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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쉐비 Nov 29. 2020

왕고집 우렁각시

여보, 나 운동 좀 하게 내버려 둬

   ‘쉐비, 기온이 이렇게 찬데 산에 가나요. 이런 날은 낮에 가야죠. 무리하면 감기 걸려요.’ 이제 막 동이 틀 무렵, 살며시 대문을 열고 나와 아침 산보를 나선 지 10분도 채 안 돼 문자가 떴다. 가던 길을 멈추고 전화기를 열어보았다. 올리비아였다. 그전에 부재중 전화가 벌써 두 번이나 찍혀 있었다. ‘이거 왜 이래...’ 물어보나 마나 오늘처럼 추운 날은 아침 운동 나가면 안 된다고 말리려고 부랴부랴 전화했을 것이다. ‘이 사람, 말도 안 되는 소리 하고 있어!’ 나는 혼잣말로 투덜거리며 전화기를 다시 주머니에 후딱 넣고 가던 걸음을 재촉하였다. 2분쯤 지났을까. 문자가 또 왔다. ‘쉐비, 운동도 지혜롭게 해야지요. 어제 많이 했으니 하루 걸러 이틀에 한 번씩 해도 되고~’ 5분 사이에 문자, 전화로 네 번씩이나 만류하는 흔적이 역력했다. 내가 하는 일에 지나치게 간섭하고 이랬다 저랬다 하는 아내에게 또 짜증이 났다. ‘알았으니 그만 좀 해, 그만.’ 더 이상 지체하고 싶지 않았다. 늦가을과 초겨울이 교차하는 아침 하늘은 구름 한 점 없이 산뜻한 모양 그대로 머릿속에 복사되었다. ‘오늘도 쾌청하겠네. 자, 가자!’ 매일 다니는 익숙한 길을 따라 광교산 방향 연암공원 쪽으로 뚜벅뚜벅 걸어가기 시작했다.      




   2년 전, 지금 사는 집으로 이사 온 후부터 우리는 방을 각자 따로 쓰기 시작하였다. 아내가 뜬금없이 둘이 같이 자는 게 불편하다며 안방을 나가 문간방으로 잠자리를 옮겼다. 나는 그 말을 듣고서도 별 반응을 하지 않았다. 아무런 욕심도 없다는 듯 그냥 그러라고 내버려 두었다. 도대체 알콩달콩한 맛이라고는 하나도 없고 목석같이 감정이 무미건조한 사람인지라 잠재해있던 불만을 마치 맹물처럼 표시하고 말았다. 신성하고 의미심장한 안방은 그렇게 나 혼자만 자는 방으로 격하되었다. 거실에서 밥 먹고, TV 보다가 때가 되면 서로 얼굴 힐끗 쳐다보고 웃으며 각자 방으로 가곤 한다. 어느 날 저녁, 올리비아와 같이 운동 삼아 동네 한 바퀴 돌고 들어오는 길에 어둠에 잠긴 15층 중 6층 우리 집을 쳐다보다가 마주 보며 피식 웃은 적이 있었다. 대학 10년 선배가 사는 8층 집 거실은 불이 꺼져 시커먼데 양쪽 끝에 있는 안방과 문간방에만 각각 불이 훤하게 켜져 있었기 때문이다. 사모님은 안방, 이 선배는 문간방을 서재 삼아 각각 차지하며 편한 밤을 보낸다고 하시던 말씀이 떠올랐다. 우리도 이 선배 부부처럼 각방을 쓰는 황금빛 커플이 되어 있다는 것을 확인하는 순간이었다. 나이가 어느 정도 들면 부부가 육체적으로 거리를 두더라도 서로 섭섭한 감정을 갖지 않고 평온하게 살게 되는 시점이 자연스레 찾아오는 것일까. 책을 보고, 글을 쓰고, 사색하고, 아니면 음악에 빠져보거나 때로는 누군가에게 전화도 하는 혼자만의 방. 내가 그와 비슷한 성향을 지녔다고 느끼는 16세기 삶의 철학자 몽테뉴는 자신의 삶을 옳게 즐기는 법을 아는 것이 절대적인 완벽함이자 실질적인 신성함이라며 ‘나만의 뒷방을 마련하라’고 조언을 아끼지 않았다. 성격과 성향이 극단적으로 갈리는 올리비아와 내가 각 방 쓰는 건 좋은 결정이었고 상대방을 존중하는 일이기도 하다.



    

   어젯밤 TV를 같이 보면서 내일 아침 기온이 뚝 떨어질 것이라는 소식을 들었다. 올리비아는 그런 날 아침에 운동 나가는 것은 건강에 안 좋다며 나더러 내일은 가지 말라고 명령하듯 말하였다. “뭐, 맨날 운동 안 한다고 핀잔주더니 날씨가 조금 추워진다고 운동하지 말라니. 그게 말이야 막걸리야? “ 당신 마음대로 나더러 이래라저래라 하냐며 나는 즉각 반발하였다. 아내는 틈만 나면 나에게 뱃살 빼고 체중도 줄여야 한다며 닦달하듯 운동을 종용하여 왔다. 그야 맞는 말이고 정확한 지적이기는 하다. 하지만 아내가 그런 옳은 말을 하더라도 그거 아주 좋은 생각이라며 즉석에서 알겠다고 말해본 적은 거의 없다. 설령 확실히 문제가 있고 잘못된 점이라는 데에 동의하더라도, 그것을 누군가로부터 지적받고 굴복하듯 말하는 것은 나의 자존심이 좀처럼 허락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드러내지 않은 나의 진심은 전혀 다르다. 말로는 화답하지 않을 뿐 속으로는 맞장구치며 순순히 받아들이니까. 하긴 하는데 내가 알아서 하는 것이지 꼭 당신이 지적해줘서 하는 게 아니라는 몸짓이다. 이토록 끝까지 그놈의 자존심의 끈을 놓지 못하는 것은 결코 당신한테 지지 않겠다는 우월감이 가슴속 깊이 도사리고 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그냥 쿨하게 “알았어. 고마워. 그렇게 할게 “ 하며 호응해주면 좋을 것을 끝까지 입을 다물고 왕고집을 피니 말이다. ‘나는 왜 그렇게는 말하지 못하는 걸까?’ 이 나이 들도록 그런 자신이 마음에 들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반려자를 향해 평생 굳어진 청개구리 같은 성향이 죽는 날까지 고쳐질는지도 자신할 수가 없다. 그러다 보니 우리 부부 사이에는 언제나 껄끄럽고 불편한 기분이 안개처럼 드리워져 있다.  아내가 나더러 하라는 운동은 대단한 게 아니다. 콜레스테롤이고, 고지혈증이고, 혈압이고 간에 대사증후군을 개선하는 데는 체중 감량이 가장 중요하니 날마다 나가서 걸으라는 것이다. 사실 말없이 그 충고를 받아들여 걷기 운동을 시작한 지 얼마 되지도 않았다. 기왕 시작하였으니 마음먹고 꾸준히 해보겠다며 날마다 의지를 다지고 있는 중이다. 그런데 날씨가 춥다며 제동을 걸고 나오니 나도 모르게 버럭 화를 내버리고 말았다. 올리비아는 체념한 듯 “알아서 해~~~” 하고 비아냥대는 말을 뒤로 남기고는 문간방으로 휙 들어가 버렸다.

  



   오늘 아침, 눈을 뜨자마자 나의 의지대로 걷기 운동을 나가려고 안방에서 소리 안 나게 등산복을 꺼내 입었다. 마지막으로 마스크를 끼고, 충전기에 꽂아놓은 전화기를 챙기는 것으로 준비를 마쳤다. 나의 이런 움직임을 전혀 눈치채지 못하고 있는 문간방의 올리비아가 아직도 자는지 이미 일어나 있는지 알 수가 없었다. 거실에 나가 그쪽을 향해 목을 길게 뽑으며 쳐다봤더니 문은 확실히 굳게 닫혀 있었다. ‘됐다. 가자.‘ 나는 고양이 걸음으로 문간방 앞을 살금살금 지나 현관 앞에 섰다. 허리를 굽히고 오른손을 앞으로 뻗어 운동화를 대문 쪽으로 향하여 가지런히 놓은 다음, 숨소리를 죽여가며 조심스럽게 신었다. 그러고 나서 재빨리 대문을 열고 집에서 빠져나왔다. 혹시나 내가 나가는 소리를 방에서 들으면, 올리비아는 분명히 문을 열고 나와 큰소리로 외치며 가지 말라고 눈을 부라릴 게 뻔하기 때문이다.    

  



   산길에 들어서면 온갖 수목과 잡초들이 시야에 들어오고, 지나는 곳마다 소리 없이 가을의 축제 이야기를 앞다퉈 들려주는 듯한 자태를 보노라면 전신에 엔돌핀이 흥건하게 샘솟는 기분에 젖는다. 선경(仙境)에 들어선 신선의 기분이라 할까. 숲 속으로 난 길에 혼자 들어서서 갈 때면 나도 모르게 양팔을 벌리며 가보기도 한다. 자세를 바꾸면 기분도 따라서 달라지는 것 같다. 솔잎이 떨어져 쌓인 널빤지형 의자가 나타나는 지점에 닿으면 오늘도 무정하게 그냥 지나칠 수가 없다. 기꺼이 잠시라도 앉아 먼 곳 바라보며 잡념을 털어내고 마음을 간추린다. 조금 더 가면 옛 시인들의 작품을 아담한 바위마다 새겨서 길가에 띄엄띄엄 나란히 세운 오솔길이 나온다. 박목월, 조지훈, 윤동주, 김영랑 등 여러 작품 중 어느 하나 앞에 다가서서 나지막한 목소리로 시를 읊조려보고는 다시 길을 간다.

가만, 아무도 없는 여기에 서서 홀로 윤동주의 멋진 시를 한 수 읊어보고 갈까.

< 바람이 불어 / 윤동주 >


바람이 어디로부터 불어 

어디로 불려가는 것일까.


바람이 부는데

내 괴로움에는 이유가 없다.


내 괴로움에는 이유가 없을까.


단 한 여자를 사랑한 일도 없다.

시대를 슬퍼한 일도 없다.


바람이 자꼬 부는데

내 발이 반석 우에 섰다.


강물이 자꼬 흐르는데

내 발이 언덕 우에 섰다.


   시인이 살았던 일제 강점기의 암울한 심경을 노래한 것이리라. 바람이 자꼬 불어도 나 역시 반석 우에 서야겠다.^&^ 등산길 한켠으로 빠지는 오솔길에 앙증맞은 시비여럿 서있으니 이렇게 좋구나. 시멘트와 철골, 아스팔트를 실컷 버무려 만드는 신도시 여기에 공원을 배치하고 문학작품을 곁들일 생각을 해낸 그는 과연 누구였을까. 고맙게 생각하는 건 다만 나만이 아닐 터. 도시의 품격을 설계한 이름 모를 그에게 박수를 보낸다, 오래오래.


   지난여름, 올리비아와 같이 다니며 나무과 육 형제 이름들을 알아맞히며 오가던 길이기도 한데 신갈나무, 떡갈나무, 갈참나무, 굴참나무, 졸참나무, 상수리나무 잎들이 벌써 낙엽이 되어 바닥에 수북이 쌓여 있다. 울긋불긋 단풍이 한껏 어우러져 천정을 이루던 가을의 전성기가 11월 하순의 찬 기운을 쐬고서는 속절없이 쇠락하며 저문다. 아쉬운 가슴에 재가 쌓이는 것만 같다. 그나마 남아있는 잎새들은 하루가 다르게 낙하를 계속하고, 어느새 앙상해진 나뭇가지 끝에는 하늘만 가득해 스산하다. 연암공원을 지나 광교산 초입인 경기대까지 갔다가 다시 집으로 돌아왔다. 스마트폰을 열고 확인해보니 두 시간 남짓 동안 1만 보를 훌쩍 넘게 걸었다. 앗싸, 운동 좀 했네! 그런데 허기가 느껴진다. 벌써 브런치 시간이 되었다.     




   올리비아는 따로 운동을 나가고 집에 없었다. 주방에는 어제 먹은 식기에 아침에 먹은 것까지 더해져 그릇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다. 이 광경은 나도 운동 다녀올 테니 그동안 설거지 좀 해 놓으라는 신호다. 아내는 세상에서 가장 하기 싫은 일이 설거지라고 했다. ’아니, 주부가 설거지를 싫어하면 어떡하나?‘ 아내의 푸념을 듣는 내 마음도 답답했다.

   작년에 그 말을 듣다 못한 아들과 딸이 엄마 고생한다며 돈을 절반씩 내서 식기세척기를 사주었다. 그렇다고 전기세, 물세에다 급탕비까지 관리비가 많이 나오는데 끼니마다 돌릴 수는 없는 일이었다. 그러니 정말 힘들 때 어쩌다 한 번씩 쓰고, 보통은 식기 건조기로 사용하고 있는 실정이다. 여전히 설거지를 손으로 하다 보니 먹고 나온 그릇들을 설거지통에 그냥 방치하고 마는 경우는 허다하다. 지저분한 모양을 보다 못한 내가 가끔 해주기도 한다. 그렇지만, 산행에서 막 돌아온 지금은 당장 설거지를 할 겨를이 없다. 늦은 아침 식사를 브런치로 먹어야 할 시간이다.

   

   풀무원 GREEK Style 플레인 요구르트에 호두, 아몬드, 캐슈너트 등 견과류를 넣고 비벼서 한쪽에 놔둔 다음, 빈 그릇에 오트밀 1인분을 덜어서 담고 거기에 두유를 국물로 충분히 부어 잘 저어서 전자레인지에 넣어 데웠다. 전자레인지가 돌아가는 동안 견과류를 비빈 요구르트를 한 숟갈씩 떠서 자근자근 씹어먹으니 식도를 타고 내려가는 시큼 달콤한 맛이 입안에 가득하였다. 잠시 후 오트밀이 다 데워지자 거기에 시리얼을 건더기 삼아 부어서 넣고 불릴 때까지 기렸다가 분홍색 플라스틱 작은 수저로 저으며 음미하듯 떠먹었다. ’아, 잘 먹었다^^‘ 문득 시계를 보니 올리비아가 곧 돌아올 시간이 가까워진 느낌이 들었다. 어서 서둘러야지. 내가 먹은 그릇까지 더해 곧바로 설거지를 시작하였다. 휘슬러 전기밥솥은 뚜껑 손잡이까지 야무지게 씻어서 바닥에 있는 녹색 세숫대야에 엎어놓고, 다른 그릇들은 큰 것부터 작은 순서로 건조대의 결을 따라 하나씩 가지런히 세워가며 보기 좋게 정리를 하였다. 반듯하게 정리도 잘해야 하지만 그 요체는 그릇에 묻은 물기가 얼른 빠지고 또한 잘 마르도록 하는 것이다. 아내가 같이 있을 때는 전혀 할 기미를 보이지 않다가 아내가 외출하면 그때서야 나서 후다닥 설거지를 깔끔하게 해 놓곤 하는 나를 보고 딸내미가 ’ 울 아빠는 우렁각시‘라던 말이 귓전에 맴돌아 웃음이 나왔다. 오늘도 아내는 마냥 벌려놨고, 나는 반대로 난장판 같은 주방을 열심히 치우고 씻고 정리하며 기어코 엇박자의 조화를 빚어냈다. 아, 이 못 말리는 두 삼시랑. 올리비아는 어디서 뭘 하는지 아직 돌아오지 않았다. ’언제 오든 너무 신경 쓰지 말자. 늦어지는 이유가 있겠지 ‘ 일을 끝내 놓고 나니 그때서야 긴장이 풀리는지 산행 다녀온 피로가 슬그머니 엄습하기 시작하였다. 이제 잠깐 쉬자. 아~카~~(하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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