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쉐비 Jul 13. 2021

고모 생각

내 인생의 결정적 순간을 지켜준 은인

   음력 5월 18일. 고모 생일이다. 이번이 어느새 칠순이라 했다. 안 보면 마음도 멀어진다는 말처럼 됐다. 예전에는 그러지 않았는데 언제부터인지 기념일을 기억하지 못하고 있었다. 서로 사는 곳이 좀 멀리 있다 보니 관심도 멀어져 생신을 까맣게 잊고 살았다. 넷째가 카톡에 살짝 귀띔하듯 올려놓은 글을 보고서야 알았다. 죄송하고 송구스러웠다. 그까짓 생일 하나 가지고 무슨 호들갑이냐고 눈총을 줄지 몰라도 예전에는 도저히 그럴 수 없는 일이었다. 날아가는 새가 기별을 전하듯 알게 된 이상 코앞에 다가온 기념일을 앞두고 그냥 지나칠 수는 없었다. 나보다 5년 위인 고모는 내 인생의 가장 결정적인 시기에 나를 보살펴 준 은인 같은 사람이다. 한솥밥 먹으며 같이 살 때는 철이 없어 몰랐는데, 머리카락이 백발이 되도록 나이 든 지금에 와서 돌아보니 고모는 내 인생의 귀인 반열에 올려야 할 인물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45년 전 1월 한겨울, 나는 서울에서 대학 진학을 하고자 시골에서 올라와 막 재수를 시작하는 때였고, 당시 미혼인 고모는 먼 친척 조카뻘인 선향이, 미향이 자매와 같이 예일여고 옆 길가 단독주택 한쪽 방에서 자취생활을 하고 있었다. 고향에서 농사를 겸하며 초등학교 선생님으로 근무하던 아버지는 고모에게 나를 보살펴달라고 부탁하고 역촌동에 셋방을 하나 얻어 주었다. 고모는 미향이와 함께 한 살림을 정리하고, 근처에서 나와 같이 새로운 자취생활을 시작하였다. 남에게 부탁할 줄 모르던 아버지가 아무리 동생이라지만 그때 고모에게 뭐라고 말했는지 자못 궁금해졌다. 불현듯 그려보는 아버지 생각에 그리움이 사무쳐 속절없이 눈시울이 달아올랐다. 아버지~~~ ㅠ.ㅠ    


 

   카톡을 들여다보니 고모의 칠순을 축하하는 친지들의 문자가 계속 올라오고 있었다. 이번 행사를 어떻게 치르려나 궁금했던 나는 그 모습을 보고, 한데 모여 잔치하는 것이 어려운 상황이라는 것을 알아차릴 수 있었다. 2019년 말 창궐한 코로나바이러스(COVID-19)가 지금도 기세가 꺾이지 않고 만연하며 1년 6개월 이상 지속되고 있으니 잔치는 엄두도 내지 못할 실정이다. 사회적 거리두기가 나라의 정책으로 시행된 지 그만큼 오래되었고, 따라서 온 국민이 바짝 긴장하고 모임을 자제하며 살아주기를 강요받는 상황이기도 하다. 이런저런 일들로 4촌 친척들과 서먹해진 지 꽤 많은 시간이 흘렀지만 응어리진 내 마음은 아직 해빙의 기미가 없다. 차라리 남이나 다름없이 소식을 끊고 사는 게 마음 편하겠다는 생각으로 마치 은둔자처럼 여러 해를 살았다. 아픈 심정은 그대로 돌멩이처럼 굳어져 마음 한구석에 박혀버렸다. 코로나 방역으로 인하여 많은 사람이 한 곳에 모일 수 없는 지금의 상황이 오히려 다행이고 반겨지기까지 했다. 그래, 고모에게 뭐라고 문자를 보낼까. 그간 소식 뜸했을지라도 고모 마음에 가장 닿을 수 있는 한마디가 뭘까 곰곰이 생각해보았다. 내 눈에 비친 고모의 지난날들이 꼭지마다 차례로 떠올랐다.   

    



   어렸을 적 고향 집에서 대가족의 일원으로 같이 살던 때 나는 세상 물정 모르는 어린아이였다. 집안일을 챙기고 이끄는 어머니를 틈나는 대로 돕던 고모는 큰방, 가운데 방, 갓방 중 특히 갓방 부엌 앞에 앉아 나뭇가지를 연료로 불을 때는 일이 잦았다. 그럴 때마다 나뭇가지 부지깽이로 솥단지 뚜껑을 두드려 장단 맞추며 당시 유행하던 가수 문주란의 노래를 즐겨 부르곤 했다. 가사가 애절한 '동숙의 노래'는 거의 18번이나 다름없는 애창곡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고모는 읍내에 있는 상고에 안 가고 도청소재지가 있는 대도시 인문고등학교를 가겠다고 선언을 하였다. 농사가 제법 많아 일손이 모자라는 상황에서 도시로 가겠다며 연보라색 투피스를 차려입은 고모가 마을 어귀를 서서히 걸어 나갈 즈음, 불만 가득한 목소리로 피를 토하듯 시누에게 퍼붓던 울 엄마의 짠한 모습은 마치 어제 일처럼 지금도 기억이 생생하다. 집안일을 당신 홀로 감당하자니 너무나 힘겨운 생각이 앞서 그랬을 것이고, 은연중 허락한 아버지에 대한 원망도 같이 섞여 있었을 것이다. 반면, 농촌에서 진학이 갖는 의미를 생각하면, 그 순간은 급박하고 중대한 기로였다. 그것을 잘 알았던 고모 역시 선뜻 물러서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그렇다고 올케에게 송구하고 미안한 마음 왜 없었겠는가. 그런 만큼 엄마도, 고모도 상반된 괴로움이 컸을 것이다.



      

   세월이 흘러 고모는 유머러스하고 쾌활한 성격을 지닌 고숙을 만나 고향에서 떠들썩한 결혼식을 올렸다. 교사인 아버지는 많은 제자를 길러낸 스승으로 지역에서 존경받는 유지였다. 그래서 선생님의 여동생인 고모가 과연 누구와 결혼할 것인지 자못 관심의 대상이 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결혼 당시 내가 이불 짐을 등에 지고 고숙 집 대문 앞에 서서 그 집 식구들과 승강이를 벌이며 복채 흥정을 하기도 했다. 사돈네 어르신과 안방에서 한참 담소를 나누며 같이 계시던 아버지가 이윽고 집으로 돌아가기 위해 자리에서 일어섰다. 방을 나가기 전, 고모 옆으로 다가가서 양손으로 어깨를 감싸 안고 귓속말하며 살짝이 봉투를 하나 손에 쥐어줬다. “시집오자마자 남편한테 돈 달라고 말하기 곤란할 테니 필요할 때 꺼내 쓰거라”. 고모는 훗날 그때  당시를 회상하며 아버지나 다름없던 오빠에게 효도를 하지 못해 죄송하고 가슴 아프다고 울먹이기도 했다. 바야흐로 딸과 아들을 차례로 낳고 남편을 내조하며 알뜰살뜰 단란한 삶을 눈앞에 실현하고자 애쓰는 고모의 모습이 행복해 보였다. 그 소박하고 달콤한 삶을 하늘이 시기라도 했던 것일까. 고숙은 어느 날 갑자기 불의의 사고를 당해 처자식을 남겨두고 홀연히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벼락같은 사별로 홀몸이 된 고모가 혹시나 재혼하지 않을까 염려했던 것일까. 남겨진 재산 내놓으라는 듯 시아버지와 시누가 하루가 멀다고 번갈아 가며 찾아와 큰소리치고 괴롭히기를 한동안 계속했다. ‘피도 눈물도 없는 비정한 사람들 같으니라고’. 몰염치한 행동을 일삼던 시집 사람들을 보다 못한 내가 목청 높여 거세게 반항하기도 했다. 기댈 곳 없어진 고모는 그때 서럽게도 많이 울었다. 그런 질곡의 터널을 지나서 딸, 아들 반듯하게 키우며 오늘에 이르기까지 꿋꿋하게 지탱해온 고모의 삶이 파노라마처럼 선명하게 머릿속에 펼쳐졌다. 안타깝게도 고모는 벌써 오래전부터 당뇨에 시달리고 있어 내 마음이 편치 않다. 비록 멀리 떨어져 살아도 마음 한구석은 날마다 모니터링하듯 고모에게 신경이 기울어져 있다. 효도하는 자식들과 오손도손 소박하게 사는 고모는 가시밭길 같은 모진 세월을 지나며 강인한 삶의 의지를 다지고 증명하듯 보여주었다. 식이요법과 꾸준한 운동으로 밝고 건강한 일상을 잘 유지하고 있어 다행이고, 감사하다.



     

   뜻하지 않은 길목을 지나온 역정과는 달리 타고난 천성이 밝고 낙천적인 고모는 5형제 조카들에게도 그런 긍정적 영향을 많이 주었다. 나도 모르게 눈시울이 뜨거워지고 금세 눈물이 핑 돌았다. 혼자 훌쩍이는 사이에 콧물까지 더해지고, 북받쳐 오르는 감정을 좀처럼 억제하기 어려웠다. 주방에서 분주하게 아침 준비를 하던 아내가 뭔가 낌새가 이상하다는 듯 힐끔 나를 쳐다보았다. 하던 일을 멈추고 곧 다가와서 “당신 지금 울고 있는 거야?” 하고 물었다. 도대체 무슨 속인지 알 리가 없는 아내는 왜, 뭣 때문이냐고 나의 두 눈을 쏘아보듯 노려보며 물었다. 순간 나는 어린아이처럼 울음을 터뜨려버리고 말았다. 그런 모습을 아내에게 들키듯 보이고야 만 것이 좀 머쓱하고 창피했다. 하지만 달리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아내는 식탁 위에 펴놓은 내 전화기 속 카톡 화면을 찬찬히 들여다보더니 “어이그~~~, 이 양반 못 말려. 고모 생각하다 울었구나! 나이 들더니 요샌 끄뜩하면 그냥 울어~ 그러지 좀 말아요!”. 그리고 두루마리(roll) 화장지를 살며시 뜯어 나의 안경 아래로 흐르는 눈물을 닦아주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