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리사무소에 벨이 울리면, 경리가 가장 먼저 전화를 받는다. 회계업무가 기본이지만, 일선의 민원 창구 역할을 전담하고 있기 때문이다. 50대 초반의 맘(Mom)인 윤 주임은 맡은 바 일을 똑 부러지게 잘 해낸다. 표정이든 목소리든 항상 웃는 모습으로 응대하는 태도가 지켜보는 사람까지 기분 좋게 한다. 고객만족을 강조하는 내 마음에 쏙 들 정도다. 생각해 보면, 지금까지 겪어본 경리 중 이런 사람 없었다. 내가 직접 뽑고 지도한 사람이라 더 뿌듯하다.
거의 100%가 여성인 경리직 직원은 부드럽고 인간적이며 젠틀하게 대해주는 소장을 특히 선호하는 경향이 있다. 사실 관리사무소에서 일하는 사람들 대부분이 그렇다. 우리 윤 주임도 그럴 것이다. 그렇다고 나는 일부러 직접적으로 칭찬하지는 않는다. 가끔 동대표 등 다른 사람들한테만 간접적으로 할 뿐이다. 언제 어떻게 튈지 모르는 인간의 심성을 경계하기 때문이다. 잘 맞는 사람과 가급적 롱런 하고 싶은 애정표현이기도 하다.^^
"네~, 그러세요? 그럼 소장님 바꿔드릴게요" 월요일 아침 일찍 한 입주민이 걸어온 전화를 받고 윤 주임이 나에게 돌려주었다. 전화기 속의 남자 목소리는 자신이 관리사무소 바로 옆 동 1층에 사는 사람이라고 소개하였다. 꼭 나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다며 지난 주말부터 애타게 찾았다고 했다. 대체 무슨 일이기에 그랬다는 것인지 약간의 긴장감이 느껴졌다.
듣자 하니, 소음 관련 민원이었다. 도저히 참기 어려우니 제발 중재역할을 해달라는 주문이었다. 바로 위 2층 집에 대한 불만이었다. 무시로 베란다에서 1층 보도를 지나가는 사람들과 큰소리로 얘기를 하는 바람에 그로 인한 스트레스가 이만저만이 아니라는 것이었다. 아무 상관도 없는 자기네가 왜 남들끼리 나누는 한가한 잡담을 날이면 날마다 억지로 들어야 하는지 모르겠다며 분통을 터트렸다. 지나가는 사람은 2층 베란다를 바라보고 하는 얘기지만, 1층에 사는 사람 입장에서는 마치 자기 집에다 대고 하는 말처럼 들린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마주 보고 있는 건너편 앞동 사람과 서로 베란다에 서서 얘기를 나누는 일도 있다고 했다. 베란다에 이불을 널거나 털기도 하고, 때로는 물을 아래쪽 화단으로 홱 뿌리기도 한다며 온갖 불평을 털어놓았다. 듣고 보니 참 힘드시겠다며 내가 맞장구를 쳐주었다. 사실은 그 2층에 사는 사람들은 내가 잘 아는 분들인데 그런 일이 있다고 하니 의아하고 황당한 생각이 들었다. 1층에서 겪는 그런 애로사항을 윗집에 꼭 전해드리겠다고 말하고 전화를 끊었다.
퇴근 시간이 다된 즈음, 오늘 접수한 민원을 마저 마무리하고 가야겠다는 생각에 전화기를 꺼내 들었다. 70대 초반의 2층 어르신은 내 말을 가만히 듣고 나서는 뜻밖에도 정색을 하고 화를 냈다. "소장님, 그게 민원이요?" 자주 대화를 나누며 호의적인 관계라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큰 오산이었다. 갑자기 분위기가 싸늘해지며 둑이 무너져내리는 기분이었다. 당혹스러웠다. 더 달래 볼까 생각하다가 나 역시 바른 소리로 응수하고 말았다. "아니, 아랫집 사람이 애로가 있어서 민원을 냈는데 그럼 어떡하라는 말입니까?" 나는 황당한 입씨름을 꼬박 한 시간 동안 계속하다가 전화를 끊고 사무실을 나섰다. '야, 사람이 이렇게도 돌변할 수가 있구나!'
다음날 아침 어르신 부부가 관리사무소로 찾아왔다. 지나가는 사람과 인사말도 못하냐, 그런 것도 못 참으면 다른 데로 이사를 가야지 그 사람 여기에 왜 사냐며 나에게 항변을 계속하였다. 그런 건 소장 선에서 끊어야지 왜 굳이 나에게 전달하냐며 반발하였다. 민원이 뭔지 도무지 구분하지 못하고 오로지 자기 생각만 하는 막무가내식이어서 답답했다. 평소 내가 아는 그 사람이 맞는지 의심스러웠다. 어르신은 난데없이 지난달 채용한 기전주임 얘기를 하며 그때는 왜 주민동의를 안 받았냐며 시비를 걸었다. 이건 또 무슨 소리인가! 대표들이 결정하면 다냐고 눈을 부라리며 나를 노려보았다. 그뿐만이 아니라 다른 일들도 꺼내며 나에게 압박의 수위를 높였다. 크게 감정이 뒤틀린 모습으로 당신 가만두지 않겠다는 눈초리였다.
제삼자가 제기한 민원처리 과정을 전혀 다른 말로 나를 압박하는 모양새로 돌변하였다. 속이 빤히 들여다 보였다. 그의 어이없는 처사는 나에게 가하는 무지막지한 위협이고 협박이라고 느꼈다. 그럴수록 침착해야 했다. 결판을 낼 상황이 아니라면 내가 더 참는 것이 답이라고 생각하였다. 두 집이 한자리에 만나서 얘기를 나눈다면 뭔가 해답이 나오지 않을까 하는 막연한 기대가 있었다. 화해를 모색하고자 면담을 주선하였으나,1층 집의 아저씨도 아주머니도 모두 만나고 싶지 않다며 거부해 성사되지 않았다. 잠깐 사무실에 오실 수 있냐며 1층 내외분과 번갈아가며 전화로 나눈 대화가 길어졌다.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던 어르신은 다소 누그러진 표정을 짓고서는 곧 물러갔다. 그의 뒷모습을 보며 전임 소장이 인계인수를 마치고 떠나던 날 나에게 남긴 말이 떠올라 나도 모르게 쓴웃음이 나왔다. 그래, 자칫 뒤통수를 맞을 수 있다는 그 말은 옳았다.
어쩐지 그날 새벽잠이 일찍 깨 책을 읽다가 자꾸만 나의 마음을 끄는 대목이 있었다. 주배오시무! 주요 부분의 첫 글자를 모아 암기를 해둘까 싶어서 여러 번을 되뇌어보았다.^^ 공교롭게도 바로 당일 이런 일이 생기다니 참으로 이상야릇한 일이었다. "아침에 잠에서 깨면 스스로에게 이렇게 말할 것. 오늘 네가 만날 사람들은 주제넘고 배은망덕하고 오만하고 시샘이 많고 무례할 것이다. 지금도 마르쿠스가 살던 시기와 별반 다를 게 없다."(에릭 와이너가 쓴 '소크라테스 익스프레스' 중에서).
믿는 도끼에 발등 찍힌는다는 격언처럼 사람을 너무 믿을 일이 아니었다. 특히 일하는 현장에서는. 거기는 언제든지 가시와 송곳이 날카로운 모습을 드러낼 수 있는 장막과도 같으니 지극히 조심하고 경계했어야 했다. 하지만,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가 가졌던 방식은 나에게도 여전히 약효가 좋은 어드바이스다. "골치 아픈 사람에게서 영향력을 빼앗으라. 나의 삶에 영향을 미칠 자격을 빼앗을 것. 다른 사람은 나를 헤칠 수 없다." 사랑하고 싶은데, 사랑할 수 없는 현실이 서글프기만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