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단지에서 나에게 주어진 시간은 여기까지라고 생각하였다. 시청 감사가 끝나고 딱 1주일 만이었다. 지체 없이 입주자대표회장님께 전화를 드렸다. "다음 주까지만 근무하고 그만두겠습니다." 갑작스러운 통보에 그는 다소 당혹스러워하는 목소리로 무슨 일이냐고 나에게 물었다. 정말로 놀라서 하는 소리가 아니라는 것을 직감할 수 있었다. 그건 그동안 내가 느끼고 짐작한 그대로였다.
그는 지난봄 자신이 주도한 입주자대표회의에서 결의했던 인건비 증액을 후회하고 있었다. 그때는 법대로, 절차대로 하자 없이 처리했다며 다른 대표들 앞에서도 당당한 모습이었다. 서너 달 후, 일부 노인들의 강한 반발과 질책이 이어지자 점차 자신감을 잃고 기가 꺾이기 시작하였다. 급기야는 꼭 짚었어야 할 뭔가를 빠트려 이런 사달이 일어나고 말았다며 일말의 죄책감까지 느끼는 듯하였다. 일종의 아차사고처럼 보였다.
회장만 그런 것은 아니었다. 다른 동대표들 역시 부담감을 느끼기는 마찬가지였다. 차라리 자신들이 한 일을 스스로 부정하거나 뒤집고 싶은 속내가 여러 번 말속에 묻어 나왔다. 애처로워 보였다. 격앙한 노인들에게 뭔가 성의표시할 만한 먹잇감을 찾는 눈치들이었다. 이 마당에 달리 누구를 탓할 것인가. 관리소장인 내가 희생양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진즉부터 동대표직을 그만두겠다고 공언해 오던 회장은 내가 그처럼 먼저 선수를 치는 바람에 순간적으로 멈칫했을 뿐이다.
주민들의 대의기구로써 입주자대표회의가 결정한 관리비 인상에 반발하거나 반대한다고 해서 마냥 그들을 미워할 일은 아니다. 오히려 그들의 사정과 의사를 사전에 충분히 살피지 못했던 점을 찬찬히 돌아볼 일이었다. 비록 그렇게 하지는 못했을지언정 그것이 오로지 동별 대표자들만의 실수라고 몰아붙일 일도 아니었다. 모르는 사이에 몸값이 많이 뛰어버린 전기과장 등 구인 시장의 달라진 상황도 무시할 수는 없었다. 의사결정권자들이 이해관계가 대립하는 양극단에 서있었던 건 맞다. 결과가 다소 부족하고 만족스럽지는 못하더라도 주민정서에 부합할 수 있는 균형점을 찾기 위한 노력을 더 기울였어야 했다. 반성과 아쉬움이 남는다. 회장의 뜻을 충실히 좇기보다는 소장이 더 넓은 시야를 갖고 임해주기를 바라는 마음도 읽었어야 했다.
동대표들이 나를 신뢰한 나머지 별다른 이의를 달지 않고 넘어간 것이 문제라면 문제였다고 할까. 대표들이 소장에게 끌려다닌다는 둥, 소장이 대표들을 오도했다는 둥 생각지도 않은 뒷말들을 들어야 했던 점은 괘씸할 정도로 섭섭하고 가슴 아팠다. 그동안 잘 가꿔온 이미지가 한순간에 추락하는 기분이었다. 주민들로부터 원성을 사고 결과적으로 환영받지 못하는 상황이라면 순순히 물러나는 것이 맞다고 판단하였다. 무슨 잘못이 있어서가 아니었다. 그렇게 결정한 당신들 대표들의 잘못 아니냐며 항변하는 일은 차마 할 수가 없는 일이었다. 차라리 소장인 내가 그들의 안전에서 사라지면 경색되고 난처한 분위기를 다소나마 진정시키는 데 보탬이 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런 와중에 본사에서 전화가 왔다. 이곳의 갈등상황을 잘 알고 있는 담당 본부장이 나에게 이른바 SOS 전화를 했다. 인근지역의 다른 단지로 자리를 옮기는 것이 어떠냐며 전배(轉配)를 제안하는 것이었다. 그쪽 사정이 어렵고 급하다며 당일 중 가부간의 결심을 재촉하였다. 당혹스러웠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반갑기도 하였다. 연령이 있고 듬직하며 노련한 소장을 원하는 곳이라서 나를 추천하는 것이라고 마구 추켜세웠다. 본부장 경력 8년을 쌓은 사람의 눈이라며 내가 거기 잘 맞을 것이라고 판단한 결과라고 너스레를 떨었다. 과장이 좀 심한 것 같았다. 나는 일전에 이곳 상황을 전하며 차라리 근무지를 바꾸고 싶다는 의사를 그에게 비친 적이 있었다. 양수겸장을 노리는 포석이었다.
비록 노련미는 부족하지만, 제안받은 그 단지가 집에서 훨씬 가깝고 지하철 출퇴근이 가능하다는 점이 구미를 당겼다. 힘든 줄 모르고 거의 2년 가까운 시간 동안 지나치던 죽전사거리의 심한 교통체증도 이참에 벗어나고 싶었다. 새로운 그곳으로 가더라도 거기도 결코 만만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렇지만 일단은 환영받을 수 있겠다는 기대감이 있어 마음이 가벼웠다. 이제 막 지자체 감사까지 받은 뒤여서 과거보다 훨씬 확신을 갖고 일할 수 있을 것 같은 생각도 들었다. 이제야 비로소 어리바리하던 초보의 껍질을 벗어던지고 한층 성숙한 단계로 접어드는 기분이었다. 미련 없이, 흔쾌히 떠나기로 하였다. 생애 처음으로 내가 이렇게 쿨하게 결단할 수 있다는 것이 기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