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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쉐비 Jul 13. 2021

안국동 큰집 고모

원당굴서 서울에 가기까지

   1976년 1월 7일. 나의 기념비적인 고등학교 졸업식이 있었다. 원당굴(고을)은 내가 이 세상에 고고(呱呱)의 성(聲)을 울리며 태어나고 자란 태초의 고향이다. 배산임수형(背山臨水形)인 마을 앞으로 국도 2호선이 달리고, 저만치 떨어진 곳에는 주변 농지의 젖줄인 칠동천이 들판을 가르며 무심히 세월을 두고 흐른다. 마을 앞 건너편은 장군봉을 필두로 좌우로 우뚝 솟아 병풍처럼 펼쳐진 매봉산 줄기가 거만한 자태로 눈앞 시야를 싹둑 자르고 서 있다. 나는 그런 앞산의 형상을 볼 때마다 혹시나 인재의 출현을 가로막는 불길한 풍수는 아닐까 생각하곤 했다. 지금도 고향 집에 가면 마을을 제압하듯 내려보며 여전히 고집스럽게 뻗대고 서 있는 앞산을 바라보는 것이 불편하고 싫다. 아마도 그것이 오히려 호방한 세상으로 나가고 싶은 나의 반발심을 일찍부터 자극했는지 모른다. 언제나 앞이 시원하게 뻥 뚫리고 드넓은 세상을 볼 수 있기를 갈망했으니까.      




   나는 거기서 아랫동네 옆에 있는, 지금은 없어진 초등학교를 걸어서 다녔고, 집에서 4km 떨어진 읍내까지 자전거로 통학하며 중학교를 졸업하였다. 그때 걸어서 학교에 다니던 옆집 친구 형준이를 뒤에 태우고 울퉁불퉁한 자갈길을 능숙하게 잘도 달렸다. 그러던 중 아버지가 새로 사준 자전거를 다음날 자전거포에서 홀라당 잃어버렸던 어이없는 사건은 아직도 쓰린 기억으로 남아있다. 그리고 지방의 거점도시로 가서 하숙, 자취하며 고등학교를 마쳤다. 공부하는 동안 선생님들의 명강의를 들으며 꿈을 키우고 진로를 고민하기 시작하였다. 당연히 앞으로 나아갈 세상을 진지하게 내다보게 되었으니 원당굴에서 나고 자란 나에게는 그날의 졸업식이 기념비적이라 할 만했다. 우물 안 개구리처럼 태어난 곳이 세상 전부인 줄 알았던 농촌 소년의 상급학교 진학은 그때마다 거추장스러운 허물을 하나씩 벗는 과정이기도 했다. 3학년 때 예비고사에 앞서 응시했던 해군사관학교 입학전형 신체검사에서 시력 불량으로 낙방하지 않았다면 내가 가는 길은 서울이 아니라 일찌감치 진해로 정해졌을 것이다. 그때 감독관이 나에게 말한 ‘불합격!’ 판정을 시원섭섭하게 복창한 후부터 나는 생각지도 않았던 안경을 끼게 되었다. 전날 만났던 한 해군 장교가 같이 갔던 우리 일행에게 “겨울에는 꽁꽁 언 얼음을 깨고 바다에 들어가는 훈련도 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 말을 들은 순간 나는 ‘오메, 이거 어째?‘ 하고 잠시 고민에 빠지기도 했다.^^     



 

    졸업식을 마치는 대로 대학 입학시험을 보러 곧바로 서울 갈 채비를 하고 어머니와 같이 학교에 갔다. 식은 오래 걸리지 않았다. 어머니와 걸어서 학교 밖 시내로 나가 한때 내가 하숙하던 인제동 영어 선생님 집 근처 식당에서 점심을 먹었다. 기차역에서 차편을 골라 늦은 오후 서울행 무궁화호 기차를 탔다. 밤새 지치도록 쉬지 않고 달리는 기차 안은 스팀 난방으로 따뜻했으나 좌석은 좁고 딱딱해 불편하기 이를 데 없었다. 밤이 깊어가면서 자울자울 조는 나를 보고 어머니는 옆에 누워 잠을 좀 자라고 했지만, 공간이 좁아 도저히 그럴만한 형편이 되지 않았다. 불편하기 이를 데 없었지만 지친 몸을 뒤척이며 묵묵히 목적지까지 가야 했다. 아직 어둠이 한창인 한겨울 새벽 4시 반쯤, 여전히 잠에 취해 머리가 띵~한 채 비몽사몽 몽롱한 정신으로 서울역에 내렸다. 곧바로 택시를 잡아타고 종로경찰서 앞으로 갔다. 근처에 사는 안국동 큰집 고모가 혼자 미리 나와 기다리고 있다가 택시에서 내리는 우리를 보고 웃으며 반갑게 맞아주었다. “어서 오소. 먼 길 오느라 욕봤네. 이것이 자네 큰아들인가?” 하고 어머니에게 물어보며 안쓰럽다는 듯 나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집안에서 아버지와 삼촌들이 안국동 누나라고 부르던 나의 큰집 고모는 슬하의 2남 2녀 자식들이 모두 공부 잘하는 수재들이라고 일찍부터 시골까지 소문이 자자했다. 아들은 모두 서울대, 딸은 모두 이화여대에 다닌다고 했다. 그렇게 알고 있는 집에 들어선다고 생각하니 몽롱한 정신에도 마음 한구석은 이미 주눅이 든 것 같았다. 일찍이 작은아버지가 그랬고, 그 다음 고모도 그랬던 것처럼 안국동  고모 집은 이번에도 내가 서울에 첫발을 내딛는 교두보 역할을 해주었다. 참 고마운 어르신이다. 나는 문간방에 들어가자마자 고꾸라져서 깊은 잠에 빠져버렸다.     




   대학 입학시험을 치는 날, 서울 지리에 어두운 어머니와 나는 큰집 고모가 잡아준 택시를 타고 갔으나, 아뿔싸! 지각하고 말았다. 가까스로 고사장에 도착해 살며시 문을 열고 들어서는 순간 모두가 애처로운 표정으로 나를 쳐다보았다. 온몸에 식은땀이 주르르 흘렀다. 시험감독관이 안내해준 자리에 가서 앉아 미리 엎어놓은 시험지를 들여다보았으나 긴장된 마음은 좀처럼 진정되지 않았다. 허망하게 낙방하였고 나에게 변명의 여지는 없었다. 그렇지만 제대로 해보지도 못하고 스스로 무너졌다는 자괴감이 컸다. ’나, 기필코 다시 도전하리라‘. 고모랑 같이 광화문 인근 내수동 대성학원으로 갔다. 접수창구가 있는 1층 홀은 처지가 비슷한 사람들로 이미 북새통을 이루고 있었다. 재수학원인데도 입학시험까지 치르고 나서야 비로소 등록을 할 수 있었다. 절차를 마치고 나오는 길에 고모는 학원 끝나면 가서 공부하라며 바로 옆 건물에 있는 ‘우당 독서실’에 내 자리를 하나 잡아주었다. 평생 잊지 못할 독서실 이름이다.




    돌아보면, 일련의 그런 과정은 서울에 처음 간 내가 혼자서 할 수 있는 상황이 전혀 아니었다. 재수학원이니 독서실이니 하는 정보를 고모가 미리 알아보고 정해준 것이 틀림없었다. 고모는 그때부터 이미 본격적으로 나의 뒷바라지를 해주기 시작하였다. 헌신 아니고는 다른 어떤 단어로도 그 시절 고모가 해준 역할을 설명하기는 어렵다. 학원에 다닌 1년 내내 날이 새도록 내수동 독서실에서 공부하다 새벽에 역촌동 집에 가서 고모가 차려준 아침을 먹고, 다시 부리나케 학원에 가기를 반복하였다. 또다시 실패하면 두말없이 보따리 싸 들고 고향 앞으로 내려가리라 굳게 각오하고 있었다. 사실 그다음 어떻게 할지는 아무런 대책도 없었고 막막했지만. 당시 나는 그 구간을 운행하던 151번 시내버스를 주로 타고 다녔다. 특히 새벽 귀갓길 버스에는 일찍 등교하는 예일여고(아니면 예일여상) 학생들이 많이 탔다. 한 번은 버스에 올라타자마자 현기증이 들어 순간 정신을 잃고 여학생들 앞에서 허접하게 바닥에 주저앉듯 넘어지고 말았다. 놀란 여학생들이 나를 쳐다보는 가운데 나는 아무렇지 않다는 듯 멋쩍게 웃으며 벌떡 일어나 위쪽 손잡이를 붙잡고 갔던 에피소드는 마치 오늘 아침 일처럼 잊히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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