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있었던 정기회의는 은근히 분위기가 뜨거웠다. 회의가 진행되는 동안, 지나간 며칠 사이에 내가 대체 무슨 일을 저지른 것인지 속으로 되돌아봐야 했다. 기전과장의 사직서 제출에 따라 후임자채용에 관한 추인 안건을 의결하는 순서였다. 입주자대표회의 구성원인 동별 대표자들은 급여, 인원, 휴게시설 등 대대적인 처우개선책 강구가 절실하다는 나의 의견을 받아들여 이미 전원 합의한 상태였다. 정기회의를 열기까지 마냥 기다릴 여유가 없는 상황이어서 비대면 회의 채널인 단톡방에서 이뤄진 일이다.
기전과장의 급여를 대폭 인상하고, 격일제를 일근제로 바꾸기로 하였다. 대신 격일제 맞교대 근무 자리를 메꾸기 위해 기전주임을 한 사람 더 충원하자는 데에도 이의 없이 뜻이 모아졌다. 합의에 따라 주임 급여도 역시 상당폭 올려서 공고를 냈다. 곡절 끝에 채용을 완료할 수 있었다. 험난한 파도타기 같이 느껴지던 게임은 일찌감치그렇게 끝이난 상황이었다.이번 정기회의에는 이처럼 사전에 비대면으로 결의했던 사항을 공식화하는 내용이 주요 안건의 하나로 상정되었다.
이런 경우, 이 사안에 관한 한 정기회의는 사실상 요식절차나 다름이 없다. 그간의 합의 과정이 스무스했기에 나는 별문제 없이 통과될 것으로 낙관하고 있었다. 하지만, 막상 뚜껑을 열고 보니 그게 아니었다! 사뭇긴장감이 감돌았다. 화장실 다녀와서 마음이 달라진 격이라 할까. 정작 서로 얼굴을 맞대고 토의하는 회의장에서 훔쳐본 동대표들의 표정과 태도가 심상치 않았다. 여러 의제 중 가장 부담스러운 안건이라는 말을이구동성으로토로하였다. 인상폭이 너무 커서 관리비고지서가 나가면 주민들이 과연 뭐라 하지 않을까 신경 쓰인다며 마뜩잖은 견해들을 쏟아냈다. 전혀 예상하지 못한 뜻밖의 발언이었다.'아니, 지금 이건 무슨 상황이지...?'
한편으로 생각해 보면, 그럴 수도 있겠다는 대표님들의 기분을 십분 이해할 만하였다. 기왕에 비대면으로 동의했던 사항이기는 하지만, 회의에서는 난상토론 끝에 어려운 결정을 내렸다는 인상을 남기고 싶다는 의도된 발언으로도 보였다.애초 직원들의 처우를 개선해 주자는 회장님의 선창에 70대 중반의 연장자로서 흔쾌하게 동의를 표시해 다른 사람들의 동참을 이끌었던 김 이사님이 가장 먼저 불만섞인 발언을 꺼냈기 때문이다.
반면, 당시에는사정이 어렵다는 말을 듣고 어쩔 수 없이 동의했지만,지금 와서생각해 보니 후회가된다는 뉘앙스로도 들렸다. 그때는 좋았고 지금은 좀 찝찝하다는 어르신의 뒤틀린 심사인가 싶어 자못 실망스러웠다. 나는 소장으로서 난국을 타개하고자 중간에서 중재 역할에 최선을 다했다고 생각하고 있던 참이었다. 하지만, 대표들의 발언을 듣고 보니 내가 너무 오버해 괜히 죄를 지은 것 같기도 하고,다른 한편으로는 배신당한 기분도 들었다. 갑자기 마음이 혼란하고당혹스러웠다.
처음 구인공고를 내고 나서 지켜본 마음은 허탈했다. 조회 기록이 수백 명에 달하고 있었지만, 정작 이력서를 제출하는 지원자는 단 한 사람도 없었다. 시시각각 올라오는 새로운 구인공고로 인하여 내가 낸 공고는 금방 저 뒷 쪽으로 묻혀버리기 일쑤였다. 주목을 끌기 위해 다시 똑같은 내용을 여러 번 반복해 올려보기도 했지만, 이미 알고 있다는 듯 더 이상의 약효는 없었다. 입질이 현저하게약해지는 모습을 한눈에 확인할 수 있었다. 어떡해야 하나. 답답했다.
떠날 날을 정해 놓고 후임자가 속히 나타나기를 기다리고 있는 김 과장에게 뭐가 부족한지 공고내용에 관한 코멘트를 부탁하였다. 경리 주임에게는 주변 단지 관리사무소에 전화해 급여 수준을 파악해 보라고 하였다. 나는 구인공고문 50개를 출력해 지역별 급여 수준과 경력조건을 집중 분석해보았다. 끝으로 본사 본부장에게도 애로사항을 전하고 이런 상황에서 급여가 얼마면 되겠냐고 조언을 구하기도 하였다.
모든 자료를 종합해 보니 문제와 방향이 분명하게 드러났다. A4용지에 간략히 정리한 상황보고서를 만들어 입주자대표회의 단톡방에 올렸다. 1안, 2안, 3안. 결론 부분에 3가지 선택지를 마련하는 일을 잊지 않았다. 나름 심리적 처방을 가미해 옵션을 배치하는 등 마치 맛있는 밥상을 차리는 기분으로 정성껏 준비를 하였다. 판단하고 결정하는 일은 입주자대표회의의 권한이지만, 제반 상황을 잘 정리하고 분석하는 일은 내가 해야 할 몫이다. 나의 역할이 중요하다는 것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그리고, 절대 실기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였다. 침체된 분위기를 반전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라는 점도 놓치고 싶지 않았다. 상황이 변화하는 것을 면밀히 지켜보며 그런 보고서를 두 번 올렸다. 대표님들은 처음에는 2안을, 두 번째는 3안을 택해 의견을 모아주었다. 모두 내가 제시한 의견에 전적인 동의를 표시해 줘서 감사했다.
작년 말, 임기가 끝나고 다시 선출돼 중임 중인 유 감사님이 회의장에서 급여인상에 관한 지난날의 히스토리를 간략하게소개해준 일은 적절했다. 동결하거나 찔끔 인상한 여러 해가 쌓이다 보니 우리가 주변 단지들에 비하여 상대적으로 쳐지게 되었다. 그 폭이 너무 벌어져서 구직자들의 외면을 받게 되었고, 급기야는 이번처럼 한꺼번에 대폭 올려야 하는 상황에 직면하게 되었다. 사실 관리사무소 직원들이 호소하고 싶어도 쉬이 말하지 못했던 점을 차분히 대변해 준 셈이어서고마웠다. 그만큼지금의 대표님들이 그 부담을 송두리째 안고 내린 어려운결단의 순간이 그렇게 지나갔다.
"이번 일은 소장님의 용인술이 아니었나 생각한다"며 나를 바라보고 말한 김 이사님의 일침이 약간은 따끔하였다. 조건이 파격적으로 바뀌는 바람에 당초 사직서를 냈던 김 과장을 설득해 같이 일하자며 다시 붙잡아뒀기 때문이다. 하지만, 일을 전혀 뜬금없이 처리한 것은 아니었다. 연초 개회 시 회장을 비롯한 신임 대표님들이 직원들의 처우개선에 대한 의지를 비친적이 있었다. 의외였고 반가웠다. 그분들이 그런 호의적인 생각을 가지고 있다는 점을 희망의 씨앗으로 간직하고 있던 차였다. 또한 이번에 전향적인 모습으로 뜻을 모아준 덕분에 잡음 없이 소기의 지점에 연착륙할 수 있었다. 그 생각의 저변에는 무엇보다 관리소장에 대한 신뢰가컸다고 생각한다. 끊임없이 소통하고 경청하며 물 흐르듯 일을 처리하는 방식에는 가시가 있을 수 없다. 상선약수(上善若水)다.
결과적으로 기전과장이 갑자기 그만두겠다고 선언하는 바람에 관리소장 급여도 덩달아 올려야 하는 호사를 누리게 됐다. 과장 월급을 인상하고 나니 소장보다 많은 역전현상이 발생해 최소한 과장에게 올려준 만큼의 인상이 불가피하였다. 대표님들은 이러한 연쇄반응을 뒤늦게 확인하고 나서야 화들짝 놀랐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어쩌나... 그나저나 앞으로 소장 월급은 과장에게 물어봐야 할 판이다. 웃어야 하나 울어야 하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