벌법과 산업안전보건법 등 근로자의 안전을 우선하는 조치들도 법률로 강화되었다. 2인 1조는 이제 작업의 기본원칙으로 정착되고 있다. 법적 의무는 반드시 책임소재와 과태료 등 벌칙을 수반한다. 관리감독자로서는 이런 으스스한 상황을 모른 채하고서 그냥 얼렁뚱땅 넘어갈 수는 없는 일이다.


   게다가 전기 분야의 실무경력 인정기준을 강화한 영향도 크다. 종전에는 자격취득 전에 쌓은 경력도 인정해 주었으나, 2021년부터는 자격을 취득한 이후의 경력만 인정하도록 법률을 개정한 데 따른 것이다. 전문인력의 공급이 줄어들 수밖에 없게 되었다. 전기과장 구하기가 더욱 어려워지고 덩달아 몸값도 치솟았. 급여인상이 불가피했던 이유다. 한 사람의 급여를 조정하면 직책 간 역전현상이 발생하기도 해서 연쇄조정이 불가피한 사정도 있었다. 관리업무 환경이 크게 변화함따른 조치였다. 


   국민의 생명과 안전을 중시하는 법적 의무가 실제 늘어나고 있음에도 현장에서 관리인력 한 사람 더 뽑는 일은 지난하기만 하다. 국가는 제조하듯 마구 법을 만들어내, 관리인력은 사적영역이니 알아서 하라는 식이다. 인식의 차이가 너무 크다. 관리소장이 그러한 환경과 제도변화를 소개하고 설명하더라도 대표들과 주민들을 이해시키기가 쉽지 않다. 단지 규모별 적정 인력이 어느 정도이어야 하는당국의 가이드라인이라도 나와야 할 판이다.

 

   노령의 민원인 네 사람은 과거 동대표 활동을 함께 했던 사이로 확인되었다. 그 당시 경비인력을 절반으로 줄였는데, 그때에도 사전에 주민동의를 받았노라며 의기양양했다. 그러니 이번처럼 직원을 한 명 더 뽑고, 급여를 인상하는 등 주민들에게 금전적으로 부담이 되는 사항은 당연히 동의를 받아야 하는 것 아니겠느냐목소리를 높였다. 노인들의 주장은 일면 이해는 가나 딱히 동의하기는 어려웠다. 처리과정에서 법령과 규정에 충실하였기 때문이다. 물론 규정 이상의 충분한 조치를 취함으로써 공감을 확보할 수도 있겠으나, 절차적 정당성을 벗어나지 않는다면 그건 아무래도 과잉이라는 생각을 떨치기가 어려웠다.


   민원을 제기하며 반발하는 사람들이 이례적으로 원로급 입주자 네 분이어서 처음에는 고대 중국 상산사호(商山四皓) 격이 아닐까 미리 상상도 하였다. 진나라가 무너지고 유방이 한나라를 창업한 초기 시절, 산속에 은거하던 덕망 있는 노인들 이야기다. 그런 역할을 해준다면 참 좋겠다는 순진한 생각이 머릿속을 스쳤다. 지금 눈앞에서 벌어지고 있는 상황지켜보고 있자니 내가 참으로 부질없는 망상에 빠져있음을 금방 깨달아야 했다.ㅋ


   가장 먼저 직원들과 이야기를 나눠봤다. 거부반응이 완강했다. 업계의 동료들, 관리주체 본사의 관계자의 견해도 물어보았다. 끝으로 고문 노무사에게도 자문을 구하였다. 과연 이 민원을 어떻게 대응할 것인지 처리방향이 뚜렷해졌다. 자칫하면 노무사고에 직면할 위험이 크니 원래대로 가는 것이 좋겠다는 것이 중론이었다. 여기서 흔들리면 당초 의사결정을 했던 입주자대표회의의 위상이 추락하고, 나아가서는 최종적 책임도 떠맡아야 할 가능성이 크다는 것이다. 아무래도 입주자대표회의가 중심을 잡고 초지일관하며 흔들림 없이 가면 될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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