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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쉐비 Aug 14. 2020

돈키호테 아내, 햄릿 남편

                - 아내 몰래 화해를 꿈꾸는 긴 시간 -

   “친구들이 1박 2일로 홍천 가자고 하는데 다녀와도 돼?” “그래? 다녀와. 며칠 더 있다 와도 돼.^^” 예상을 뛰어넘는 나의 반응에 아내는 반가우면서도 한편으로는 놀라는 표정이다.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하지만, 그럴 때마다 나의 대답은 그렇게 넉넉하고 흔쾌하다. 그렇다고 언제나 아내가 나의 의향을 그렇게 물어오기를 기다리기만 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어디 다녀올 데 있으면 언제든지 그렇게 하라고 권하는 것이 오래전부터 준비돼있는 나의 생각이다. 혼자서도 잘 노는 사람에게는 잠시 아내가 없는 시간이 평온과 사색에 젖어보는 귀한 찬스가 된다. 솔직히 혼자 있는 시간을 노리고 있는 참이다. 드디어 출발일인 오늘 아침 아내는 약속시간 늦겠다며 내가 출근하기도 전에 서둘러 집을 나섰다.



  

   햄릿형 남편과 돈키호테형 아내. 나의 가시버시 이야기다. 거의 30년 전, 배우자 선택에 관한 주변 어르신들의 설은 분분했다. 부부는 서로 성격이 비슷한 사람끼리 만나야 금슬이 좋다는 쪽과 오히려 반대로 만나야 각자 부족한 점을 보완해줄 수 있어 더 낫다는 상반된 견해로 크게 양분되었던 논쟁이 바로 엊그제 일이었던 것인 양 지금도 기억에 선하다. 나의 선택은 종자개량의 필요성을 역설한 작은아버지의 주장이 힘을 얻어 일찌감치 후자로 결정돼 있었다. 조카의 성품이 너무 온순하니 2세를 위해서 다소 성깔 있고 대찬 여자가 필요하다는 것이었다. 아버지도, 어머니도 그 의견에 그다지 반대하지 않았다. 아버지도 그랬고 어머니도 그랬듯이 그저 순해 빠졌다는 이야기를 주변에서 수없이 듣고 살아온 터였다. 내 자식은 그런 소리 안 듣고 제발 좀 똘똘했으면 좋겠다는 바람이 있었을 것이다. 나는 왠지 실험 대상이 된 것 같은 묘한 기분이 들기도 했지만, 그렇다고 굳이 거부해야 할 이유를 찾고 싶지도 않았다. 2세가 나보다 더 야물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은 이미 마음속에 자리를 잡기 시작했다. 아버지의 온순한 성품을 쏙 빼닮은 내 모습이 때론 불만스럽기도 했으니까. 그때 오히려 무덤덤했던 나에게는 호기심이 발동해 목표를 좀 더 분명하게 다잡자는 쪽으로 생각이 바뀌어갔다. 대가족의 장손이고 또한 오 형제의 장남이라는 나의 태생적 스펙은 그 당시 가장 인기 없는 신랑감이었고 심지어 기피대상 1순위라 해도 손색이 없는 열악한 처지였다. 처음에는 그런 사실을 잘 몰랐지만, 맞선이 회를 거듭할수록 내가 가진 스펙이 비호감이라는 것을 특히 상대방 부모의 반응을 보고 알게 되었다. 그렇더라도 주말, 주중 가릴 것 없이 주선이 되는대로 부지런히 시간을 냈다. 그렇게 족히 백 번도 넘는 맞선을 봤다. 그 대부분을 서울에 사는 엄마 친구가 열성적으로 중매했지만 결국은 고향에 살던 작은엄마 친구의 소개로 마침표를 찍었다. 경희, 종착점에서 만났던 나의 돈키호테 이름이다. 성은 달라도 오래전 장난기 어린 내 불찰로 어처구니없이 깨져버렸던 나의 첫사랑과 같은 이름이기도 해서 뒤돌아 하늘을 쳐다보며 웃었다. 머리는 나보다 작고, 얼굴은 이쁘장한데 눈매는 날카로운 데가 있어 보이는 중학교 영어 선생님이었다. 파마한 머리가 세련돼 보이면서도 머리 주변을 둥글게 돌아가다가 종종 밖으로 삐친 머리카락은 마치 난초를 그린 수묵화의 삐침처럼 운치 있는 자태를 연출하며 나의 시선을 자주 끌어모으곤 했다. 그 삐친 머리카락은 여태까지 서로 지지고 볶으며 살아오는 과정에서 나의 뇌리에 새겨진 아내의 성품을 상징하는 이미지가 되었다.  




   아내가 비운 자리에는 언제나 평온이 깃들고 거기 홀로 남은 내 마음은 적막처럼 아늑하고 편안한 분위기에 취한다. ‘이 맛이야!’ ‘쉿! 뭔 소리? 큰 일 날라고!!!’ 베란다 창문 밖 바람에 나부끼는 메타세쿼이아 나뭇가지를 바라보며 혼자 피식 웃다가 이내 나는 정색을 한다. 잠깐 긴 호흡을 하는 사이 어느새 아내가 다시 나의 머릿속을 점령해버렸기 때문이다. 친구 누구누구가 이렇고 저렇고, 교회 다락방 순장이 마음에 드네, 안 드네 하면서 웃다가 때론 찡그리기도 하며 언제 끝날지 모를 이야기를 일방적으로 들려주기 시작했다. 나에겐 별로 재미없는 말들이지만 최소한 들어주는 척은 해야 한다. 지난날, 여러 번 아픈 경험으로 깨친 나의 배려다. 무관심하다는 말 나오지 않게 해야 하고, 티격태격 싸우지 말아야 하고, 하루의 말미가 평온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힘껏 발휘하는 인내심이기도 하다. 졸려서 눈이 곧 감길 듯해도 적절한 시점에 “거러췌!” 하고 맞장구 쳐주며 힘겹게 고비를 넘겨 가기도 한다. 하지만, 그렇게 달아오른 분위기도 어쩌다 시어머니 얘기로 옮아가면 아내 얼굴은 금세 일그러지고 목소리까지 높아지며 싸늘하게 얼어붙고 만다. 말이 거칠어지고 눈초리는 매섭기 그지없다. 사실 서로 궁작을 맞춰가며 오손도손 얘기하다가 고향에 홀로 계신 시어머니한테 전화라도 한번 드리도록 하는 것이 나의 진짜 속셈이었는데... 이제 아내도 나이가 들만큼 들었으니 그동안 불분명했던 이유로 불편하고 서먹했던 시어머니와 화해시키고 싶었는데... ‘아, 이 실망. 또 시작이구나!’ 아무리 인내심 강한 햄릿이라 해도 이런 상황에서는 결코 물러설 수가 없다. 그리고 결말은 역시 엉망진창이다. 홀로 있는 시간, 엊그제 일이 그렇게 스멀스멀 떠오르고 지나갔다.




   아내가 홍천으로 떠난 오늘, 나는 다른 때보다 일찍 귀가 길에 올랐다. 집 근처 버스정류장에 내리는 순간 대지에서 솟아오르는 상큼한 냄새가 코끝을 자극했다. 어느새 한 바탕 쏟아진 비에 묻어나는 진초록 풀잎 냄새에 기분이 상쾌해졌다. 종일 복잡하고 불편한 생각에 사로잡혀 있던 답답한 기분이 일순간에 사라지는 듯했다. 유쾌한 나들이를 떠난 아내의 마음에도 저 시원한 빗줄기가 내렸을까? 저녁에는 시골에 계신 어머니께 전화를 드려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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