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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쉐비 Jun 11. 2023

지하 휴게실에서 나눈 밀담

따뜻한 카리스마

   일터에서 인상이 좋다는 말을 들으면 별로 갑지 않다. 사람 좋다고 하면 더욱 그렇다. 런 말을 하는지 일단 의심을 하고 저의를 파악하느라 머리가 분주해진다. 우리 사회의 상식이자 인지상정다. 그간의 내 행동과 처신에 무슨 문제가 있었던 아닌지 흠칫 놀라며 자신을 돌아보게 된다. 인상 좋고, 사람 좋다는 그 말이 어디까지 진심이고 어디서부터 허구인지 그 겉과 속을 구분하기란 쉽지 않다. 그 사람의 의도를 정확히 파악하기 전까지는 왠지 마음이 찝찝하고 불편하다. 특히 같이 일하는 직원들을 그런 눈으로 바라봐야 하는 상황이라면 피곤해진다.


   오늘도 밖에서 점심 식사 후 동네 한 바퀴를 돌았다. 운동 삼아 나가지만, 걷는 동안은 갖가지 생각이 떠오르고 또한 가다듬기 좋은 시간이다. 철학자 루소는 반드시 몸을 움직여야 머리가 잘 돌아간다며 걷기를 즐겼다. 매일 오후 콩코드 교외를 걸었던 헨리 데이비드 소로 역시 루소처럼 다리를 움직이지 않으면 명료하게 사고하지 못했다고 한다. 자신의 감각을 되찾기 위해 어슬렁거리기를 좋아했다는 것이다. 니체, 칸트 등 철학자 중에는 걷기를 즐긴 사람이 적지 않았던 것 같다. 에릭 와이너가 그의 작품 '소크라테스 익스프레스'에서 나에게 전해준 이야기. 나 역시 움직여야 정신이 활성화된다는 것을 경험으로 잘 알고 있는 터다.


   "소장님, 이리 오셔요. 박카스 한 병 드시고 가세요." 산책의 마지막 코스인 지하주차장에 들어서자마자 때마침 자신의 휴게실을 나서던 미화반장님이 나를 보고 반가워하며 말했다. 휴게실로 같이 들어가며 무슨 일이 있는 거냐고 물었더니 그런 건 아니라고 하였다. "그럼, 무슨 할 말이라도...?" 반장님은 냉장고에서 시원한 박카스 한 병을 꺼내어 손수 뚜껑을 따고서는 나에게 건네주었다. "소장님이 여기 오래 계셔야 해요" "네...? 뚱딴지같이 그게 무슨 말이요?" 혹시 내가 모르는 사이에 누군가 나의 거취를 들먹이는 사람이 있다는 것일까. 어디선가 그런 소리를 듣고 저렇게 말하는 건 아닌지 간적으로 별 생각이 다 스쳤다. 뜻밖의 말에 은근한 불안감이 목구멍을 타고 올라오는 듯 따끔하였다. 마른침을 꼴깍 삼키며 반장님의 입을 주시하였다. "우리는 소장님이 좋아요..." 대체 무슨 말을 하려고 그러는 것인지 끝까지 들어보기로 하였다.


   반장님은 다른 데서 일할 때 겪었던 속상한 경험담을 들려주었다. 소장들님들은 보통 미화원들을 상대하지 않고 거들떠보지도 않는다는 것이다. 그런데 나는 그들을 인간적으로 대해주고 이야기도 잘 들어주니 너무나 좋고 감사하고 했다. 그러니 내가 다른 곳으로 안 가고 여기에 계속 있어야 미화원들도 같이 오래 일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그건 의심할 바 없이 나에 대한 감사의 표시라는 것을 금방 알 수 있었다. 왕년에도 어디선가 경비원들한테서 들었던 바로 그 말, 우리 같은 놈들 사람 취급해 주시니 감사합니다요! 반장님의 말을 듣고 보니 진심이 느껴졌다. 그들 마음 내가 잘 아니까. Clear!


   미화원뿐만 아니라 관리사무소 직원과 경비원들에게나는 마찬가지로 똑같이 대한. 당연하다. 그들도 각자 집에 가면 그 단지의 입주민이라는 사실을 생각해보기도 한다. 소장의 말과 행동은 파급력이 커서 어느 모로 보더라도 가벼워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다. 관리회사의 능력과 이미지를 좌우하는 잣대나 다름없다. 모범적인 면모가 배어 있어야 하고 그것이 말과 행동을 통하여 밖으로 드러나야 한다. 직원들을 대하는 태도와 말이 곧 리더십의 중요한 부분을 구성하기 때문이다. 일하는 게 시원찮으면 쥐도 새도 모르게 엄격한 조치가 뒤따를 수 있다는 사실을 잊지 말라고 주지하는 일도 필요하다. 부드럽고 따뜻한 분위기를 조성하되 처분은 냉정하다는 방침을 알게 하는 것은 중요하다. 따뜻하되 카리스마가 있어야 영이 바로 설 수 있기 때문이다.


   지하 휴게실에서 반장님과 단 둘이 나누는 밀담이 생각보다 길어졌다. 처음부터 반장님이 나에게 전해주고 싶은 말들이 있었던 것 같고, 듣다 보니 내가 묻는 사항도 자꾸만 늘어났다. 기왕 자리가 만들어진 김에 나는 평소에 궁금했던 점들로 확대하며 호기심이 마구 발동하기 시작하였다. 의외의 수확이 많았다. 오늘은 특히 직원관리에 참고할 만한 고급정보가 많았다. 평소 내가 전혀 모르고 있었던 점이라서 놀랍고 충격적인 뉴스도 제법 있었다. 반장님은 진정으로 나를 돕고 싶은 심정에서 작심하고 이야기 보따리를 풀어놓고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고마웠다. 그러니 서둘러 자리를 뜰 수가 없었다.

 

   여기서 6년 이상 오래 근무한 사람들이 주로 화제의 대상으로 떠올랐다. 기전직 강 주임과 경비원 장 반장. 매너리즘에 젖어 자기주장을 자주 드러내는 두 사람이다. 오늘도 걷는 동안 그들 생각을 많이 했다. 그런데, 그들의 머릿속을 들여다보는 듯한 뜻밖의 정보를 여기에서 들을 수 있었다. 강 주임은 지난번 전기과장이 사직서를 냈을 때 그가 떠나면 자기도 한 달 후에 그만두겠다고 말했다는 것이다. 아직 계약기간이 많이 남아 있어 언제 그만두나 지켜보고 있었는데 벌써 마음이 떠나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한편, 올해 나이 80을 넘긴 장 반장은 주민들에게 소장이 직원을 편애한다며 뜬금없는 험담을 하고 다닌다는 것이었다. 엊그제 나에게 찾아와 교대조 경비반장을 비난하며 자신을 호소하기도 한 사람이 그랬다니 충격이었다. 뭔가 움직임이 심상치 않은 예감이 들었다. 이달 말 계약기간 만료를 앞두고 또 모종의 수작을 벌이고 있모양이 역력하였다. 내 앞에서는 멀쩡한 표정으로 입발린 소리나 하고 뒤로는 호박씨를 사람의 마음을 이제야 확인할 수 있었다. 비로소 하늘에 낀 구름이 걷히는 것처럼 머리가 맑아졌다. 무신불립이다. Perio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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