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짜 점심은 없다(There is no such a thing as a free lunch)는 말은 반드시 경제활동에만 국한하여 쓰이는 말은 아닐 것이다. 주방에 들어서서 수도꼭지를 살며시 틀고 설거지를 시작하면서 문득 떠오른 생각이다. 아내 올리비아는 세상에서 가장 하기 싫은 일이 설거지라고 말했다. 가끔 혼잣말로 그렇게 투덜대던 모습이 덩달아 겹쳐지며 나의 상념은 더 깊어졌다. 그런 소리를 들을 때면 나의 마음은 불편하고 불안하기만 했다. 당연히 해야 할 설거지가 싫다고 하면 어떡하냐며 속으로만 투덜댈 뿐 겁대가리 없이 쏘아보며 굳이 입 밖으로 내뱉고 싶지는 않았다. 파열음을 내봐야 좋을 리 없고, 차라리 참는 편이 공존과 평화유지를 위해 더 이롭다고 생각하였기 때문이다. 이제 그 점을 중시해야 할 때가 되었다. 더구나 파멸의 씨앗이 결코 멀리 있지 않다는 것을 우리 집에서는 유달리 나만 잘 알고 있는 편이어서 더 예민하게 반응하는 실정이다.
설거지가 그토록 하기 싫었지만 여태까지 군소리 한마디 없이 당연한 일처럼 해냈던 데는 그것이 아내가 담당하는 일이라는 결혼 당시의 사회적 전통의 영향이 컸다. 신랑은 마땅히 가족의 생계를 위하여 밖에 나가 돈을 벌어 오고, 신부는 집안일을 담당한다는 부부간의 역할 분담이 분명했던 시절에 가정을 이룬 우리다. 그때는 맞았지만, 지금은 틀렸다고 해야 하나. 정년퇴직하고 나서 틈나는 대로 내가 설거지를 하는 일이 잦아졌다. 특히 일없이 집에 머무는 날이면, 비록 아내가 나에게 직접적으로 요구하지는 않더라도 뭔가 도와줘야 할 것 같은 기분이 들 때가 많다. 양심적인 남편이 느끼는 일종의 부담감이라 해둘까^^. 사실 나의 역할이 부실해졌음에도 아내만은 그 역할에 변함이 없기를 바란다면 그것은 솔직히 미안하고 염치없는 일이다. 아니, 위에서 내려다보고 계시는 그분은 나를 화장실 뒤로 불러놓고서는 벗은 신발을 한 손에 꽉 집어 든 채 나더러 도둑놈 심보라며 나무랄지도 모른다. 어쨌거나 이 세상 끝까지 죽도록 사랑하자면, 반려자의 마음을 잘 헤아려 어루만져주고, 마치 야구 경기에서 적시타를 치듯 제때제때 감정적 지불을 아끼지 말아야 한다. 그것이 편하게 사는 길이기도 하다. 정서적으로 각색해보면, 집에서도 공짜 점심은 없는 셈이다.
오늘은 염창동 아이들 집에 다녀오자며 아내와 단둘이 서둘러 점심을 먹었다. 투룸 오피스텔에서 자취하고 있는 아들과 딸에게 가져다주려고 아내는 오전 내내 꽈리고추 멸치볶음과 소고기 장조림을 정성껏 만들어놨다. 나는 올리비아에게 다가가 밑반찬 만드느라 고생했다며 엉덩이를 살짝 쓰다듬어주었다. 식사 후, 밥을 먹고 난 그릇이 몇 개 되지 않으니 설거지는 내가 후딱 해치우겠다고 말했다. 그러자 거실에서 벌써 양치질을 시작한 올리비아는 칫솔을 입에 문 채 나를 바라보더니 양쪽 팔로 크게 엑스(X) 자를 그리며 저지 신호를 보이고 있었다. 시간이 없으니 지금 하지 말고, 아이들 집에 갔다 와서 하자는 것이었다. 하지만 나는 미리 설거지를 해놓고 가자고 했다. “지금 하자”, “다녀와서 하자”며 우리는 서로 자기 뜻을 관철하기 위해 또 한바탕 작은 소란을 피우고 말았다. 이런 승강이는 우리 둘 사이에 걸핏하면 일어나는 흔한 일이다. 나는 올리비아가 양치질을 마무리하러 화장실 세면대로 간 사이에 슬그머니 설거지를 시작하는 것으로 상황을 정리해버렸다. 이를 닦고 나온 올리비아가 주방에서 일하고 있는 나의 뒤태를 쳐다보며 “어이그~~~!”하고 역정을 냈다.
설거지에도 타이밍 있다. 30년 직장 생활하는 동안 굳어진 기획 마인드(mind)는 이미 일거수일투족(一擧手一投足) 내가 생각하고 행동하는 무의식적 작동원리로 장착되었다. 눈앞에 전개된 상황을 살펴본 후, 해야 할 일의 범위를 정하고 어떤 순서로 진행할지를 머릿속으로 재빨리 짠 다음, 본격 일을 시작하는 습관이다. 설거지를 굳이 외출 전에 미리 하고 가자는 것은 귀가했을 때의 피곤한 심신을 고려한 선제적 조치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고 반대로, 장시간 외출을 마치고 지친 몸으로 집에 돌아와 그때서야 어지럽게 널린 그릇들을 씻고 정리하고자 한다면 과연 그 기분이 어떤 것일지는 충분히 상상하고도 남는다. 몸이 피로하면 신경이 날카로워지기 쉽고, 그런 컨디션이라면 지친 감정이 어떻게 요동칠지 누구도 장담할 수 없는 상황이 된다. 나는 덩달아 그런 강물에 끌려 들어가고 싶지 않다. 외출 전에 하는 설거지는 이처럼 예상할 수 있는 감정적 불상사를 회피하기 위하여 반드시 지어야 할 처방전이자 예방약이다. 내가 고집부리고 강행함으로 인하여 우리의 출발이 비록 쓰디쓴 약처럼 잠시 비틀거릴 수는 있어도 귀가 후 함께 느끼는 기분은 분명히 달콤하리라는 것을 나는 이미 상상으로 잘 안다. 오늘처럼 티격태격하며 집을 나섰더라도 피곤한 몸을 이끌고 돌아온 후 정작 기분 좋아하는 사람은 언제나 다름 아닌 아내 올리비아다. 대개 그때쯤이면 또다시 식사 준비를 해야 할 시간이 되지만, 주방이 이미 깔끔하게 정돈이 돼 있으니 몸은 피곤해도 마음은 편안할 것이다.
세상의 일이라는 게 다 그렇듯 바로 지금 하는 일에 나름의 의미를 부여하면 역시 즐겁게 할 수가 있다. 아우슈비츠 수용소의 생존자 빅터 프랭클(Viktor Frankl, 1905~1997) 박사는 일찍이 삶의 의미를 찾는 행위가 곧 인생이라는 시련을 극복하는 길이라고 하였다. 내가 이렇게 설거지를 하는 것이 맞는 것인지, 잘하는 것인지 하고 의문부호를 갖는 태도는 지극히 비생산적이다. 설거지야말로 결과를 즉석에서 가장 확실하게 볼 수 있는 일이어서 성취감을 느껴보고 싶다면 해볼 만한 일이기도 하다. 그릇을 씻어서 건조대의 가지런한 결을 따라 하나씩 착착 놓으며 바라보면 내 마음도 더불어 정리가 되는 것 같아 절로 쾌감이 솟아난다. 수도꼭지로 나오는 물이 너무 세면 밖으로 튀어 옷에도 젖을 수 있으니 점잖게 나오도록 레버를 서서히 조이며 물의 양과 세기를 조절한다. 이제 오른손에 수세미를 들고 수저, 젓가락, 국자, 주걱, 컵, 칼, 그릇, 밥솥, 프라이팬, 도마까지 차례로 씻기 시작한다. 필요하면 주방세제 퐁퐁을 한 방울 떨어뜨려 거품을 낸 후 뽀드득 소리가 나도록 식기를 닦기도 한다. 그러는 동안은 머릿속에는 별의별 생각들이 떠오른다. ‘글쎄, 설거지 이야기를 쓰다 보니 좀 이상하게 전개됐는데 이걸 어떻게 마무리 지으면 좋을까?’ 이런저런 생각은 마치 깔때기에 걸러지는 것처럼 정제되고 때로는 새로운 돌파구가 떠오르기도 한다. 설거지는 이처럼 기분전환이 필요하거나 사색하고자 할 때 해볼 만한 괜찮은 메뉴다. 그러니 싫증 낼 일도 아닐뿐더러 일부러 찾아서 하게 되는 아이템이기도 하다.
설거지할 때는 혼자 하는 것이 좋다. 옆에 아내가 있으면 자칫 하던 일도 꼬이기 쉽다. 특히 기름기가 있는 그릇을 씻을 때 퐁퐁 거품을 내서 사용하면 어느새 올리비아가 옆으로 다가와서 한마디 한다. “굳이 퐁퐁 안 해도 돼. 퐁퐁을 하면 물을 많이 쓰게 돼~” ‘이미 푼 걸 어쩌라고’ 나는 듣기만 하고 계속한다. 일을 끝내고 얼른 화장실로 가서 비누로 손을 씻으면, 아내는 또 소신껏 지적을 ‘하신다‘ ㅋ. 깨끗한 물로 설거지했는데 비누칠을 또 왜 하는 거냐며 이해 못 하겠다는 눈초리로 나를 쳐다본다. “뭔 소리 하는 거야 지금, 설거지했으면 당연히 비누로 손을 씻어야지. 그게 말이 되는 소리여~ 내 손 내가 씻는데 왜 그렇게까지 간섭을 하지?” 나는 나지막한 목소리로 대꾸만 할 뿐 고개는 돌리지 않았다. 나름대로는 밥값 한다고 도와주는 건데 올리비아한테 지적을 받으면 기분은 즉각 별로 모드로 전환된다. 돕는 것도 지나치면 아니 함만 못하다. 들어갈 때 들어가고, 빠질 때 잘 빠져야 하는 건데 이런 날은 안타깝게도적시타를 놓치고 만 케이스다. 사랑의 표시도 역시 타이밍이 중요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