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너무 멀리 왔습니다. 아니 너무 오래 머물렀어요. 좀 더 일찍 물러났어야 하는 건데 그렇게 하지 못한 걸 후회합니다.” 이달 중순, 사직을 결심하던 때 내가 어느 대표에게 털어놓은 말이었다. 정신은 피폐해지고 몸은 녹아내릴 듯 이미 지쳐있었다. 이렇듯 오랜 시간을 버틴 것은 사실 나보다 앞서 관리소장으로 재취업한 왕년의 직장동료들을 의식한 경쟁심의 결과이기도 했다. 정년퇴직하자마자 다음 해 1월 초에 재취업에 성공했던 최 소장은 첫 번째 일터에서 부녀회 편을 들었다고 압박을 받고 9개월 만에 권고사직해야 했다. 거기서 한번 자리를 옮겨 300여 세대 규모의 아담한 단지에서 일하고 있는 그는 어느새 만 5년째를 맞이하고 있다. 소장 진입에 애를 먹은 문 소장은 직접 발로 뛰며 문을 두드린 끝에 오피스텔 건물 관리부장으로 시작하였으나, 3개월 만에 그만두고 나와야 했다. 그 후 관리소장으로 재취업해 두 번을 더 옮겨 현재의 일터에 자리 잡은 지 어느새 2년이 다 돼가고 있다. 뒤늦게 출발한 나는 항상 옛 동료들의 힘들었던 분투기를 잘 기억하고 있었다. 용케 그들이 넘었던 첫 번째 고개를 가까스로 넘어서면서 기왕이면 1년을 채워볼까 하는 생각도 한때 했었다. 하지만, 그것이 도달해야 할 고지라고 의식하기 시작한 순간부터 이상하게 일이 잘 풀리지 않았다. 확실치는 않았지만, 그것이 과욕의 징조일 수 있다는 생각이 머리를 스쳤다. 그 후, 몇 가지 곡절을 더 겪어야 했다. 의욕이 떨어진 탓인지 만사 귀찮고 불편하게 느껴져 마음이 편치 않았다. 그때부터 사직서를 던지기까지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최종 근무를 마치고 나온 이틀 후, 다른 관리업체에서는 그 예를 찾아볼 수 없는 퇴사 면접을 봤다. 떠나는 사람을 면접한다는 것이 이상하고 이해하기 어려웠지만, 앞으로도 소속 관리소장으로 계속 관리하기 위한 독특한 절차라는 설명을 듣고 나름 괜찮은 제도라고 생각하였다. 즉 면접에 응하면 회사가 앞으로 일할 자리를 찾아 기회를 준다는 것이고, 응하지 않으면 그것으로 인연을 끊게 된다는 뜻이었다. 미구에 회사로부터 새로운 자리 제안을 받게 될 경우, 설령 내가 최종적으로 받아들이지 않을지라도 현재로서는 그 가능성을 살려두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에서 일단 면접에 응하기로 하였다. 사장급이라는 그룹장 집단면접을 1차로 보고, 이어서 대표이사 면접을 따로 봤다. 질문의 양에 차이가 있었지만, 그룹장도, 대표이사도 하나같이 “그 단지를 왜 나오게 됐느냐”고 이유를 진지하게 물었다. 그리고 면접서류에 뭔가를 열심히 메모하는 모습이 아주 인상적이었다. 대표이사는 마치 입사 면접 때 물었던 유형의 질문을 던지기도 해 의아했다. 최근 본사에서 개발해 인트라넷(intranet)을 통해 운영 중인 프로그램 이름이 뭔지 아느냐고 옆에 앉은 소장에게 물었다. 그의 답변이 시원치 않았는지 나에게 눈길을 돌리며 대신 답을 해보라고 하였다. 나는 그의 눈을 주시하며 짧게 대답하였다. 그는 정답이라는 표정으로 나에게 고정했던 시선을 다시 옆 사람에게 돌리며 그 프로그램이 ‘직원 교육용 동영상 플랫폼(platform)’이라고 정확히 말할 수 있어야 한다고 힘주어 말을 하였다. 그러고 나서 이제 내 차례라는 듯 나에게 몇 가지를 더 물었다. “관리규약 개정 시 발효 시점이 언제죠?” “관리규약과 사업자선정지침이 상충하는 경우 무엇을 우선해야 하나요?” 평소 주민들의 사적자치를 강조하는 대표이사의 의중을 잘 알고 있기에 나는 거침없이 답변할 수 있었다. 정부와 지자체가 주민자치에 지나치게 간섭한다는 대표이사의 불만 섞인 부연 설명은 상당히 설득력 있게 들렸다. 고맙게도 회사가 사후관리를 해준다고 하지만, 절대적으로 휴식이 필요한 나는 결과에 별로 신경 쓰지 않겠다는 담담한 심정으로 면접장을 나왔다. 그것만을 믿고 막연히 기다리는 것 또한 현명한 처사는 아닐 거라는 생각도 들었다. 시계가 이미 정오를 30분이나 지나고 있었으나 이어서 또 한 팀이 대표이사 면접장으로 들어가고 있었다.
사흘째, “오늘이 백수 3일째네요^^” 점심을 같이 먹기 위하여 미리 약속한 식당에서 만난 지부장이 나를 빤히 바라보고 웃으며 말했다. 나보다 나이는 적지만, 관리소장 경력이 많고 실력도 탁월해 내가 평소 고수라고 부르는 - 전 직장동료 최 소장이 아닌 - 다른 최 소장이다. 내가 관리소장으로 처음 부임했을 때, 그는 자신이 잘 아는 곳이라며 “그 단지는 소장님이 아무리 열심히 하더라도 어쩔 수 없이 떠나야 할 때가 올 것입니다.”라고 마치 예언처럼 말했던 사람이다. 미리 짜놓은 각본처럼 전개된 상황을 회상하며, 나는 신기한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고 미소를 지었다. 전 직장동료인 최 소장과 더불어 셋이 갈비탕을 먹는 자리였다. 엊그제 그만두고 나온 나의 퇴직 사연이 자연스럽게 이야기의 주요 소재가 되었다. 두 분 다 나에게 그동안 수고가 많았다며 위로해주었다. 고수 최 소장의 말을 듣고 있노라면, 나는 그보다 단지 나이만 많을 뿐, 마치 어린애가 된 기분으로 하나하나 귀담아들어야 했다. 정년퇴직한 역전의 용사라지만, 이 분야에 들어와 아장아장 걸음마 걷는 어린아이 같은 수준의 초보인 내가 오랜 기간 그 바닥에서 쌓아 올린 그의 경험을 이길 방법은 없어 보였다. 일찌감치 인정했던 것이지만, 고수에게는 겸손하게 다가가 배우고 지도받는 것이 현명하다고 생각하였다. 오늘도 그런 생각에서 오랜만에 다시 모셨다. 재직하면서 느꼈던 애로사항들을 몇 가지 소개했더니 그는 단번에 “흔히 책임감 강한 사람들이 자신이 관리자라는 사실을 잊고, 마치 주인인 양 일한 결과”라고 잘라 말했다. “그렇게 열심히 일했어도 지나고 보면 남는 게 하나도 없을걸요?” 정말 그런 것 같았다. 앞으로는 관리자의 역할을 잘 이해하고 그런 실수를 되풀이하지 말아야 한다고 지적해주었다.
같은 날 오후 6시, 서울 성수동에서 대학 동창 소모임 ‘돈만채’를 갖고 조촐한 송년 만찬을 하였다. 세 사람 이름에서 각자 한 글자씩 따 약간 유머러스하게 지은 애칭 같은 이름이다. 은행지점장을 끝으로 퇴직 후, 그 동네에서 부동산중개업을 시작해 올해로 9년째인 친구 M의 사무실이 퇴근 시간 이후 우리가 모이는 아지트다. 정년퇴직하고 바로 편의점 사업을 시작해 날마다 즐겁게 일하고 있는 다른 친구 D는 오늘도 편의점 안에서 1만 보 걷기를 했다며 뱃살 고민하는 나에게 틈틈이 운동할 것을 채근하였다. 참 부지런한 친구다. 오늘 송년회는 불과 며칠 전 관리소장을 그만둔 나의 이야기로부터 시작되었다. 마치 수렁에 빠졌다 나온 것처럼 후련하다는 나의 심경을 듣던 친구들은 잘 그만뒀다며 나의 결단을 치켜세워 주었다.
집에 돌아오니 시계는 밤 11시를 막 지나고 있었다. 나의 귀가가 늦어진다는 것을 알고 아내는 먼저 자야겠다며 일찌감치 나에게 문자를 보내왔었다. 현관문을 열고 살금살금 들어가 조용히 신발을 벗어놓으며 아내의 보금자리인 문간방을 지나 안방으로 얼른 들어갔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현관에서 기척이 느껴지면 문이라도 빼꼼히 열어볼 일이지 아내는 벌써 잠이 들었는지 철문처럼 각지게 닫힌 아내의 방문은 꼼짝도 하지 않았다. 안방 화장실에서 문을 닫고 개운하게 씻고 나와 물 한 컵 먹으러 주방에 갔더니 설거지 그릇들이 산더미처럼 어지럽게 쌓여 있었다. 아내가 나에게 하라고 남겨놓은 숙제처럼 보였다. 그렇지만, 오늘은 왠지 미운 생각은 들지 않았다. 일을 그만둔 후유증 때문이었을까. 오히려 그 광경을 보고 입맛이 돌았다. 나는 입가에 가벼운 미소를 지으며 우렁각시 처럼 즉시 설거지를 시작하였다. 이 생각, 저 생각, 오늘 하루 있었던 일들을 반추하며 4~50분 만에 깔끔히 마무리할 수 있었다. 깨끗하고 가지런히 정리된 그릇들을 보며 평온한 마음을 되찾을 수 있었다. '재취업한 지 열 달 만에 이렇게 다시 돌아왔구나...!' 같은 길을 가는 옛 직장 동료들과 친구들의 유쾌한 응원, 앞으로도 잘 할 거라는 믿음이 고맙고 큰 위안이 되었다. 내일 아침, 잠자리에서 일어나 주방에 나온 아내는 말끔히 정리된 주방을 보고 흐뭇해할 것이다. 자정이 가까워진 늦은 밤, 나는 다시 우렁각시로 돌아와 시름을 탈탈 털어버리고 입가에 살며시 미소지으며 잠자리에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